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번 확진자로 시작된 2020년의 봄



저번 19일 수요일이 雨水(우수)였다.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봄의 첫날이었다. 겨우내 따뜻하더니 약간 민망했나 보다, 봄이 오기 일보 직전에 동장군이 마지막 위력행사를 했고 그로서 물러갔다. 내 다시 돌아올 거야 하면서. 


봄이 왔으니 반가워야 할 터인데 이번 봄은 첫날부터 아주 터프하다, 불길하다. 이른바 31번 확진자의 발생과 함께 대구에서 연일 대량의 확진 환자가 발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정 교회라고 하는 상당히 뚜렷한 감염경로가 파악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으나 어쨌거나 전문의들이 그토록 염려해오던 지역사회 확산이 시작되었다. 변곡점(inflection point)이 되면서 한동안 잠잠하던 확진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고 있다. 


우리의 방역 체계가 잘 되어 있고 의료진의 수준 역시 대단히 우수한 것이 분명하지만 이젠 봇물 터진 것과 같은 상황으로 들어가고 있다. 


얼마 전 얘기한 바, 기본적으로 중국 유학생들은 물론이고 하루에도 수만의 중국인들이 입국하는 마당이라 아무리 공항에서 철저히 검역을 해도 무증상 감염자를 100% 철저하게 막아낼 순 없다는 점이다. 거의 중국 전역에 걸쳐 확산된 마당에 이미 봉쇄된 우한과 후베이 성의 입국만을 막는다는 것은 사실상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고 있는 것과 별 다름이 없다. 



월요일부터 새로운 국면이 시작될 것도 같으니



지난 달 첫 환자 발생으로부터 30일이 지나 대구에서 환자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오는 월요일은 첫 환자 발생으로부터 36일이 되는 날인데 만일 그 날부터 신천지 교인들만이 아니라 그로 인한 재감염이 시작한다면 그야말로 비상시국으로 돌입하게 될 것이다. 


36일은 수의 법칙에 있어 하나의 관문이자 게이트가 되는데 그게 뚫리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어쩌면 이번 코로나19가 하나의 도화선이 될 가능성도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코로나19 사태가 어쩌면 하나의 도화선이 될 가능성도 엿보인다는 점이다. 


예전 글에서도 몇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우리 대한민국의 국운은 작년 2019년 10월 甲戌(갑술)월부터 혹한기로 들어갔다. 해마다 맞이하는 겨울 또는 혹한기가 아니라 60년 국운의 순환에 따른 혹한기 말이다. 이는 2019년 10월에 시작해서 2022년 4월에 이르면 절정에 이를 것이며, 2024년 10월이 되어야 물러갈 것이니 60개월의 기간이다. 


국운의 酷寒(혹한)이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에너지가 극도로 떨어진 상황을 말한다. 무얼 해도 예전처럼 잘 되지 않고 꼬일 뿐만 아니라 이번의 코로나19처럼 전혀 예기치 않은 돌발 악재들이 연이어 발생하는 흐름이 예상된다. 


그런 탓에 이번 봄이 되면 분명히 뜻밖의 악재가 생길 터인데 그게 무엇일까 겨우내 궁리해 보았지만 당연히 미리 눈치를 챌 순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2월이 되자 소식이 왔으니 우한 폐렴, 최근엔 코비드 19로 이름이 붙은 사건이었다. 


2015년의 메르스 사태 때엔 다행히도 우리 방역망이 메르스의 지역사회 전파를 막아 낼 수 있었으나 이번엔 최초 환자 발생 30일 만에 대구를 중심으로 해서 지역사회 감염이 시작되었고 만일 그것이 전국으로 또 다시 확산될 경우 우리 모두 코로나 19라는 저 괴물과 길고 어려운 전쟁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가 시작일 수 있기에



하지만 앞으로 우리에게 닥칠 문제는 비단 코비드 19 저 놈만이 아닐 것이란 점이니 이제 시작인 셈이고 장차 더 큰 놈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데 있다. 여러 우려 중에서 가장 크게 걱정하고 있는 사안은 금년 말 내년 초에 중국 경제에 커다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중국의 붕괴에 대해선 내 블로그 프리스타일 제1678호 “중국의 붕괴가 가시권에 들어오고 있으니”란 글을 다시 읽어 보셔도 좋을 것이다.)


솔직히 내 생각을 털어놓자면 내년의 중국 경제 붕괴는 거의 필연이라 보고 있다. 그 시기 또한 내년 6월에서 9월 사이일 것으로 단정을 짓고 있다. 


중국 경제가 어떤 식으로 엎어지느냐 그 과정이야 모르겠으나 그렇게 될 경우 우리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은 어마어마할 것은 물론이다. 



보다 근원적인 악재가 출현하고 있으니



나 호호당은 2008년 11월에 장차 우리가 마주하게 될 5개의 악재에 대해 “다섯 개의 겨울 설산”이란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다섯 개의 악재는 다음과 같다. (김태규 명리학 코너 361번 글)


1. 미국 금융위기로 촉발된 전 세계적 디플레이션

2. 국내 부동산 가격의 하락으로 인한 경제 불황

3. 중국 경제의 거품 소멸에 따른 문제

4. 김정일 이후 북한의 붕괴 등 그에 따른 통일비용

5. 우리 산업의 노후화와 수출 경쟁력 저하


그런데 그간에 문제가 또 하나 생겨났다. 미국이 금융위기에 따른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과정에서 파생된 또 하나의 문제점이라 하겠는데, 그건 바로 미국이 이제 대단히 까칠하고 깐깐하게 변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론 앞의 1번과 관련된 사안이지만 미국의 최근 몇 년 간 보여주고 있는 흐름의 변화는 제2차 대전 이후 보여주던 모습과는 지극히 이질적인 것이기에 그간에 볼 수 없었던 일이다. 


현 상황으로 볼 때 트럼프의 재선이 무난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앞으로의 미국은 더 이상 예전처럼 적당히 손해 좀 봐주면서 너그럽게 이끌어가던 종갓집의 자세는 보이지 않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19세기의 대영제국을 위시해서 당시는 식민지 제국의 시대였다. 그러다 보니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엔 전 세계가 소위 列强(열강)이라 불리던 유럽 중심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식민지 지역으로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제국이거나 아니면 식민지였던 것이다. (우리 역시 아쉽게도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다.)


하지만 제2차 대전 이후 거의 절대적인 힘을 가진 미국이란 신흥의 초강대국은 기존의 식민지 제국들의 길을 택하지 않았다. 만일 미국에게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능히 그 길을 갈 수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식민지로부터 투쟁을 통해 탄생한 미국이었기에 그 길을 따르지 않았다. 


자유를 더 소중히 여기는 미국은 모든 식민지의 독립을 지원했고 그로서 미국은 인류 역사의 발전에 있어 크게 한 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미국은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을 선택했으니 바로 글로벌화였다. 이는 19세기 당시 시장과 자원의 우선적인 확보를 위해 내달렸던 식민지체제에 대한 대체물로서의 글로벌화였던 것이다. 


미국은 기본적으로 해외 시장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나라이고 내수 시장이 우선인 나라이다. 그렇지만 미국이 세계 경찰 역할을 하다 보니 미국의 해외진출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가능한 일이었고 그 결과 비용절감을 위한 아웃소싱과 같이 다양한 이유로 해서 글로벌화가 진행되었던 것이라 하겠다. 



미국의 새로운 생각



그런데 그러던 미국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마냥 이대로 갈 순 없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특히 중국의 약진을 그냥 둘 순 없다는 생각도 들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현재 미국은 그간의 일에 대해 면밀하게 손익계산서를 뽑아보고 손 볼 데가 있으면 시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 같고 그 바람에 미국은 이제 까칠해지고 깐깐해지고 있다. 


앞서 말한 다섯 가지 악재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며 조만간 더욱 구체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더하여 새로운 악재가 생겨났다는 점이다. 작년부터 우리는 일본과도 불편한 관계로 들어갔지만 그 정도의 악재는 미국이 매사 계산적으로 변해감으로써 생겨날 수 있는 어려움에 비하면 실로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본다. 


만일 중국이 내후년 정도에 가서 경제적으로 위기를 맞이하거나 붕괴될 경우 중국의 패권도전은 완전히 물거품이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미국으로선 어려운 상대를 제거한 셈이 되는 것이고 그 결과 미국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 역시 엄청난 변화를 보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미국의 글로벌 전략 자체가 수정될 것이기에 말이다. 


게다가 중국이 무너지면 결국 북한 체제의 급격한 붕괴까지 초래할 가능성도 급격히 높아진다. 정작 그런 일이 현실화될 경우 우리가 부담해야 할 부담은 상상을 초월한다. 



중국의 경제 위기는 즉각적으로 우리의 위기



중국 경제의 위기는 우리 수출산업에 대한 위기를 통해 전체 산업의 위기로 번질 것이고 그로서 우리 경제는 총체적인 난국을 맞이할 것이다. 또 그럴 경우 국내금융시장으로부터 외국인 자금의 급격한 이탈도 당연히 예상이 된다.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원화의 평가절하나 금리인상이 불가피할 것이고 그로서 부동산 시장은 수렁으로 빠져들 것이다. 또 그럴 경우 막대한 가계부채 문제가 즉각적으로 터져 나올 것이다. 일종의 연쇄반응. 


그런 마당에 미국은 까칠해지고 있고 또 북한체제의 붕괴가 있을 경우 그 우발채무를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떠맡아야 할 것이니 그야말로 생각하기조차 싫은 악몽이 현실화될 것이다. 


물론 다른 시나리오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좋은 그림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四面楚歌(사면초가). 


지금의 코로나19는 어차피 때가 되면 해소되겠지만 중국까지 연계해서 생각해보면 어쩌면 이것이 도화선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이제 우리는 어려운 길로 들어서고 있다.




슬럼프라는건 누구나 겪는다. 예측할 수 없이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다. 이 슬럼프는 훌륭한 스포츠 선수라도, 혹은 뛰어난 학자라도 예외가 없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슬럼프는 비교적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존재이고, 또 사실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늘은 이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았다.


이제 한숨 돌린 윤여정 선생님

 

 

털에 보니 “이제 사치부리고 살기로 했다”는 배우 윤여정 씨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저 분의 운명 순환을 알고 있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제 그렇게 생각하셔도 될 만한 때가 되셨지 싶다.

 

물론 저 말씀은 ‘그간에 고생 참 많이 했으니 이젠 좀 여유를 갖고 싶다’는 뜻이다. 1947년생이시니 올 해로서 일흔 넷이 되셨다. 노후를 풍요롭게 사시다 갈 것이다. 그러니 사치 좀 부리셔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윤여정 씨의 경우 2016년이 60년 순환에 있어 立秋(입추)의 운이었기에 앞으론 큰 부자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여유롭게 누리실 것이라 본다.

 

저 분의 경우 인생 바닥의 운세, 즉 입춘의 운이 1986년이었다. 그 11년 전인 1975년 인기가 아직 한창일 때 가수 조영남과 결혼한 후 미국으로 이민을 갖는데 그게 내리막의 출발점이었다. 결혼 생활에 실패하게 되자 1987년에 이혼을 했고 다시 연예계로 복귀했다.

