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드웨이’가 제법 화제를 모은다고 해서



최근 태평양 전쟁 당시의 해전을 다룬 ‘미드웨이’란 미국 영화가 제법 화제, 광고 영상을 보니 일종의 ‘국뽕’ 스타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오늘은 미드웨이 해전 당시의 두 영웅에 관한 얘기를 해볼까 싶다. 재미를 더하기 위해 먼저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에 대해 약간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미드웨이 해전의 배경



1941년 12월 일본 항공모함들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 함대 기지를 기습공격해서 엄청난 타격을 입히면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 이후 일본군은 신속하게 홍콩과 말레이반도, 싱가포르 필리핀 등을 침략 점령해나갔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일본 육해군이었다. 


미국은 진주만 기지 습격으로 주력함대가 거의 와해되다시피 했기에 일단은 수세에 몰려 방어전을 펼치기에 바빴다. 그러던 중 일본 해군이 최정예 항모군단을 동원해서 미 해군의 잔존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나섰다가 오히려 미 해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받고 패배한 해전이 바로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이었다. 흔히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이라 일컫는다.

 

미드웨이(Midway)는 하와이 제도의 서북쪽으로 대략 2200 킬로미터 떨어진 망망대해에 위치한 아주 작은 섬이다. 명칭 그대로 ‘길의 중간’이란 뜻인데 북미 대륙과 아시아 대륙의 중간에 위치한 산호초로 이루어진 섬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였으나 태평양 전쟁 직전엔 미국의 군사기지가 되어 있었다. 


일본 해군은 이 섬을 기습 점령할 경우 미 해군이 총력을 기울여 반격해올 것으로 보았고 이 경우 미리 매복해놓은 정예 항공모함 군단들로 하여금 모조리 소탕해버리자는 야심찬 전략을 세웠다. 당시 일본은 미국이 가용할 수 있는 항공모함이 2척에 불과하다고 여겼기에 일본 측에서 4척을 투입하면 능히 승리할 수 있으리란 심산이었다. (하지만 미군은 3척을 투입했다.)



하지만 일본의 비밀 작전은 사전에 간파당하고 말았으니



그런데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던 일본의 미드웨이 공격 작전은 미 해군 정보요원들에 의해 사전에 간파당하고 말았다. 당초 미드웨이를 미끼로 함정을 파놓고 미 해군을 유인해서 일망타진하려던 일본 해군이었는데 사전에 간파당하는 바람에 거꾸로 미 해군이 설치한 함정에 일본 해군이 빠져들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참패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

 

그러니 일본 해군의 미드웨이 공략 작전을 사전에 알아낸 미 해군 정보팀은 미드웨이 해전 승리의 1등 공신이라 하겠다. 



또 한 명의 영웅이 필요했으니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절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미드웨이 인근에 미 해군 항모전단이 숨어있으리라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던 일본 해군 항공모함 전단은 불시에 미 해군 항공모함으로부터 출격한 미 해군 전투기의 기습을 받게 되자 엄청나게 당황했다. 


하지만 일본 항공모함들의 공격에 나선 당시 미 해군 조종사들의 실력과 기량, 아울러 장비까지도 일본의 그것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수준이었기에 여러 차례 이어진 미군 함재기의 공격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일본 항공모함들에게 피해를 입히기는 고사하고 출격한 일본 전투기들에 의해 사실상 전멸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자칫 미군의 전략적 우위가 일본 해군 전투기들의 전술적 우위로 인해 무위로 돌아갈 판국이었다. 게다가 당시엔 전투기나 폭격기엔 적을 찾는 레이더가 없던 시절이라 출동하기 전 미리 일본 해군의 추정 위치를 전해 듣고 그 방향으로 날아가면서 고공에서 육안으로 찾아내는 수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렇기에 출격을 나가도 적 함댈ㄹ 찾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니 공격부대 간의 협동작전 같은 것은 시도하지도 못했다. 


특히 미군 뇌격기, 수면 근처로 낮게 비행하면서 어뢰를 공중에서 투하하는 공격기들은 속도가 느리고 어뢰 또한 목표에 맞아도 터지지 않는 불발탄이 무려 90%나 되는 바람에 거의 소용이 없었고 요격에 나선 일본 함재기들에 의해 거의 전멸당하고 말았다. 뇌격기의 공격은 거의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뇌격기 조종사들은 용감하게 돌진해갔고 또 죽어갔다.

 

영화 미드웨이를 두고 앞에서 국뽕 스타일이라 했는데 그만큼 당시 미 해군 조종사들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은 실로 대단했던 것이고 그렇기에 지속적으로 영화로 만들어질 법도 한 것이다. 


이처럼 거의 미국은 백 수십 대를 출격시켜 일본 항공모함들을 공격했으나 거의 전멸 당했고 반면에 상대방에겐 사실상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선제공격의 효과가 전혀 없을 뿐더러 미군만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한 명의 미 해군 조종사가 엄청난 반전을 이끌어내었다. 


