한창 철거가 진행중인 한남동 인근의 주성동 어느 골목길. 마침 해가 저물고 가로등불이 환히 빛나는 언덕 계단. 너무 아름다웠다. 짙은 청람의 하늘과 오렌지빛 불빛의 대조. 거기에 후진 동네답게 벽에는 그림까지 그려져 있었으니 예술의 골목이었다. 곧 사라질 거란 생각을 하니 그냥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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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환된 기억 하나 

 

 

며칠 전 넷플릭스를 통해 사제지간인 조훈현과 이창호를 소재로 하는 영화 “승부”를 보면서 아주 오래 전 기억이 소환되었다.

 

1990년대 초반의 어느 일요일 아침 나는 이창호 국수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당시 이창호 국수는 스승의 집을 나와서 강남 고속터미널 인근, 지금 반포 자이 아파트의 길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한신아파트였던가?

 

이창호 국수의 생년월일시를 알고자 함이었고 혹시 만나게 된다면 사인도 받을 겸 해서였다.

 

(그 무렵 나 호호당 또한 한창 바둑에 재미를 붙였던 시절이라 기원에 가면 어느 정도 대접해주는 아마추어 3단 정도의 수준이었다. 당시엔 아마가 무슨 단이냐? 그냥 아마 강3급이지 했다.)

 

그런데 이창호 국수는 집에 없고 어떤 할머니가 나오셨는데 조모님이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내 소개를 하고 은행원이지만 사주명리를 연구하는 중이고 이창호 국수를 엄청 좋아하기에 이렇게 직접 물어보고자 찾아왔다고 사연을 얘기했다.

 

그러자 조모님께서는 헛걸음 하셨으니 아쉽네요 하시면서 그래도 이창호 국수의 생년월일시를 알려주셨다. 전혀 헛걸음은 아니었던 것이다.

 

 

종로2가 관철동 시절에 만나본 프로기사들

 

 

당시 한국기원은 1994년 이전하기 전까지는 종로2가 뒷골목인 관철동에 있었다. 그 바람에 1980년대 시절 지금은 사라진 조흥은행 광교 본점에 근무했던 나는 한국기원을 자주 찾았었다. 큰 길 하나 건너면 되니. 그곳에서 조훈현, 서봉수, 장수영 등등 내가 좋아하는 기사들이 쉽사리 눈에 띄었다. 천상병 시인도 기원에서 자주 만났다.

 

조훈현 국수는 날렵한 몸매에 발걸음도 엄청 빨라서 “역시 제비네!” 했다. 바둑의 행마 또한 워낙 경쾌해서 별명이 “조제비”였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어렵사리 직접 만나서 내가 좋아하는 프로 기사들의 사주를 입수하고 있었는데 1990년대 들어서자 조훈현 국수는 제자인 이창호 국수에게 연패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 바람에 스승 조훈현의 집에서 기거하던 내제자 이창호 국수는 생각보다 일찍 스승의 집을 나왔다. 

 

 

중국 명리에 대한 심한 회의감

 

 

당시 이미 십 수 년 동안 사주연구에 미쳐있던 바둑기사들만이 아니라 궁금한 사람이 있으면 불원천리 찾아가서 만나보곤 했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사주를 통해 확인해보았지만 도저히 그 이치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결과론적으로 억지로 갖다 붙이면 모를까 사전에 그들의 미래를 알아낼 순 없었기에 기존의 중국식 사주명리에 심한 회의감을 느껴야 했다.

 

결국 이 모든 회의와 의심은 훗날 2007년에 가서 운명에는 “자연순환의 이치”가 작용한다는 것을 얼추 감을 잡게 되면서 정리가 되었다.

 

자연순환운명학으로 두 사제의 운세를 정리해보면 참으로 흥미롭다.

 

스승인 조훈현 국수는 일간이 甲木(갑목)으로서 1953년생이고 운기의 절정인 입추는 1964년이었으며 가장 화려한 시절은 그로부터 15년 뒤 입동인 1979년 무렵이었다. 당시 이른바 모든 타이틀을 차지하는 전관왕의 위업을 여러 차례 달성하고 있었다.

 

 

이창호를 내제자로 들인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으니 

 

 

그런 그가 이창호를 내제자로 들인 것은 1986년이었으니 운세가 한창 기울고 있던 冬至(동지)의 운이었다.

 

동지, 겨울이 되어 더 이상 앞으로 나갈 비전(vision)이 없다 보니 제자를 받아들여서 미래를 향한 포석을 했던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오묘한 이치가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정작 조훈현과 이창호 두 사람 모두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운명학적 관점에선 아직은 스승이 제자보다 낫다 

 

 

그리고 이창호 국수의 경우 일간이 丙火(병화)로서 1996년이 立秋(입추)가 되고 2011년이 立冬(입동)이 되는데 살펴보면 스승 조훈현 국수와는 제법 차이가 난다.

 

세계대회에서 엄청나게 우승을 많이 했지만 2000년대 중반부터 중국을 포함해서 바둑계 전체적으로 인물들이 많이 나와서 그런지 몰라도 입동 무렵엔 이미 쇠락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그에 반해 스승 조훈현 국수의 경우 1994년 입춘 5년 전, 운세가 이미 한창 기울었던 그 시점에 응창기배에서 초대 우승을 차지하면서 우리 바둑의 위상을 극적으로 끌어올리는 혁혁한 위업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운세가 바닥을 기는 와중에도 절치부심 엄청난 노력을 통해 戰神(전신)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무서운 전투바둑으로 다시 살아나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바둑의 역사를 보면 일본에서 활약한 중국출신 기사 우칭위엔의 신포석 이후 계산과 끝내기로 승리를 차지하는 이창호 국수가 바둑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으며 최근에는 AI가 등장하면서 신진서 9단이 일세를 풍미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우칭위엔 이창호 신진서의 시대는 있어도 조훈현의 시대가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조훈현, 쇠락했다가 다시 부활한 유일한 케이스

 

 

하지만 한 번 쇠락했다가 다시 화려하게 부활한 기사는 여태껏 조훈현 국수가 유일한 경우이다. 그런 점에서 나 호호당은 그 점을 더 크게 인정을 해주고 싶다.

 

참고로 이창호 국수의 경우 내년 2026 丙午(병오)년이 60년 순환에서 다시 한 번 입춘 바닥이 된다. 부디 스승 조훈현처럼 또 다시 힘을 내어 활기를 되찾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정리하면 운명학의 관점에서 보면 아직은 스승 조훈현이 제자 이창호보다 더 훌륭하다. 그런 면에서 바둑 평론가들의 관점과는 정반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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