 

연예계 복귀는 다름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서였다. 먹고 살기 위해 그리고 아이들을 부양하기 위해서였다. 생계형 배우로서 돌아온 것이다. 내색은 별로 하지 않았겠지만 정말이지 필사적으로 연기 생활을 이어갔을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연기력이 더욱 발전하고 한 단계 더 성숙해졌을 것은 당연하다. 먹고 살기 위한 노력만큼 세상에 진지한 것은 없다.

 

지금이야말로 배우 윤여정 씨의 진정한 전성기가 시작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1947년생이시니 1986년 만 39세의 나이에 바닥을 찍고 다시 오랜 시간에 걸쳐 재기해서 지금 다시 좋은 세월을 맞이하고 있는 윤여정 선생이다. 그간 고생한 심정을 나 호호당은 십분 이해할 수 있다.

 

 

부자의 운명이란

 

 

오늘은 부자가 되는 운명, 富命(부명)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부자가 될 사람은 세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첫째, 우선적으로 어떤 특별한 재능을 타고 나야 한다.

둘째, 60년 순환에 있어 가장 풍요로운 운을 60세 전후에 맞이해야 한다.

셋째, 본인의 운명만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 즉 時運(시운)과도 맞아야 한다.

 

이를 三才(삼재) 즉 天地人(천지인)으로 설명하면 첫째가 바로 사람, 즉 人(인)이고 둘째가 땅, 즉 地(지)이며 셋째는 하늘 즉 天(천)에 해당이 된다.

 

 

큰 부자는 하늘이 낳는 법

 

 

이 세 가지 조건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하늘, 天(천)의 작용이다.

 

하늘의 운, 즉 天運(천운)을 타고 나아만 큰 부자 또는 재벌이 될 수 있다는 얘기이다. 時運(시운)이란 본인의 명이나 운과는 상관이 없으며 그야말로 시대가 베풀어주는 운에 해당이 된다.

 

時運(시운)은 사실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나라나 사회의 장기 흐름 또는 운세 변화라고 봐도 무방하다.

 

예를 들자면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국운은 2024년 바닥을 향해 맹렬히 내리막길을 타고 있기에 큰 부자가 새롭게 등장하지 못한다. 이미 모든 것이 철저하게 틀이 지워져 있기에 새로운 기회가 생겨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런 흐름에선 신흥 재벌이나 큰 부자가 등장할 수가 없다.

 

큰 재벌이나 부호의 경우 60년 흐름만이 아니라 국운의 360년에 걸친 장기흐름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 그 나라가 한창 뻗어갈 때 그런 부호나 재벌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가령 미국의 국력이 바야흐로 펼쳐갈 무렵인 1800년대 후반에 록펠러와 카네기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우리 역시 앞으로 100년 정도는 정주영이나 이건희와 같은 거물, 본인 스스로 재벌이 되었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일자리를 창출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을 먹고 살게 했던 거물 기업가는 등장하지 못할 거란 얘기이다. 그런 분들은 본인의 능력이나 노력, 그리고 운을 떠나서 시대의 흐름을 탈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는 더 이상 신화적인 재벌 1세는 나오지 못한다.

 

(참고로 얘기하면 현재 우리의 경우 재벌 3세들이 속속 경영에 참가하고 있는데 그들이 향후 20-30년 이후에도 재벌로 남아서 4세에게 고스란히 넘겨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가장 좋은 흐름이 60세 전후해서 와야만 부자로 살다 간다.

 

 

물론 시대의 운 즉 天運(천운)을 만나지 않아도 일반적인 큰 부자라든가 알부자 정도는 앞의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할 경우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지만 3가지 조건 중에서 두 번째 조건, 즉 60년 운세 순환에 있어 가장 풍요로운 운이 60세 전후에 맞이해야 한다는 조건에 해당되지 않을 경우 한 때 부자가 될 순 있지만 죽는 날까지 부자로 남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령 40대에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면 여전히 기력이 왕성한 탓에 자칫 세월이 흘러가는 사이에 과욕으로 인해 결정적인 실수나 판단의 착오로 인해 몰락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40대에 부자가 되었을 경우 조심스런 성격 또는 보수적인 성향이라면 그런대로 끝까지 크게 실수하지 않고 부를 지켜나가게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한 방에 몰락하는 경우도 흔히 본다. 또 보고 있다.

 

(널리 알려진 유명인들 중에 장차 어렵게 될 사람들도 많이 알고 있지만 그런 것을 밝히는 것 자체가 덕을 해치는 일인 까닭에 입을 다문다.)

 

최근 나 호호당이 흥미롭게 향후 추이를 지켜보는 재벌 중에 아마존닷컴의 제프 베조스가 있다. 현 시점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돈이 많은 부호이지만 과연 저 양반이 장차 10년 사이에 여전히 부호로 남아있을 것인지 상당한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 다름이 아니라 올 해 2020년이 입춘 바닥인 까닭이다.

 

지키는 능력, 즉 守成(수성)할 수 있는 인물인지가 관전 포인트가 되고 있다. 워낙 냉정한 성격이기에 가능할 것도 같지만 성격적으로 콤플렉스도 많아서 언제 어떤 대목에서 패착을 범할 가능성도 대단히 높다는 점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역시 재벌이 되긴 했지만 출생에 따른 콤플렉스로 인해서 제 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일찍 죽고 말았다. 재벌은 되었어도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재능만 있다면 한 때나마 반드시 빛을 보는 법이니

 

 

마지막으로 첫째 조건, 즉 나름의 특별한 재능을 가진 자는 살아가는 가운데 한 번은 부자소리를 듣게 된다. 게다가 요즘 세상은 옛날에 비해 재능을 살릴 기회가 많아졌기에 재능만 있다면 반드시 언젠가는 한 번 빛을 보기 마련인 까닭이다.

 

특별한 재능이 없다 해도 나름 운세가 풍요로운 때를 만나면 부동산 하나 잘 잡는 바람에 부자 소리를 듣게 되기도 한다.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운이 좋다 보면 어쩌다가 한 번 행운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름 재능이 있을 경우 반드시 한 때나마 빛을 보기 마련이란 사실이다.

 

그런데 재능이 있어서 한 번 반짝 하는 세월을 만났건만 그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재능에 반비례해서 다른 약점이나 문제점도 있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당에 운이 내리막으로 가다보면 그만 덜커덕 걸려들어서 그렇다.

 

 

30세 무렵에 바닥을 다지면 오히려 좋은 법이라서

 

 

그리고 지금까지의 얘기 중에 미처 언급하지 않은 중요한 대목이 하나 있기에 그 점에 대해 보충해본다. 앞서의 두번째 조건이 그것이다. 60년 순환에 있어 가장 풍요로운 운을 60세 전후에 맞이해야 한다는 점이다.

 

60세 전후에 가장 풍요로운 운을 맞이한다는 것은 그와 반대로 30세 전후한 무렵에 바닥을 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60년 흐름이기에 30년의 전과 후는 반대의 운이 되는 까닭이다. 앞서의 윤여정 씨 경우도 거의 비슷하다.

 

30세 전후해서 최악의 시기가 된다는 것은 가령 스카이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다거나 아니면 그 무렵에 몸이 아파서 고생하거나 하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대개 이럴 경우 주변 사람들은 저 친구 앞날이 없으리라 여기겠지만 실은 바로 그런 때를 그 무렵에 겪은 사람들이 60세 전후해서 최고의 호운을 맞이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경우 40대 중반부터 발전하기 시작해서 60대에 오히려 더 힘을 내고 빛을 보게 되며 그로서 죽는 날까지 부자로 잘 살아가게 것이 일반적이다. 끝이 좋아야 다 좋은 법이니 이런 경우이다.

 

 

부자가 되는 것과 행복한 것은 별개의 문제

 

 

부자가 되는 사람과 그 운명에 대해선 그간 무수히 많은 사례 연구와 실제 상담을 통해 겪어 보았기에 익히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부자가 된다고 해서 그것이 꼭 행복하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란 점을 밝혀두면서 글을 맺는다.

薄明(박명)의 시간



봄비 내린다는 절기인 雨水(우수)에 채 미치지 못했는데 봄비가 내린다. 따뜻한 겨울을 났으니 좋은 일이다. 해도 제법 길어졌다, 저녁 6시가 한참 지났음에도 하늘이 그다지 어둡지 않다. 서울의 일몰이 6시 8분이니 그렇다. 


해 진 후 30분 정도의 시간,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까지의 그 사이 시간, 薄明(박명)이라고 부르는 이 시간을 많이 좋아한다. 사물이 여전히 다 눈에 들어오고 여기저기에서 가로등이 밝혀지기 시작하는 때, 요즘엔 서쪽 하늘에 금성이 어느 순간 툭-하고 튀어나온다. 아직까지 금성이 나오는 최초의 순간을 포착해본 적은 없어서 볼 때마다 또 놓쳤네! 하면서 아쉬워한다. 



N포 세대의 일본 청춘들


간밤에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란 제목의 일본 영화를 보았다. 모르는 영화였지만 그냥 보게 되었다. 삶에 대해 어떤 희망을 갖는 것 자체를 오히려 경계하며 살아가는 도쿄의 처녀와 그와 비슷한 처지의 총각의 얘기였다. 간단히 말해 모든 것을 포기한 일본의 젊은 세대들의 스토리였다. 


2017년의 영화였는데 일본은 우리를 늘 몇 년 앞서가니 저 모습은 몇 년 뒤 우리 젊은이들의 모습이겠구나 싶어 더 공감이 갔고 가슴이 아팠다. 영화는 물론 영화, 하지만 너무 현실 같아서 보다가 중단했고 그러다가 결국 끝까지 다 봤다. 


일본 사람들은 근무할 때 특히 고객 앞에선 늘 상냥한 미소로서 맞이한다. 억지 미소인데 일본 사람들은 그런 것이 몸에 배어있다. 일본인에게 있어 미소는 근무나 서비스의 기본 항목인 까닭이다. 


우리와 일본 사람의 차이라면 어쩌면 이게 전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가식의 미소라도 지어야만 한다고 여기는 일본 사람, 그런 가식 따윈 굳이 필요치 않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우리, 이것 하나만으로도 우리와 일본 문화의 차이를 거의 모두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이따금씩 한다. 



일본, 마스크의 문화



나 호호당은 일본의 문화를 ‘마스크의 문화’라고 여긴다. 타인을 대할 때만이 아니라 어지간히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자신의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 특히 불편한 심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은 상대방에게 부담이 되고 실례가 된다는 생각을 가진 일본인이라 여긴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많이 다르다. 가까운 사이인 경우 거침이 없다. 내가 너 아니면 누구에게 이런 힘든 얘기를 털어 놓겠니 하면서 속내를 주저하지 않고 얘기한다. 상대의 하소연을 들어준다는 것은 어느 정도까진 그 해결에도 동참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니 부담을 느낄 때도 많다. 