급강하 폭격기를 이끌고 일본 항공모함을 찾아 망망대해를 떠돌던 지휘관은 연료부족이 우려되는 상황에서도 과감한 결단으로 끈질기게 적을 찾아 나선 결과 일본 항공모함 전단을 발견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때마침 일본 전투기들은 주로 저공으로 접근해오는 미군 뇌격기들을 소탕하느라 낮은 고도에 머물고 있었던 터라 수천 미터의 고공에서 내리 꽂는 미군의 급강하 폭격기들에 대해 대응할 수 없었고, 그 결과 불과 5분 만에 4척의 일본 항공모함 중에서 3척이 치명타를 입고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 기적적인 일이 벌어졌다. 그 바람에 나머지 한 척의 항공모함 역시 격침되고 말았다. 



그런데 두 명의 영웅은 같은 운명의 궤도를 그리고 있었으니



자 이제 그렇다면 두 명의 1등 공신에 대해 알아볼 차례가 되었다. 


일본 해군의 작전을 사전에 간파해낸 이는 조셉 로쉬포트 대령이었고 끈질기게 적을 찾아 고공 폭격을 성공시킨 지휘관은 클라랜스 맥클러스키 중령이었다. 


아주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의 운세 흐름이 정확하게 동일했다는 점이다. 


정보장교 로쉬포트는 1900년 5월 12일 생이었기에 사주는 庚子년 辛巳월 乙酉일이 된다. 운세 흐름 상 입추의 운은 1935 乙亥(을해)년이 된다. 


그리고 적을 찾는데 성공해서 공격을 성공시킨 맥클러스키는 1902년 6월 1일 생으로서 사주는 壬寅년 乙巳월 乙卯일이고 입추의 운은 역시 1935 乙亥(을해)년이었다. 


두 사람 모두 초여름 생이고 태어난 날이 같은 乙木(을목)이란 점 그리고 운세 흐름이 모두 1935년이 입추였고 따라서 이른바 두각을 나타내는 추분의 운은 1942 壬午(임오)년이 된다. 그렇기에 두 사람 모두 1942년 6월에 펼쳐진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 해군을 승리로 이끄는데 있어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던 것이다.

 

수세에 몰려 고전하던 미 해군이 갖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 두 사람의 결정적인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사람은 서로 몰랐지만 같은 운명 공동체였으니



그런데 그 두 사람은 1942년이 빛을 보는 때에 해당되었고 이에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은 사실상 그들의 기량을 한껏 보여주고 빛낼 수 있었던 최고의 무대였던 것이다. 


같은 운세였던 탓일까 나중에 보면 두 사람은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다는 점도 있다. 정보장교 로쉬포트는 1976년 7월20일에 사망했고 공격부대 지휘관이었던 맥클러스키는 1976년 6월 27일에 사망했다. 사망시점이 한 달도 차이가 나지 않는다. 


태어나기는 2년의 차이가 있었으나 같은 운세였기에 미드웨이 해전의 1등 공신이 되었으며 세상을 뜬 것 역시 1976년 여름이었다. 


한 명은 하와이 기지에서 일했던 정보장교였고 또 한 명은 항공모함의 폭격기 지휘관이었기에 두 사람이 만날 기회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공동의 운명체였던 것이다. 



일본이 입증해준 항공모함의 가치



태평양 전쟁을 시작할 당시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해군 전략가들은 큰 대포를 가진 전함을 주력으로 여겼을 뿐 비행기를 실어 나르는 항공모함의 파괴력에 대해선 그다지 주의를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해군이 6척의 정예 항공모함 전단을 통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항공모함이 얼마나 대단한 무기인가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바다에서 펼쳐지는 해전은 얼마 가지 않아 수백 킬로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양쪽 해군의 항공모함 전투로 변하고 말았다. 


그런데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최정예 항공모함 4척은 물론이고 고도로 숙련된 정예 전투기 조종사들을 모조리 잃고 말았기에 그 이후 일본 해군은 더 이상 미 해군과 전면전을 펼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미국은 그 이후 항공모함을 빠른 속도로 찍어내기 시작해서 태평양 전쟁이 끝날 무렵엔 근 백 척에 달하는 항공모함이 바다를 누비고 다녔다. 반면 생산력이 약한 일본은 더 이상 항공모함을 제조하지도 못했고 기존의 항공모함은 남김없이 침몰당하고 말았다. 



같이 뜨고 같이 저문 두 명의 스타



그런 면에서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 전쟁의 진정한 전환점이었고 그 전환점엔 태어난 날이 乙木(을목)이고 운세 순환 상 빛을 내는 시점이 1942년이었던 두 사람의 영웅이 있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같은 해 여름에 함께 세상을 떠났다. 묘한 일이다. 운명의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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