그 바람에 야, 그만 좀 해라 하고 말하면 그야말로 섭섭하고 서운한 표정 가득 짓는 우리들이다. 마치 배신이라도 당했다는 듯이. 


그렇기에 일본 사람들의 대인관계는 마치 연하게 우려낸 묽은 녹차 맛 같다는 생각이고 우리들의 대인관계는 진한 곰탕 국물 맛 같다는 생각이다. 이에 우리 사람들은 사실 차를 즐겨하는 편이 아니다. 밍밍한 까닭이다. 그보다는 강렬한 향을 가진 커피, 특히 나이든 세대들은 단연 커피믹스를 즐긴다. 


갑질이란 말, 권력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가 그 아래 사람에게 마구 행세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갑질 또한 우리가 일본보다 더욱 노골적인 것 역시 속내를 좀처럼 감추지 않는 우리들의 성향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일본, 愛憎(애증)의 대상이어서



나 호호당 역시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있다. 선친께선 일제 말기 학도병으로 징집되는 바람에 遺緖(유서)를 쓰고 일본에 끌려가서 여러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는 얘기를 어려서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나름 은근한 친밀감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는 최근의 흐름으로 볼 때 조금은 부담이 된다. 그렇기에 왜 그런 친밀감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라도 생각을 밝힐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친밀감을 갖는 이유



일본에 대해 애정을 갖는 근본적인 이유는 일본 사람이라고 하는 그들 대부분이 먼 옛날 이 땅에서 바다를 건너가 정착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대략 기원 전 1000년부터 기원 후 5백년 정도에 걸쳐 끊임없이 이 땅에서 이주해간 사람들이기에 우리와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가까운 血緣(혈연)의 관계란 점에서 일본에 대해 애정을 갖는다. 



교토를 개척한 이들 역시 건너간 사람들



특히 일본 역사에서 야요이 시대라고 부르는 시기, 한반도로부터 큐슈를 지나 일본으로 들어간 야요이인들은 한반도에서 유래한 수도경작(水稻耕作)을 통해 기원전 3세기 경부터 기원후 3세기 중반까지 일본 열도 각지에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들과 우리 사이에 사실 별 차이가 없다는 얘기이다. 


일본의 역사 古都(고도)인 교토를 먼 옛날 처음 개간했던 사람들은 당시로선 혁신적인 기술인 제방을 쌓아 농토를 넓혔다고 한다. 이들은 일본에선 賀茂(가무)씨족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어 발음으론 ‘가모’라고 한다. 


그들은 교토 북쪽에 터를 잡고 살면서 조상들의 사당을 세웠는데 그를 ‘가모신사’라 한다. 교토의 가장 오래된 神社(신사)인 것으로 전해진다. 


가모 씨족, 또는 가모씨에서 가모란 말의 유래는 흥미롭게도 그들이 모시던 신앙인 三足烏(삼족오)에서 왔다는 점이다. 삼족오는 태양 속의 까마귀이자 태양의 전령이고 또 까마귀는 우리 옛말에도 ‘가마귀’라고 했다. 


가마귀에서 끝말인 귀는 기로서 새에 대한 총칭이다. 기러기, 비둘기 등등 새를 지칭하는 말이기에 가마귀는 가마기인 것이고 검은 새를 말한다. 중국에선 玄鳥(현조) 즉 검은 제비이고 우리는 까치이며 일본에선 까마귀로서 실은 다 같은 말이다.

 

삼족오는 중국 북부에서 만주, 한반도, 아울러 일본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있던 고대 신앙으로서 이른바 東夷(동이)족의 것이다. 특히 고구려 시절엔 최고 권력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賀茂(가무)씨, 일본 역사의 중핵이자 古都(고도)인 교토를 처음 개척한 사람들 역시 이 땅에서 건너간 사람들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일본의 저 수많은 神社(신사)란 것은 결국 이 땅에서 건너간 선조들을 기리는 사당이라 봐도 절대 틀리지 않는다.


 

백제의 멸망과 동시에 생겨난 일본



日本(일본)이란 국호가 처음 등장한 것은 기록에서 보면 중국 역사서엔 670년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702년이라 한다. 


어떤 연유로 해서 그 무렵에 와서 갑자기 日本(일본)이란 나라 이름이 생겼을까? 그 까닭에 대해 나 호호당은 그게 우연이 아님을 알고 있다. 


백제가 멸망한 것은 660년이었기 때문이다. 母國(모국) 백제가 없어지자 엄청난 충격을 받은 일본 쪽은 급기야 백제와 떨어져 자립 혹은 독립하기로 마음을 먹고 만든 국호가 일본이었던 것이다. 모국 백제가 사라졌으니 이 땅 즉 일본 열도에서 백제를 이어서 독립하자는 저들의 결정이 국호 日本(일본)이란 명칭에 담겨있는 것이다. 


백제의 멸망이 즉각적으로 일본이란 나라를 생겨나게 한 셈이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



일본이란 국호를 짓고 독립한 것만이 아니라 아예 역사도 새로 쓰기로 마음을 먹고 편찬한 것이 바로 日本書紀(일본서기)였다. 당시 일본의 왕인 덴무가 명을 내렸고 이에 680년경에 시작해서 720년에 완성한 것이 일본서기인 것이고 그 바람에 엄청난 창작본이 되고 말았다. 역사 세탁을 한 것이다.

 

반면에 우리의 고대 역사서인 三國史記(삼국사기)는 고려 시대에 편찬되었는 바, 그 당시 마침 서경( 지금의 평양)천도론을 주장했던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는 대단히 거칠고 간단하게 다루어졌다. 신라 중심의 역사관이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우리 고대사의 진면목은 창작본인 일본서기와 신라 중심의 삼국사기에 의해 영영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삼국사기의 잘못도 적지 않다. 일례로서 중국 역사서인 宋書(송서)나 여타 역사서에 보면 “其後高驪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라고 적혀 있다. 번역하면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했고 백제가 요서를 차지하여 다스렸으니 진평군 진평현이라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 역사서인 通典(통전)엔 진평군의 위치에 대해 “今柳城北平之間”이라 되어 있다. 기록에서 柳城(유성)은 지금 중국 요령성의 차오양 시이고 北平(북평)은 지금의 베이징 부근을 말한다. 문자 그대로 고대 중국의 遼西(요서)는 한 때 백제의 강역이었다는 얘기이다. 


이에 대해 나름 많은 의견과 주장들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백제가 한때나마 요서 지역을 차지하고 다스렸다는 점에 대해 중국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엔 그런 내용이 없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고구려는 아쉽게도 발해가 망하면서 우리 역사 흐름에서 사라져갔고 삼국을 통일한 이른바 통일신라가 지금 우리 한민족의 원형이라 하겠지만 백제 또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백제의 후예로서의 일본



이제 나 호호당이 왜 일본에 대해 일제치하에서 우리가 핍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름 애정을 갖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저들이 백제의 후예란 점 때문이라 하겠다. 


물론 바다 건너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다 보니 차이점이 적지 않은 우리와 일본이다. 하지만 전 지구상에서 살펴보면 가장 닮은 점이 많은 나라가 또 우리와 일본이란 점이다. 차별하고 구분하자면 한도 끝도 없이 미세하게 구분하고 차별해낼 수 있다, 하지만 큰 눈에서 보면 일본 아니 일본사람들만큼 우리와 유사한 사람들 또한 없다. 


먼 미래를 생각할 때 우리 대한민국이 번영 발전함에 있어 친한 이웃을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니 그런 점에서 북녘의 우리 반쪽은 물론이고 일본과도 친하게 지내야만 한다고 본다. 물론 당장은 어려워 보이겠지만 실은 먼 미래의 일도 아니라 본다. 


그래야만 바로 서해 건너의 땅 넓고 인구 엄청 많은 중국에 대해 나름 견제도 해가면서 또 그를 통해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나 호호당은 늘 하고 있다.


경찰서에서 벌어진 일



1월 3일 우한시 공안국 우창 분국의 어느 파출소에서 공안 2명이 한 명의 의사를 상대로 단단히 혼을 내고 있었다. 


파출소의 調書(조서) 마지막에 이렇게 적혀있다. 


“우리들은 자네가 냉정하게 생각을 잘 바꾸길 바란다, 아울러 정중하게 자네에게 경고하는 바, 잘못했다는 마음 없이 생각을 고집하면서 법에 위배되는 행동을 계속한다면 앞으로 법률적 제재를 받게 될 것이다. 명백히 알아들었는가?” 


이에 그 의사는 명백하게 알아들었다고 문서 하단에 친필로 적은 다음 붉은 인주를 묻혀서 指章(지장)도 찍어놓았다. 


조서에 나타난 被(피)훈계인은 한자로 李文亮, 즉 리원량이라 되어 있다. 


그로부터 34일이 흐른 2월 6일 자정 무렵에 훈계를 당한 리원량은 신종코로나 바이러스로 사망했다. 리원량은 작년 12월 30일 우한시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 외부에 처음으로 공개한 의사이다. 


그는 안과의사였으나 변형 바이러스로 인한 괴질이 발생했음을 확인하고 인터넷에 공개했다가 1월 3일 공안에게 끌려가서 엄중 훈계를 받았고 그 이후 1월 8일, 병원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를 진료하다가 본인도 감염되었다.

 

1월 12일 격리되어 집중치료실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지만 진단 키트가 없던 관계로 확진은 2월 1일이 되어서야 판정을 받았다. 동료들과 가족들도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죽었어도 졸지에 고문을 당한 억울한 의사



문제는 어제께 사망한 뒤의 일이다. 실로 처참하다. 사실 그는 엊저녁 9시 30분에 심장박동이 멈추었는데 그 이후 무려 3시간씩이나 체외막산소공급장치, 에크모(ECMO) 시술과 함께 심폐소생을 위한 CPR, 전기충격장치를 사용하는 바람에 리원량의 시신은 처참한 상태로 변해버렸다. 구글에 올라온 중국 보도에 의하면 “导致肋骨全断,面目全非”, 즉 근육과 뼈가 모두 절단되고 얼굴은 완전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것이다.


3시간씩이나 전기충격을 가했으니 육신이 남아날 까닭이 없다. 근육과 뼈가 모조리 작살이 날 수 밖에. 이미 죽었기에 고통이야 없었겠지만 이거야말로 시신훼손 또는 학대가 아닌가! 무조건 살려 놓고 보라는 상부의 지시로 인해 의료요원들 또한 생고생을 한 셈이다. 


가끔 얘길 듣다 보면 독재 체제, 또는 권위주의 체제가 문제가 많긴 해도 이런 질병이 유행하면 독재권력의 힘을 이용해서 민주주의 체제보다 주민들에 대한 질병 통제는 어떤 면에서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얘기도 듣게 된다. 나는 그게 천만의 말씀이라 여긴다. 


시황제 통치 하에서 이런 괴질 자체가 있어서도 안 되고 유행하면 더더욱 안 되는 것이기에 우한 시장은 무조건 막고 보았을 것이고 그러다가 번져나가자 뒤늦게 자책하고 있다. 



우한에 대한 추억



나 호호당이 우한에 들렀던 것은 1994년의 일이다. 벌써 26년 전의 일이다. 우한시는 세 개의 도시가 합쳐져서 생겨난 도시로서 가운데 장강이 흐르고 있다. 우한에 갔던 까닭은 최호와 이태백이 시를 읊은 黃鶴樓(황학루)에 가보기 위함이었다.


그런가 하면 우한은 만주족의 청 왕조를 무너뜨린 1911년 신해혁명이 시작된 곳이니 武昌(우창) 봉기가 그것이다. 아울러 우한은 삼국지연의에서 관우가 지키던 형주, 오나라의 손권이 돌려달라고 징징대던 그 형주의 남단 끝이기도 하다. 


갔을 때가 5월이었으나 벌써 무더위가 대단했다. 우한은 중국에서 가장 무더운 쓰촨의 청뚜에 버금가는 곳이란 걸 그때 알았다. 그리고 우한은 실로 엄청나게 거대한 도시였다. 


나 호호당은 1994년부터 1996년까지 사업 차 베이징에 주로 머물렀고 그러면서 두어 번 가본 적이 있다. 



權貴(권귀)의 나라, 차이나(China)



이런 과거지사를 꺼내는 것은 나 호호당이 중국에 대해 제법 알고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함이다. 중국어도 제법 능숙한 터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교류하고 인연을 맺었으며 그를 통해 중국사람들의 생각에 대해서도 많은 얘길 들었다. 이번에 부임한 주한 중국 대사 싱하이밍씨도 2000년초 서울에서 만나서 식사도 몇 번 한 적이 있다. 


싱하이밍 대사의 경우 이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와 관련해서 우리 언론들에게 WHO의 권고를 따르라고 적잖이 기분이 좋지 못한 말을 했다. 그 기사를 보고 쓴 웃음을 지었다. 중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직책이기에 그랬으리라 본다. 실은 대단히 정중하고 사려 깊은 양반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말이다. 


중국, 덩치만 컸지 도무지 21세기 글로벌 시대에 주변국들을 이끌어가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나라란 생각을 늘 하고 있다. 그냥 과거 중국의 왕조 체제에서 거의 변한 것이 없기에 이런 말을 한다. 


물론 중국은 그간에 근대화를 열심히 해왔고 공산당은 중국이 인민주권의 나라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렇게 여기는 중국인은 없을 것이라 본다. 


여전히 중국에선 權貴(권귀)란 말을 흔히 사용한다. 권력을 쥐고 행세하는 귀한 신분이란 뜻이다. 중국 최고의 권귀는 공산당이고 공산당 중앙위원회 사람들이며 그 정점에 시진핑이 존재한다. 


이번에 우한시장도 시진핑이나 중앙당 상무위원들에게 미움을 살까 겁나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엄폐 은폐했을 것이다.

 

너 이제 죽었다 싶어서 생년월일을 검색해보지만 위키엔 나오지 않는다. 그저 1962년 11월생이라고 되어있다. 중국 공산당 간부들은 으레 자신의 생년월일을 비밀에 붙인다. 혹시라도 사주를 검색해서 자신의 운명에 관한 정보가 누출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이 말 농담이 아니다. 중국 공산당 權貴(권귀)들은 자신의 생년월일시에 관한 정보를 밝히지 않는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사석에서만 간혹 밝히곤 한다. 


아무튼 넌 이제 죽은 목숨이다 싶다. 이번 일이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되면 인민들의 울분을 달래줄 희생양이 필요할 것이니 심지어는 사형에 처해질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박근혜 정부가 무너진 시작도 사실 세월호 사건의 근본 당사자인 유병언이를 체포 압송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포토라인 앞에 세워놓고 기자들이 밀치고 당기고 하면서 심한 모독을 주고 개망신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옛날 같으면 광화문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효수를 했어야만 국민들의 응어리가 풀렸을 것을 어느 날 느닷없이 변사체로 발견되고 말았으니 박근혜 대통령은 재수가 지지리도 없었던 셈이다. 


이번 우한 폐렴 사건 역시 시진핑에겐 대단한 위기국면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 사후에 뭔가 드라마틱한 解寃(해원)굿을 펼칠 것이 확실하다. 


그러니 앞으로 돌아가서 이미 시신이 된 리원량을 어떻게든 살려보고자 전기충격을 3시간이나 가해서 뼈와 근육을 모조리 끊어놓고 얼굴을 짓이겨 놓아야 했던 것은 나름 이해가 간다. 이놈의 자식 죽으면 큰 일 난다 싶었던 중국 당국이다. 



중국에선 꽌씨가 없으면 살아가기 어렵다.



내가 알고 있는 중국이란 나라는 공적 사회적 신뢰는 대단히 취약한 나라이다. 정부나 관에서 하는 말을 곧이 믿는 중국 인민들은 없을 것이다. 은행에도 함부로 마음 편하게 예금을 맡겨놓지 못한다. 정부가 어느 날 몰수해버리면 끝이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중국의 있는 자들과 가진 자들은 금괴를 비밀 장소에 은닉하고 또 달러로 바꿔서 해외로 반출해놓는다. 


그렇다면 중국 당국은 자금도피를 왜 막지 못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공산당의 權貴(권귀)들부터 돈을 빼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시진핑의 ‘중국몽’은 중국이 글로벌 무대에서 떵떵거리는 것이지만 중국 중상층 사람들의 꿈, ‘중국인몽’은 미국 시민권을 따놓는 데 있다. (물론 하발통인 농민공들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고.) 


그런 중국이기에 중국 사람들은 개인간의 관계와 신뢰를 엄청나게 중하게 여긴다. 이른바 ‘꽌씨’가 그것이다. 꽌시란 것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접대 열심히 해준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작은 것을 끊임없이 주고 받으면서 즉 기브 앤 테이크를 해가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무형의 자산이라 보면 되겠다.

 

중국 역시 법제가 엄연히 잘 만들어져있지만 사실 크게 중요하지가 않다. 없는 자나 약한 자에겐 철통같은 법망인 것이고 가진 자나 權貴(권귀)에겐 아무런 것도 아닌 것이 중국의 법인 까닭이다. 


이런 비합리적이고 사회적 신뢰가 없는 중국이 향후의 패권을 쟁취할 가능성? 감히 단언하건대 불가능하다고 본다. 



입추의 운에 세상을 떠난 리원량



마지막으로 얘기할 것은 리원량의 생년월일을 보니 흥미롭다는 점이다. 이 친구는 생일이 나와 있다. 평민인 까닭이다. 1986년 10월 12일이다. 따라서 丙寅(병인)년 戊戌(무술)월 己丑(기축)일이다. 생시를 모르지만 그간의 경력으로 볼 때 2019년 작년이 立秋(입추)의 운이었던 것으로 판단이 된다. 


그런데 그만 입추의 운에 겨우 34세의 나이에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운명을 연구해오면서 이런 특이한 케이스를 가끔 만난다. 이 사람, 비록 죽긴 했지만 그 이름은 중국인들의 뇌리 속에 두고두고 망각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죽었어도 이름을 남기는 경우라 하겠다. 이런 경우 리원량의 죽음은 중국 사회가 장차 긍정적으로 발전해감에 있어 의미가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 본다. 훗날에도 오래오래 추모될 것이다. 


중국에서 발표하는 사망자수 전혀 믿지 못한다. 진단 키트도 제대로 없는 마당에 그냥 폐렴으로 사망한 것으로 치부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싶다. 


이번 우한 폐렴은 직접적인 인과는 없겠으나 내년 중국 붕괴의 신호탄이 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정부는 중국인의 입국을 사실상 방치하고 있으니 불안하기만 하다. 각자가 알아서 조심할 수밖에 없다. 모두에게 행운이 있기를.


일요일 오후의 에피소드


오늘은 바둑을 통해 운의 흐름이 바둑 선수 즉 프로 기사들의 활동과 행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나 호호당은 예전에 한창 바둑을 즐기던 시절 아마 3단 정도의 수준이었기에 나름 바둑 채널을 즐겨본다. 어저께 일요일 점심 무렵 두 명의 젊은 프로바둑기사가 결승 3차전의 마지막 시합을 펼치고 있었다. 크라운해태가 후원하는 타이틀 매치였다. 


타이틀 매치이니 누가 승리할 것인지 당연히 관심이 갔고 이에 인터넷을 통해 두 기사의 생년월일을 확인해보았더니 송지훈 5단의 승리가 예상되었다. 상대는 이창석 5단이란 젊은 기사였고. 


시합은 3판2승제였고 시합은 금요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첫 시합은 내 예상과는 달리 이창석 5단이 먼저 승리를 가져가는 것이었다. 으잉! 송지훈이 이길 것 같았는데 첫판을 졌으니 나머지 두 판을 모두 이겨야만 하네, 이거 참 난감하네. 


다행히 토요일 시합은 송지훈 선수가 이겼고 그리하여 일요일 3차전에서 승자가 결정될 참이었다. 아무 상관도 없지만 생년월일을 통해 졸지에 송지훈의 승리를 점친 터라 나는 시작부터 열심히 송지훈 5단을 응원했다. 그런데 내용은 점점 이창석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인공지능 역시 이창석의 승리를 예고하고 있었다. 


바둑판 위에 돌이 거의 다 놓였는데 도무지 송지훈이 역전시킬 가망성은 거의 없어 보였고, 해설자도 이창석의 무난한 승리를 예고하고 있었다. 아, 이거 내 예측이 틀렸다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이유가 뭐지? 하면서 보는 내가 초조해졌다. 


아 저 친구 초장부터 무리하게 두더니 냉철한 아웃복서 스타일의 이창석에게 완전 휘말려서 힘을 쓸 데가 없네 하며 연신 탄식도 하고 아, 빙신아 쪼다야, 저런 멍청이, 이런 식으로 송지훈 5단을 탓하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어느 순간 갑자기 놀라운 반전이 생겨났다. 


거의 승리를 목전에 둔 이창석 5단이 말도 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일대 착각을 범했고 이에 송지훈 5단이 잽싸게 찬스를 낚아챘던 것이다. 그로서 바둑은 일거에 역전되고 말았고 더 이상 둘 데가 없는 막판이었기에 그냥 송지훈의 역전승으로 끝이 났다. 


송지훈 선수가 이긴 것은 그야말로 운이었다. 말도 되지 않는 기막힌 행운이었다. 두 선수 모두 젊은 기사로서 생애 최초로 타이틀 매치까지 힘겹게 올라온 상황, 내가 이창석을 싫어할 이유도 없고 송지훈을 편애할 이유라곤 더더욱 없었다. 다만 운세 판단을 해보니 송지훈의 승리가 예상되었을 뿐이다. 


다만 운세 판단에 무지막지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나로선 그야말로 송지훈선수가 승리해야만 자존심을 지킬 상황이었기에 애를 태워가며 매달려야 했던 상황이었다. 



두 기사의 운세가 판가름한 바둑



송지훈 선수의 생년월일은 1998년 2월 23일, 戊寅(무인)년 甲寅(갑인)월 辛丑(신축)일이다. (최근 90년대생들은 당연히 양력 생일이다.) 따라서 앞뒤의 상황을 볼 때 2011년 辛卯(신묘)년이 60년 운세 순환에 있어 立秋(입추)가 될 것이니 2020년 2월 초의 운세는 秋分(추분)이 된다. 


추분은 드디어 두각을 드러내는 때, 등용문의 때이니 이번 크라운해태배를 통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것이다. 


반면 상대 선수였던 이창석 선수는 송지훈 선수보다 두 살이 더 많은 1996년 4월 27일 생이다. 따라서 丙子(병자)년 壬辰(임진)월 甲午(갑오)일이다. 그간의 프로필로 볼 때 이 선수는 현재 운세 흐름이 아직 입추가 되질 않았다. 2024년 甲辰(갑진)년이 입추가 된다. 아직 두각을 크게 나타날 때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송지훈은 한국 기사 랭킹 23위이고 이창석은 랭킹 39위의 선수이다. 두 선수는 모두 같은 바둑 도장 출신이기에 무척 친하다고 한다. 다만 재미난 점은 두 사람의 상대 전적은 이창석이 송지훈에게 약간 앞서고 있다. 아마도 이창석이가 송지훈의 스타일과 약점을 잘 알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아무튼 이번에 타이틀 홀더가 된 송지훈은 이를 계기로 급성장하게 되리라 본다. 큰 시합에서 이기면 자신감이 붙어서 더 활약을 하게 되는 까닭이다. 


하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최정상급 기사로까지 발전하리라 보진 않는다. 아마도 랭킹 10위안의 선수로까지 성장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길게 보면 이창석 선수는 아직 운이 입추도 되지 않았는데 결승전에까지 올랐다는 점에서 장래가 더 유망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도 이창석 선수는 간밤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하루 종일 바둑판이 눈앞에 떠올랐을 것이고 잠자리에서도 자신의 실수한 장면에 관한 영상 때문에 독한 술이라도 한 잔 하지 않는 이상 수면에 들지 못했을 것이다.

 

다 잡은 바둑, 골인 직전에 무언가에 홀려서 놓쳤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하겠는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아픔을 겪으면서 대기만성형의 기사로 발전해갈 것이다. 



천재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다는 얘기



바둑 얘기가 나왔으니 좀 더 해보고자 한다. 


꼭 바둑에 한하는 얘기는 아니지만 어떤 선수가 있다고 할 때 천재성이 있는지 아닌지 하는 문제를 나 호호당은 금방 판별할 수가 있다. 


가령 키움 히어로즈의 유격수 김하성 선수의 경우 2011년이 立秋(입추)였기에 2018년 무렵이면 추분의 운이다. 마침 그 해 올스타에 뽑혔을 뿐 아니라 경기에서 MVP까지 되었다. 저 정도면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선수라 할 수 있지만 천재란 수식어를 붙이기엔 조금 미흡하다. 물론 앞으로도 10년 정도는 거뜬히 최고의 선수로서 전성기를 누릴 선수라 볼 수 있다. 


야구나 축구 등등 다양한 방면에서 데뷔하는 시점에서 돌풍을 일으키거나 많은 화제를 모았다가도 정작 얼마 가지 않아 시들해지는 선수들이 많은데 이 역시 그 이유가 처음 등장하는 시점이 최고의 운세였던 경우에 해당이 된다. 


천재인가의 여부는 운세가 입추가 되지 않았음에도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 그 선수는 천재라 볼 수 있다. 그런 선수는 입추가 지나면서 더욱 발전하고 추분 무렵이 되면 최고의 자리에까지 간다. 대표적인 예로서 우리 축구의 영웅인 손흥민 선수가 그렇다. 손 선수의 경우 입추가 2015년인데 2010년 만 18세의 나이에 벌써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 


그런 면에서 장차 한국 바둑을 이끌어갈 갈 최고의 선수는 단연 신진서 9단이다. 이제 만 20세에 불과한 기사로서 2000년 3월 17일생, 庚辰(경진)년 己卯(기묘)월 甲戌(갑술)일이다. 이 경우 2024년 甲辰(갑진)년이 되어야 비로소 입추의 운인데 벌써 한국 기사 랭킹 1-2위를 다투고 있다. 이창호 9단에 버금가는 천재 기사라 하겠다. 


지금은 쇠퇴한 이창호 9단 역시 대단한 천재라 하겠다. 1996년이 입추인데 그 4년 전인 1992년에 벌써 타이틀 홀더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진서 9단 역시 2024년이 입추인데 벌써 저 정도로 활약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장차 이창호 9단을 능가할 수도 있는 경지로까지 발전해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최정 9단, 여성 기사 중에 기린아



바둑의 경우 아직까지는 여성 기사들의 실력이 남성 기사에 비해 떨어진다. 그런데 최근 이런 흐름을 깨뜨리고 있는 여성 기사가 있으니 바로 최정 9단이다. 여성 기사 중에선 세계 최강임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남녀 전부해서 국내 랭킹은 아직 17위에 머물고 있다. 물론 몇 년 사이에 랭킹은 빠른 속도로 상승중이긴 하다.

 

그런데 나 호호당이 보기에 최정 9단은 아직 성장 중인 기사로 판단이 된다. 운세로 볼 때 2017년이 입추였기에 추분이 되는 2024년까진 훨씬 더 기량이 성숙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운칠복삼이 맞는 말이다.



‘운칠기삼’이란 말이 있지만 나 호호당이 보기엔 모든 것이 ‘운칠복삼’이 훨씬 더 정확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노력이란 것 역시 운이란 점 확인해드린다.


 

문 열어놓고 모기약 뿌리는 정부



글과는 관련이 없지만 우한 폐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포가 며칠 사이 대단한 것 같다. 겉으론 태연한 척 했지만 나 역시 은근히 겁을 내고 있구나 싶은 일이 어제 있었다. 잠깐 작업실에 나갔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떤 이가 갑자기 크게 기침을 하는 것에 놀라 나도 모르게 입과 코를 가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작업실에 들어가는 즉시 손과 얼굴을 씻었다. 


그런 면에서 정부의 하는 짓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미 중국 전역으로 다 퍼진 마당이고 감염자가 공식통계의 열 배가 될 수 있다는 보도도 있는 판국에 우한에서 오는 사람들만 입국제한을 걸겠다는 것이 그렇다. 


우한은 봉쇄되었기에 올 사람도 없을 것이니 아무런 실효가 없는 조치에 불과하다. 그저 시늉만 하고 있다. 필시 6월의 시진핑 방한 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저러다가 때를 놓치고 대확산 사태가 오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모기약을 뿌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최초 발생으로부터 무려 50일이나 놀고 있었던 중국 당국



우한폐렴은 초기 대응의 실패가 불러온 사태이자 문제이다. 당초 우한시 위생건강위원회는 최초 감염을 12월 12일로 추정했는데 얼마 후 다른 연구진의 연구에 의해 최초 감염은 12월 1일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그 밝혀진 날은 한참 뒤인 1월 24일 영국 의료 학술지인 ‘랜싯’에 발표한 논문에서였으니 엄청나게 늦었다. 


무려 50일 이상 대응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초기 대응이 엄청나게 늦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고 이런 늑장 대응 때문에 지금과 같은 대규모 글로벌 비상사태를 야기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 본다. 


그 결과 최초 발생으로부터 30일이 경과한 12월 31일이 되자 27명의 원인미상 폐렴 발병 사실이 세계보건기구(WHO)에 보고되었고 그 중 7명이 위중한 상태였다. 그 대부분이 우한 수산물 시장의 상인들이었다. 여전히 중국 당국은 여전히 제대로 된 대응에 나서지 않았다. 


1월 10일 최초의 사망자가 나왔고 12일에는 무한으로부터 남쪽으로 거의 1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홍콩 북쪽의 선전 시에서도 환자가 발생했다. 당황한 중국 당국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즉 우한 폐렴이 아니라고 밝혔지만 그 또한 안일한 대응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우한 폐렴 사태는 중국 체제의 문제점, 공산당 1당 통치 나아가서 시진핑 1인 체제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점들을 여지없이 드러낸 사건이라고 나 호호당은 단언한다. 



자연순환운명학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왜 이렇게까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일까? 


세상과 자연에는 數(수)가 있는데 이를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실증한 것이 바로 나 호호당의 자연순환운명학이다. 


예컨대 2015년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메르스 사태의 경우 처음 환자가 발생한 이후 감염자가 급증했지만 18일이 지날 무렵부턴 환자 수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잘 마무리되었다. 언론이 떠들어대면서 정부 당국이 비교적 초기부터 총력을 경주하면서 그렇게 잘 끝낼 수가 있었다. 



확산을 막을 수 있는 모든 관문들을 프리 패스시킨 중국 당국



자연의 수는 처음 시작으로부터 18이란 숫자가 확산으로 가느냐 아니면 종식으로 가느냐의 제1차 관문인 까닭이다. 우리의 경우 확산을 막을 수 있는 첫 번째 관문을 잘 지켰던 셈이다. 


하지만 중국은 12월 1일 최초 발생으로부터 11일이나 경과한 12월 12일을 최초 발생으로 추정했고 추정한 날자 역시 한참 뒤였다. 그러니 그 사이에 우한 폐렴은 무방비 상태에서 마구 번져갔던 것이고 그러자 최초 발생으로부터 30일이 경과한 12월 31일이 되자 27명이 감염되는 대량 확산 사태가 시작되었음에도 역시 대응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니 18일에 맞이하는 제1차 관문은 그야말로 프리 패스로 통과되었다. 


12월 1일의 최초 발생으로부터 40일이 지난 1월 10일 최초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42일엔 우한 이외의 먼 지역인 선전에서 감염자가 발생했다. 그러니 이 역시 중국 당국의 안일한 대응 때문에 우한 폐렴이 아닌 것으로 치부되고 말았다. 


42일이란 숫자는 30일과 12일을 더한 숫자로서 30일이 지나면 이제 광범위한 지역으로 번져가는 숫자이고 거기에 또 다시 12일이 지났기에 먼 타지에서도 환자가 발생한 것인데 그 또한 아니라고 했으니 중국 당국의 대응이 지극히 무능하고 안일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 가지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지나치고 말았지만 실은 최초 발생으로부터 18일에 이어 찾아오는 두 번째 관문이 있었으니 그는 36일이다. 그런데 42일만에 타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36일차의 브레이크, 관문 역시도 무사통과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오늘 이런 글을 쓰는 까닭은 어제 30일이 12월 1일의 최초 발생으로부터 만 60일이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12월 1일은 壬申(임신)일이었고 어제 30일 역시 壬申(임신)이란 얘기이다. 


60이란 날자는 이제 우한폐렴이 중국 각지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본격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때마침 어제 대한항공 전세기가 우한 거주 우리 국민들을 싣고 온 것은 그런 면에서 나름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그런데도 체면 때문에 이중 플레이를 하는 중국



그런데 참으로 실망스럽게도 중국 당국은 최초 발생으로부터 무려 50일이 넘은 1월 21일에야 우한 폐렴에 대해 사스와 메르스와 같은 등급의 ‘을류(2급)’ 전염병으로 지정했다. 이를 지켜보던 나 호호당은 솔직히 말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발생 50일이나 지난 뒤에야 비상경보를 울렸으니 그 51일 사이에 바이러스는 이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확산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참고로 얘기하면 홍콩대학의 모 미생물학 교수는 같은 날 홍콩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SCMP)와의 인터뷰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 확산이 이미 전면적 확산 단계에 진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그런데 중국의 대응이 더욱 한심한 점은 발생 50일이나 지나서야 국가비상사태로 지정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한 단계 더더욱 한심한 것은 지정은 을류 전염병으로 하고 대응은 갑류 갑류 전염병으로 한다는 점이다. 체면 때문에 보여주고 있는 이중 플레이라 하겠고, 1인 통치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웃기지 않는가! 1급 비상상황이건만 명목은 2급이라 우기고 있으니. 



세계보건기구의 수상한 협조



그런데 한 가지 더 웃기는 일은 23일 있었던 WHO(세계보건기구)의 중국 당국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협조였다. 


세계보건기구는 23일 우한폐렴이 중국 내에서만 크게 유행하고 있고 다른 나라에서는 사람 간 전염 증거가 없으며 사망자 대부분이 면역력이 약한 노인이고 대다수의 건강한 성인에게는 가벼운 증상만을 유발한다며 이번 사태가 아직 국제 공중보건 비상사태에 해당하지 않는다면서 국제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잘은 모르겠으나 세계보건기구의 이런 이상한 협조는 중국이 이 기구에 대해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의심을 들게 하기에 충분한 일이라 본다. 


그래서 뉴스를 살피다 보니 역시나 하는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1월 29일, 로이터통신 보도에 의하면 2017년 중국이 WHO에 600억 위안(약 10조원)이라는 엄청난 돈을 투자하기로 협약을 했기에 WHO가 시진핑 주석의 눈치를 보는 것 같다는 것이다. 역시 약발이 듣고 있구나 싶다. 


그러면서 중국은 24일 춘절이 시작되자 나름 특단의 조치를 내렸으니 우한시의 폐쇄는 물론이고 우한시를 에워싼 후베이성 전체를 폐쇄했다. 하지만 이번 조치의 실효성에 대해선 의문이 많이 든다, 인구 1100만의 대도시인 우한시를 과연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후베이 성 전체를 봉쇄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고. 



2월 11일의 세 번째 관문마저 뚫리면



이제 마지막 남은 관문은 2월11일 甲申(갑신)일이다. 작년 12월 1일 최초 발생으로부터 72일이 되는 날인 까닭이다. 이 관문에서 막히면서 수그러드는 기미가 없을 것 같으면 그야말로 골 때리는 일이 발생한다. 


그 지점에서 방어가 효과적이지 않을 경우 이번 사태는 72일의 두 배인 144일에 걸쳐 이어지는 글로벌 역병 사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12월 1일로부터 144일 후를 달력에서 찾아보자. 4월 23일 丙申(병신)일이 나온다. 


그때까지 이어질 경우 예상되는 인명 피해-물론 경제적 피해는 당연한 것이고-는 실로 엄청날 것이란 두려움을 금할 수 없다. 

우한시는 양자강 중류에 있기에 상류 쪽의 인구밀집 지역인 쓰촨의 청뚜라든가 하류인 난징 그리고 상하이에 이르는 양자강 라인을 따라 퍼질 것이 명백하니 그야말로 상상이 가질 않는다. 


하지만 그거야 강 건너 바다 건너 일이고 우리가 문제인데 하루에만도 수만의 여행객이 중국을 오가고 있다는 점, 게다가 증상이 없어도 정말로 감염이 가능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대책을 세울 수 있겠는가 말이다. 


평소 미세먼지 때문에 중국을 탓했는데 이제 그건 아무 것도 아닌 상황으로 더 커져가고 있으니 솔직히 두려움이 앞선다.

 

중국의 권위주의 체제, 게다가 1인 체제에서 오는 취약점이 이번 우한 폐렴 사태를 글로벌 국면으로 만들어놓았다. 전혀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웃이 좋아야 편한 법인데 그렇지가 않다. 



이 모두 따지면 중국의 國運(국운) 탓인 것이니



이제 글을 정리할 겸 좀 더 대국적인 그림을 하나 보여드린다. 


우리와 중국은 국운의 흐름이 불과 4년 차이밖에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4년 앞서간다. 우리는 2024년이 국운의 입춘 바닥이고 중국은 2028년이 국운의 입춘 바닥이다. 두 나라 모두 현재 맹렬히 기울어가고 있다. 


그렇기에 2015년 유독 우리나라에서 피해가 심했던 메르스 사태로부터 4년 후인 2019년 말에 중국에선 우한 폐렴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쨌거나 민주주의 체제이고 중국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두 나라의 피해 규모는 큰 차이가 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런 역병만이 문제가 아니란 점이다. 올 해 말 또는 내년 초 중국에선 거품 경제의 붕괴가 발생한다는데 대해 나 호호당은 거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함께 알려드린다. 그로 인한 악영향 역시 우리가 가장 많이 받을 것 같다.



예측의 한계



미국 농구의 전설이었던 코비 브라이언트가 자가용 헬기를 탔다가 추락사했다. 생년월일을 찾아보니 1978년 8월 23일, 생시는 오후 3시로 추정된다. 


사주는 戊午(무오)년 庚申(경신)월 丁巳(정사)일 戊申(무신)시, 따라서 입춘 바닥은 2017 丁酉(정유)년이었다. 사망한 일자는 2020년 1월 26일 아침 9시 45분, 巳時(사시)였다. 운세가 극히 저조한 때라 갑작스런 사고에 대해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하지만 사전에 그의 사망을 예측할 수 있었을까? 하고 묻는다면 ‘전혀 알 수 없다’이다. 운세가 나쁘다는 것 정도야 자연순환운명학의 견지에서 충분히 예측할 수 있지만 사고사와 같은 문제는 사전에 예측할 수가 없다. 60년에 걸쳐 雨水(우수)의 운이니 이런 운엔 무리한 이동이나 변화는 무리라고 능히 예측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사망을 미리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형 사고의 경우



사고 당일 비와 심한 안개로 인해 대부분의 헬기들은 이륙을 하지 못 했는데 코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으나 이륙을 감행했고 결과 산언덕에 충돌하는 바람에 사망했다. 동승했던 딸과 헬기 조종사, 동료 등 9명도 함께 사망했다. 


그렇다면 나머지 9명의 사람들도 운이 나빴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한 10년 전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연구해본 적이 있었다. 연구 결과 자료 부족 등등의 이유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예전의 사례로서 2015년 저먼윙스 여객기가 프랑스 남부 산악에서 충돌하면서 150명이 사망하는 초대형 사고가 발생한 적이 있었는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비행기 기장의 운세가 최악이었다는 점이다. 사고 후의 분석 결과도 그렇지만 기장의 운세로 볼 때 우울증 등으로 인한 자살 비행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런 종류의 사고는 데이터는 많으나 사망자의 신원 특히 생년월일을 알 수 없는 관계로 연구를 포기했다. 다만 당시 연구 결과 내린 잠정적인 결론은 운세가 나쁜 사람 곁에 있으면 문자 그대로 ‘재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 코비와 함께 죽은 사람들의 운세까지 나빴다기보다는 코비 자신의 나쁜 운세가 동승자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생각이다. 


개인의 사주나 운세 흐름, 즉 命(명)과 運(운)만으론 사망을 포함해서 특정한 일을 사전에 투시해낼 수 없다는 얘기이고, 나아가서 운명학이란 것이 미래를 透視(투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얘기를 하기 위해 앞의 예를 들었다. 



미래를 투시할 순 없지만



자연순환운명학에 의하면 60년에 걸쳐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 크게는 나라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좋은 호시절과 어려운 때를 분명하게 구분해낼 수 있다. 대충 거칠게 알아낼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2년 반을 단위로 해서 맞이하게 될 흐름의 특징과 상세한 변화까지도 읽어낼 수 있다. 


그렇기에 어떤 이가 상담을 왔다고 햇을 때 그 사람의 사주를 알고 또 찾아온 시점의 운세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심리적 상태에 있는가 하는 점도 대번에 짐작할 수 있다. 



생각이 팔자라는 말



결국 어떤 사람의 향후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그 사람의 심리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느냐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당사자는 자신의 심리나 심경의 변화가 장차 스스로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에 대해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생각의 변화는 많은 요인과 요소들로 인해 생겨나겠지만 결국 생각의 변화가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렇기에 단적으로 말하면 ‘생각이 팔자이고 운명’이라 말해도 된다. 


그러나 다시 얘기하는 바, 미래를 그림처럼 투시해낼 수 있는 능력은 없다. 



어린 시절의 호기심



어려서 나 호호당이 궁금해 했던 것은 이른바 점을 치거나 사주를 본다는 사람에게 미래 투시 능력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미래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점을 치는 사람이나 사주보는 사람이 미리 알아서 땅이나 주택, 주식 등을 사놓아서 절로 돈을 벌 일이지 왜 상담객들에게 돈을 받고 생활하는 것일까? 하는 천진스런 생각도 했던 것이다. 


그런 호기심이 처음 생긴 것은 아홉 살 무렵이었다. 그 이후 그런 호기심에서 사주명리란 것을 고등학교 1학년 당시 접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문을 독해할 수 있었기에 관련 서적이란 서적은 모조리 구해서 읽었고, 직장을 다니면서도 무당이 미래를 엿볼 수 있다는 말을 사람들이 하는 것에 이끌려 한동안 틈을 내어 무당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호기심 때문이었다. 


뭐가 보이시는데요? 진짜 보입니까요? 하고 노골적으로 물었다가 면박을 당한 적도 있고 도대체 당신이 느끼고 본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고 약간은 부드럽게 접근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神病(신병)이 나는 바람에 무속인이 되었다는 일반적인 말, 항간의 믿음에 대해서도 과연 그런가? 하고 따져 묻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무속인의 세계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들 역시 미래를 투시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결론을 얻었다. 순간순간 스쳐가는 그들만의 靈感(영감)이 무속인의 특별한 능력이란 정도는 충분히 알게 되었다. 



살인범과의 인연



사주를 연구하면서 예를 들면 돈을 엄청 많이 벌었다는 사람을 포함해서 나름 특별한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서 흘러온 과정과 시간들에 대해 사주와 연관 지어 물어본 적도 많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986년의 서진 룸 살롱 집단 살인 사건의 주범이었던 사람과의 인연이다.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그 양반, 이제는 고인이 된 사람을 찾아가서 면회를 신청하고 만났다. 그 양반은 모르는 사람이 왜 찾아왔냐고 물었고 이에 나는 (살인을 한) 당신의 사주가 궁금해서 찾아왔다는 답을 했더니 그야말로 노발대발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 어쩌다 보니 사형이 확정된 뒤에도 직장에서 휴가를 내어 몇 차례 지방 교도소로 이송된 그를 찾아가 면회를 하고 영치금도 넣어주다 보니 정이 들었는데 어느 날 찾아갔더니 형이 집행되었다는 말을 듣고 명복을 빌어준 일도 있다.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사람의 사주는 일반인과 어떤 점이 다를까? 하는 호기심에 끌려 그런 인연도 맺게 되었던 셈이다. 



術士(술사)들을 찾아서



관상이나 수상 이런 것들 역시 과연 신빙성이 있는 걸까 궁금해서 나름 대가로 알려진 사람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1993년 겨울엔 훗날 허영만 만화로 인해 유명해진 관상가인 신기원 씨를 찾아가서 만난 적도 있다. 


내 얼굴을 한 번 슥 보더니 蒼鷹搏兎(창응박토)의 相(상)이란 말을 해주었다. 푸른 매가 겨울 하늘 상공을 날면서 사냥감인 토끼를 찾고 있다는 말이었다. 꽤 수긍이 갔다. 



결국은 自然(자연)에서 답을 얻었으니



그러다가 2007년 경 문득 자연순환의 원리와 이치를 깨닫게 되었고 이를 다듬어서 2014년엔 자연순환운명학이란 것이 만들어졌다고 글로 쓰기도 했다. 실은 1983년부터 착안한 아이디어를 무수히 검증한 끝에 확립한 결과였다. 


결정적인 것은 2000년대 초반부터 등장한 인터넷, 특히 위키피디어와 구글의 도움이었다. 그를 통해 8만명 이상의 사람들에 대해 그 생애와 운명을 연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 명리학, 중국에서 전해져온 이론으로선 결코 알 수 없었던 운의 정확한 흐름을 예측해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명리학을 바탕으로 하고는 있지만 적당히 꿰맞추는 식의 이론이 아니라 운의 흐름에 대해서만큼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정교한 이론체계인 자연순환운명학은 그 근본 원리가 만물은 자연을 흉내 낸다는 것이다. 자연의 행로를 따라서 간다는 것, 이게 근본 이론이다. 



어쩌다보니 인생 전체가



운명학이란 것과 인연이 된 것은 열일곱의 나이였던 1971년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러 2001년 나이 마흔 일곱에 상담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 다시 30년이 흘러 2031년, 인연 맺은 때로부터 60년이 흐른 시점, 내 나이 일흔 일곱이 되면 나 호호당은 운명학에 대해 어떤 경지에 가 있게 될까? 


나 호호당 역시 궁금할 따름이다. 미래를 투시할 순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냥 길을 따라서 가볼 작정이다. 그 끝에서 무엇을 보게 되고 만나게 될 지 그 누군들 알겠는가.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갖지 않을 생각이다. 



길을 가면서 노래한다.



이 대목에서 얘기 하나 들려드린다. 


오래 전의 중국 영화 邊走邊唱(변주변창), 우리말로 하면 ‘길을 가면서 노래한다’가 되겠다. 국내 개봉은 1992년이었다. 


옛날 중국 어느 곳에 눈먼 소년이 있었는데 사부로부터 줄악기를 배웠다. 사부는 눈을 뜰 수 있는 비방을 악기 통속에 넣어주면서 악기의 줄이 천 번 끊어졌을 때 열어야만 효과가 있을 것이란 얘기를 해주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노인이 된 장님 소년은 그 사이에 줄을 무수히 끊어먹었고 그 바람에 연주의 대가가 되었다. 연주가 너무나도 신통해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게 된다. 


하지만 맹인 악사의 소원은 줄이 천 번 끊어져서 그 비방을 펼쳐보는 것이었다. 마침내 어느 날 천 번째 줄이 끊어졌다. 흥분한 악사는 악기 통속에 있던 비방을 꺼내들어 펼쳐보지만 그 비방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냥 종이쪽지였다. 맹인 악사의 평생소원은 물거품이 되었고 이에 실망한 나머지 제자의 품에 안겨 숨진다. 


오랫동안 인상에 남아있는 영화이다. 그러니 나 호호당 역시 인연을 맺은 지 60년이 흘러 2031년이 되었을 때, 사실상 다 살았을 때 그곳 그 시점에서 무언가를 만나게 되리란 기대도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자제할 생각이다. 


그저 분명한 것은 내후년인 2022년쯤엔 그간의 연구를 집대성해서 책으로 엮어볼 생각이다.


18년과 4개월의 세월

 

 

자정 지난 지 30분이 넘었으니 24일이 되었고 이로서 설날이다. 절기의 이름이 가장 춥다는 大寒(대한)인데 기온이 10도라 하니 그 이름이 무색하다. 봄인지 겨울인지 분별이 되지 않는다. 우한 폐렴이 국내로 전파될 까봐 그게 걱정이다. 이미 춘절(중국의 음력설) 연휴가 시작되고 있어 무려 10억의 사람이 이동한다고 하니 무사할는지. 그러니 올 해에도 독자님들 모두 몸과 마음 건강하시길 바란다.

 

나 호호당으로선 이 달 丁丑(정축)월은 2020년의 첫 번째 달이자 2024년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60개월의 순환이 시작되는 때이기도 한 탓에 평소보다 신체적 활동은 적고 생각은 많다. 沈潛(침잠)해있는 것이다.

 

2001년 10월부터 사람의 운과 명이란 것을 연구하고 또 상담해주는 일을 하게 되었으니 그간에 18년하고도 4개월이 흘렀다. 그땐 마흔 일곱이었고 지금은 이제 예순 여섯이 되었다. 그러니 짧지 않은 세월이다.

 

 

나 호호당은 사전에 운명상담을 업으로 하리란 것을 몰랐었으니

 

 

나 호호당은 운명을 연구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사전에 이 일을 하게 될 것으로 미리 내다보았을까? 하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이다. 나는 내가 이 일을 하게 될 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운명을 연구하고 앞날을 내다본다는 사람이 자신의 일도 몰랐단 말인가? 하고 누군가 힐난하거나 지적한다면 그저 ‘네, 하지만 그게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할 뿐이다.

 

그런데 나 호호당은 운명의 이치에 대해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깊숙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란 생각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나 호호당이 연구해낸 자연순환운명학은 기존에 전해져오던 어떤 운명학보다 사람의 명과 운을 예측함에 있어 비교할 바 없이 정교한 이론 체계라 자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의 말과 뒤의 말은 모순이 아니다. 운명학이란 사람의 미래를 透視(투시)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미래나 과거를 투시할 수 있는 대단히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그런 특별한 사람들도 모든 시점들을 마치 비디오 클립을 처음부터 끝까지 돌리듯이 투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미래를 투시할 순 없는 일이어서

 

 

이처럼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그림 보듯이 그려낼 순 없다면 과연 자연순환운명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들인지 그 점에 대해 얘기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른바 사주팔자라 하는 것은 사람의 태어난 생년과 생월, 생일, 생시를 60개의 干支(간지)조합으로 표기한 것을 말한다. 가령 오늘 설에 태어났다면 생년은 己亥(기해)년이 되고 생월은 丁丑(정축)월, 생일은 丁卯(정묘)일, 생시는 이제 새벽 두 시가 가까우니 辛丑(신축)이 된다. 글자 수로 치면 여덟 자이니 八字(팔자)인 것이고 두 글자로 이루어진 각 항은 네 개가 되니 그것을 세로로 쓰면 네 기둥과 같다고 해서 四柱(사주)가 된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사주팔자의 총합은 60*12*60*12가 되어 518,400개의 조합이 나온다. 따라서 사주학이란 사람을 518,400개의 유형으로 나누어 파악하는 기술이다.

 

사주팔자로 이루어진 518,400개의 유형을 그 사람의 命(명)이라 부른다. 왜 명이라 하는 것일까? 하면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받은 명령, 즉 受命(수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넌 이렇게 명을 받았으니 그 받은 명대로 살다 가거라 하는 얘기이다.

 

재미있는 얘기이다. 하늘이 그렇게 명했다는 논리가 말이다. 과연 그럴까? 하고 따지고 들면 그야말로 알 수 없는 얘기이다. 이걸 따지자면 과연 하늘이란 것이 무엇이며 존재하긴 하는 것일까 하는 점부터 해명되어야 하니 그렇다.

 

유교에선 하늘 즉 天(천)을 얘기한다. 하지만 그건 유교가 종교이기에 그런 것이고 기독교로 친다면 하느님이 될 것이니 이런 논의는 이미 형이상학적 차원 또는 神學(신학)의 문제로 넘어간다. 그러니 더 이상 얘기하진 않겠다. 다만 나 호호당은 개개인의 사주에 대해 그 사람이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유전적 성향과 자질이란 생각을 한다.

 

 

命(명)를 확실하게 감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까닭에

 

 

518,400개나 되는 각각의 사주를 보고 읽어서 그 사람의 고유한 성향과 자질을 알아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나 호호당이 직접 대면해서 그 사람의 사주를 읽고 상담해준 사람이라 해야 다 합쳐서 기껏 2만 명 정도이기 때문이다.

 

물론 적은 숫자가 아니지만 그 정도 경험을 가지고 감히 518,400 가지 유형의 사주에 대해 그 사람 고유의 성향과 특징을 통찰해낼 수 있다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간 연구해오는 과정에서 구글이나 위키피디어를 통해 고금동서에 걸쳐 대략 8만 명 이상의 인물에 대해 자료나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연구해본 적은 있지만 그를 감안해도 해도 10만에 불과하다. 전체를 다 겪어보지 않은 마당에 전체를 다 안다고 말할 순 없다.

 

10만에 달하는 케이스에 대해 직간접으로 경험해왔기에 이른바 ‘통밥’이라 하는 것만큼은 고도로 발달해있다. 사람을 처음 대면하면 사주를 보지 않아도 생긴 모습만으로도 순식간에 엄청나게 많은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感(감)은 역시 감인 것이고 객관적이라 말할 순 없다.

 

사주보는 법에 대해 이렇게 제법 장황하게 얘기하는 것은 사람마다의 命(명) 즉 518,400개에 달하는 다양한 사주 유형에 대해 통달하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런 까닭에 명을 보는 것은 상당 부분 그것을 보고 판별하는 사람의 역량과 실제 경험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아트(art) 또는 術(술)의 영역에 속한다 하겠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나 호호당은 평소 글에서 어떤 이의 운과 명을 얘기할 때 주로 운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보통이고 그 사람의 명에 대해선 많은 언급을 하지 않는다. 사주의 명을 감별하는 데 있어 자신이 없다기보다는 여전히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의 변화에 대해선 단정적으로 얘기한다. 왜냐면 운의 변화란 것은 거의 법칙이라 할 정도로 기계론적 또는 물리학적 정확성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론이 아니라 법칙이라 해도 좋다. 이는 앞서 명의 판단이 아트의 영역이라 한 것과 크게 다른 점이다.

 

 

명은 보는 것은 아트이고 운을 살피는 것은 법칙이다.

 

 

이 대목에서 글의 앞부분에서 미래를 투시하는 능력은 없다는 말을 했는데 어째서 운의 변화를 살피는 것은 물리학적 정확성을 가지고 예측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 하고 의아해하시는 독자도 있을 것 같다.

 

그 점에 대해 조금 얘기하면 이렇다. 운을 살피는 것은 사실 미래를 투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점부터 얘기해둔다.

 

예를 들면 어떤 이가 어떤 시점에서 일이나 사업을 시작한다고 가정해보자. 생년월일을 알아서 사주를 알면 그 사람이 미래 어떤 시점에 가서 그 일 혹은 사업이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성공과 실패가 어떤 경로를 밟아서 어떤 요인으로 인해서 성공하고 실패할 것인지 그 모든 상황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그림으로 그려낼 순 없다.

 

사람의 일만이 아니다 크게는 나라의 일도 정확하게 성패를 사전에 정확하게 성패를 가려낼 수 있다. 가령 과거 1941년 12월 7일 일본 항공모함 전단이 하와이 진주만을 현지시간으로 아침 시간에 기습 공격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일본 국운의 코드가 乙酉(을유)를 立春(입춘)으로 한다는 점을 알고 있고 더불어 1941년 12월 7일이 辛巳(신사)년 庚子(경자)월 己丑(기축)일이다. 이 정보 만으로서 나 호호당은 당시 그 시점에 살고 있었다 할 경우 일본 제국의 참패를 능히 자신있게 예측할 수 있다.

 

 

운을 살피고 예측하는 것이 미래를 투시하는 것과는 다르다.

 

 

뿐만 아니라 참패에 이르는 대강의 경로와 흐름까지도 충분히 예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미래를 그림으로 보듯이 투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점에서 운의 예측이란 것은 투시능력과는 차이가 있다.

 

나 호호당이 쓰고 또 올리는 글들은 자연순환운명학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기에 세밀한 영역까지 설명할 수 없어서 대강의 내용만을 소개하고 있긴 하지만 실은 독자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세밀한 변화까지 예측해낼 수 있다는 것만 알려드린다.

 

글이 제법 길어졌기에 다음 글에서 이어간다.

30년 전의 일이 기억나서

 

 

1월이 술술 흘러가고 있다. 벌써 19일이고 다음 주면 설, 그러면 2월로 넘어간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월도 빠르다.

 

사나흘 전의 일이다. 밤 11시 경, 늘 하던 대로 강아지들 데리고 아들과 함께 뒷산에 올랐는데 남쪽 하늘에 왕별 시리우스가 빛나고 있었다. 무심코 별을 바라보다가 문득 스쳐가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정확하게 30년 전 그러니까 1990년 1월의 어느 날 밤 한강 둔치 즉 반포한강공원에서 저 별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 것이다.

 

차이라곤 그땐 반포한강공원이었고 이번엔 그로부터 약 2 킬로미터 떨어진 동작동 뒷산이란 점이 전부. 별은 30년 전 1월의 겨울밤이나 30년 후 1월의 동작동 뒷산 공원에서나 아무런 변함없이 빛을 뿌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서른여섯의 청년이었고 지금은 예순여섯의 반늙은이.

 

 

나 호호당의 몰락이 시작된 1990년 5월

 

 

그러자 1990년 5월이 떠올랐다. 30년 전의 일인데 엊그제 일처럼 선명하다. 1990년 5월 직장에서 제법 나름 공을 세운 바람에 그 포상으로 20일에 걸쳐 지구를 한 바퀴 돌아왔다. 문자 그대로 세계일주( tour round the world)를 했다. 유럽으로 날아가서 돌아다니다가 영국으로 건너갔고 다시 미국으로 갔다가 태평양을 건너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 자체가 흔치 않던 시절에 지구를 빙 둘러 왔으니 얼마나 흥겨웠겠는가. 그런데 훗날 알고 보니 바로 그 포상 여행이 나 호호당에겐 몰락의 시작점이었다. 1990년 1월은 나 호호당의 60년 운명 순환에 있어 冬至(동지)의 때였던 것이다.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샀고 또 질시도 샀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구렁텅이로 내려갔다, 따지고 보면 내 스스로 찾아간 길이었지만 말이다.

 

그로부터 15년이 흘러 2005년 여름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작업실로 들어왔고 그곳에서 운명상담 일을 하면서 동시에 과거 내 삶의 태도와 자세에 대해 깊은 반성을 했다. 바로 그 무렵이 운명 순환에 있어 春分(춘분)이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잘도 흘러가더니 이제 2020년이 되었다. 나 호호당은 이제 夏至(하지)의 운을 맞이하고 있다. 금년 5월 나 호호당은 또 하나의 해외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기간은 아주 짧지만 그게 나로선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이란 것을 문득 알게 되었다.

 

1990년 5월의 거창한 세계일주 여행과 이번 5월에 계획된 여행 간에는 정확하게 30년의 시차가 존재하는 까닭이다.

 

 

약간 시건방을 떨었더니 그 결과가

 

 

1990년 당시 서른여섯 살이었는데 그 이후 많은 풍파를 거치더니 어언 예순여섯이 되었다. 우리가 살다보면 때론 인생이 너무 길게 느껴질 때도 있기 마련인데 당시 나 호호당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긴 인생 지루해서 어떻게 살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천만의 말씀,

 

그 이후 우당탕 정신없이 가는 세월 이제 좀 멈추고 숨을 돌려보니 벌써 예순여섯이다. 紅顔(홍안)의 청년이 어쩌고저쩌고 숨 한 번 돌리는 사이에 白髮(백발)이 반도 더 되는 반늙은이가 되어있다. 그야말로 허 하고 또 참이다. 허-참!

 

시간이란 참으로 묘한 것,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것은 30초만 해도 지루한 데 30년 세월은 무엇에 홀린 듯 쏜살같이 날아갔으니. 하지만 겨울 하늘의 시리우스는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이 겨울 밤하늘을 밝히고 있다.

 

30년 전 1990년의 冬至(동지)의 운을 맞이하여 처음엔 서서히 내리막을 타다가 어느 순간부터 속도를 내며 잘도 미끄러져 내리더니 15년이 흘러 2005년 밑바닥에서 이르러 반성과 성찰 좀 했고 이제 다시 힘겹게 오르막길을 기어올라 2020년 이제 간신히 夏至(하지)의 운을 맞이하고 있다.

 

사실 1990년부터 내리막을 탔다고 했지만 나중 일이야 알 리 없었던 나로선 처음에 아주 즐거웠다. 그러던 것이 갑자기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992년부터였다. 1992년은 내게 있어 小寒(소한)의 운이었다. 소한이라 하면 해마다 양력 1월 5일경에 찾아드는 절기를 말한다.

 

가파른 내리막은 바로 소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소한이란 말이 나왔으니 우리 경제에 대해 얘기를 좀 할까 싶다. 우리 대한민국 역시 작년 10월부터 국운의 60년 순환에 있어 소한을 맞이했기에 그렇다. 그러니 우리나라는 지금부터 본격 내리막을 탄다고 보면 되겠다.

 

 

우리 대한민국의 본격 시련은 이제 시작

 

 

그러다가 2022년 4월이 되면 한 해를 통해 가장 춥다는 大寒(대한)의 때가 된다. 최근 우리 경제가 어렵다는 말이 무성하지만 그래도 아직 나름 희망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2022년 4월이 되어서도 희망을 얘기하는 사람 과연 몇이나 될는지.

 

돌이켜보면 2008년에 터진 미국 금융위기는 우리 경제의 명맥을 연장시켜주었다는 사실이다. 그 덕을 우리가 보았다는 얘기이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다음과 같다.

 

2008년 말 가계부채는 723조였는데 작년 2019년 3/4분기엔 1572조로 그 사이에 두 배 이상 늘어났다. 부채가 저처럼 늘어났으니 원리금 부담이 커져서 소비에 많은 부담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해서 유럽과 일본이 돈을 마구 풀어대는 바람에 글로벌 금리가 거의 제로금리 수준까지 내려갔고 그 바람에 우리 역시 금리를 대폭 낮출 수 있었다.

 

2008년 말 4.25%이던 기준금리가 지금 1.25%로 대폭 인하될 수 있었던 것은 주요 선진국들의 금리가 낮아졌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다시 말해서 2008년 금융위기가 없었다면 우리 역시 금리를 4% 선에서 유지하고 있을 것이란 얘기이다.

 

그랬을 경우 지금과 같이 가계부채가 1500조 선까지 늘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가령 1000조 정도만 되었다 해도 4% 이상의 금리를 부담하긴 너무나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랬을 경우 이미 우리 경제는 가계부채로 인한 부담으로 내수 경기가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쪼그라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2008년의 금융위기야말로 우리 경제의 명맥을 10년 이상 더 연장시켜 주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계부채가 극에 달하자 문재인 정부는 소위 ‘수퍼예산’이란 것을 편성해가면서 재정투입을 통해 경제를 이어가고 있다. 이는 결국 정부 부채의 증가를 뜻한다. 이제 국가부채가 가계부채를 대신해서 눈덩이처럼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바람에 국가부채는 2008년 대비 두 배 이상 늘어났으며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니 이제 통제불능이라 본다.

 

이른바 경제주체라고 하면 기업과 가계 그리고 정부이다.

 

기업부터 얘기하면 이자도 감당하지 못하는 좀비 기업들이 늘어나는 가운데 나름 건전한 기업들은 투자에 있어 극도로 몸을 사리고 있다. 가계는 엄청난 가계부채로 인해 사실상 소비를 늘릴 수가 없고 이제 정부마저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재정건전성까지 무시해가면서 부채를 늘려가고 있는 오늘이다.

 

그러니 멀지 않은 시점에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더불어서 수출에 이상이 생기거나 외국인 자금 이탈이라든가 중국의 거품 붕괴 또는 북한의 급작스러운 변고 등이 있을 경우 우리 경제는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 한 편으로 지금의 글로벌 저금리 추이가 벌써 오랫동안 이어져오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것이 이대로 이어지기 보다는 다른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세상 변화는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든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렇다. 이에 어쩔 수 없이 금리를 올려야 할 경우 즉각적인 우리 경제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금년부터 경제활동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고 대학 정원에 비해 학생 수가 급격히 줄기 시작한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상황은 더 암울해진다.

 

이런 얘기들이 지금은 우려라 하겠으나 2년 뒤인 2022년이 되면 눈앞의 현실이 되어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주마등처럼 스쳐간 30년 세월

 

 

다시 돌아와서 얘기이다.

 

2020년 1월이 어느새 다 지나가고 있다. 시간은 잘도 간다, 술술.

 

그러는 가운데 30년 전 1990년 1월의 어느 날 밤 시리우스를 바라보았던 기억을 시작으로 지난 30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빠른 속도로 눈앞을 스쳐간다. 기억의 필름들이다.

 

그 사이에 청년은 늙은이가 되었다. 기력은 당연히 많이 떨어졌지만 생각하는 힘은 오히려 더 정교하게 다듬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그렇게 억울하진 않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고 그 반대도 그렇다.

 

살아갈 날이 이젠 살아온 날보다 훨씬 적으니 앞으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지 하고 다짐을 해본다. 앞으로도 어려운 고비 많을 것이고 그 사이에 좋은 날도 있을 것이니 어려울 적엔 굴하지 않고 좋을 적엔 解弛(해이)해지지 않고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