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점심 때면 가족 외식을 나간다. 잠실 쪽의 남경막국수에서 맛있게 점심을 먹고 우면동으로 돌아오는 양재천길, 타워팰리스 지날 무렵 갑자기 소나기, 이거야말로 스콜이 순식간에 내리기 시작했다. 

 

 

순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한 빗줄기, 와이퍼를 최대 속도로 올렸다. 솨-하는 빗소리. 

 

 

비는  5분도 채 내리지 않고 그치기 시작했다. 아들 말하길 야, 이거 동남아네, 동남아, 소나기가 아니라 스콜이고. 올 여름 날씨는 정말 어디까지 갈 것인지 무서버!  온난화가 정말로 세상을 끝장 내는 게 아닐까 나 호호당도 무섭다. 창밖을 보니 또 비가 온다. 고온다습한 대한민국이다. 

길고 긴 장마가 이어지고 있다. 며칠 전 내게서 증시 선물 트레이딩을 배운 제자가 전화로 바람 쏘이자고 해서 간 곳은 동작대교. 사진의 뷰는 압구정동 쪽이다. 그래 잘 하고 있나? 네 그런대로. 연락해, 새로운 기법 업데이트도 해야지. 넵. 저야 좋죠. 이런 대화가 오갔다. 구름 속이지만 해가 진 직후라 사물이 제법 선명했다. 이런 포토 타임을 두고 골든 하워라고 한다. 장마에 건강 조심하고. 넵, 선생님도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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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이 가면 그 시대도 함께 간다

 

 

대학로의 상징이던 김민기가 세상을 떠났다. 그 며칠 전에는 트로트의 현철이 갔고 부채도사 장두석도 떠났다. 그런가 하면 1960년대 당시 국내에 홍콩 무협영화 붐을 일으킨 여배우 정페이페이도 며칠 전 떠났다.

 

오전 필라테스 시간, 1대1 지도해주는 젊은 여성 원장님에게 “김민기가 갔어요,” 라고 했더니 누군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서 “잘 모르시는구나, 김민기” 했더니 약간 계면쩍은 웃음과 함께 “처음 들었어요” 하는 것이었다. 숙녀의 나이를 물어보긴 그렇고 해서 그냥 넘어갔다.

 

그렇다, 김민기나 현철, 장두석, 정페이페이, 최근 우리 젊은 세대들에겐 모두 낯선 이름일 수 있겠다. 저들 모두 올드 세대, 베이비붐 세대와 86세대의 아이콘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인구의 과반을 차지하는 올드 세대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저들 또한 그저 역사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올드 아이콘의 消失(소실).

 

 

아이콘들의 운명 순환

 

 

저들 중에서 김민기와 현철의 운명순환을 槪括(개괄)해본다.

 

먼저 김민기. 양력 1951년 3월 31일이다. 辛卯(신묘)년 辛卯(신묘)월 庚午(경오)일이다. 그간의 프로필을 보면 2010 庚寅(경인)년이 입춘 바닥이었다.

 

위암으로 사망했는데 추정컨대 위암이 생긴 것은 6년 전인 2018 戊戌(무술)년이 아니었나 싶다. 지난 6월 庚午(경오)월경에는 사실상 가망이 없어졌고 그 후 한 달 여를 버티다가 7월 21일 丙戌(병술)일, 일진 상으로 60일 사이클의 바닥일인 목요일 庚寅(경인)일 되기 나흘 전에 세상을 떠났다.

 

1980 庚申(경신)년이 기의 절정인 立秋(입추)였다. 이에 그의 전성기는 1991년 학전 소극장을 열었을 때부터 대략 10년,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가지고 해외 순회공연을 했던 2001년까지의 세월이었다.

 

그리고 김민기의 운세가 바닥에 도달한 2010년 이후 공연시장의 중심이 대극장 뮤지컬로 바뀌면서 대학로 소극장은 위축되었고 적자 상태로 변해갔다.

 

그가 우리 문화 예술은 물론이고 사회 전체적으로 끼친 엄청난 영향력에 대해선 굳이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나 호호당은 1971년 고등학교 1학년 시절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담긴 LP 판을 우연히 샀고 그 이후 줄곧 팬이었다.)

 

다음으로 현철. 1942년 음력 6월 17일, 壬午(임오)년 丁未(정미)월 癸未(계미)일이다.

 

운세순환을 보면 1973 癸丑(계축)년이 立秋(입추)였고 2003 癸未(계미)년이 입춘 바닥이었다.

 

연예인이나 가수의 경우 워낙 경쟁이 치열한 탓에 이른바 빛을 보는 시기가 훨씬 늦다. 탁월한 천재라거나 시대의 흐름이 받쳐주지 않는 한 입추를 지나고 다시 7-10년 정도는 되어야 빛을 보고 각광을 받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

 

현철의 경우도 마찬가지, 1966년에 데뷔하였으나 그냥 반응이 없었고 입추인 1973년으로부터 무려 10년 뒤인 1983년, 그러니까 한로의 운에 “사랑은 나비인가봐”를 히트시키면서 전성기를 열었다. 데뷔로부터 17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으니 그간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나.

 

(참고로 얘기하면 최근 인기 절정을 달리는 가수 임영웅도 입추는 2007년인데 2017년, 무려 10년이 지난 한로의 운에 미스터 트롯을 통해 인정을 받고 대성공을 했다. 이처럼 연예인의 경우 빛을 보는 시기가 늦을 때가 많다.)

 

현철의 경우 마지막 피날레는 입추로부터 15년 뒤, 1998년 立冬(입동)의 운에 가서 “사랑의 이름표”란 곡을 부르면서였다. 그 해 여론 설문조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가수’ 부분 선호도 1위를 기록하면서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그 이후 여전히 인기 많은 가수였으나 2003년 입춘 바닥을 지나 2007년 공연 중에 크게 부상을 당했고 그 이후로 뇌경색과 경추 디스크로 건강 면에서 고생의 연속이었다. 올 해 세상을 떠났으니 그간 무려 17년간 힘든 나날을 보낸 것이다. 무명가수의 고초가 17년, 크게 부상당한 후 몸 고생 17년의 현철이다.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사람들의 애환을 그 특유의 목소리로 위로해주면서 절정의 세월을 보낸 현철이었건만 알고 보면 저리도 딱하다.

 

장두석씨는 2006 丙戌(병술)년이 입춘 바닥이었다. 그가 부채도사란 개그 코너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준 것은 1991년 무렵이었으니 운세가 마지막 빛을 발하던 立冬(입동)의 시점이었다. 그 이후 인기가 식어들고 또 당뇨가 심해지면서 명상과 같은 정신수양 쪽에 몰두하기도 했지만 끝내 당뇨합병증을 넘어서지 못했다. 66년을 세상에 머물다 갔으니 조금은 짧은 삶이었다.

 

홍콩의 액션 여배우 정페이페이,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굳이 소개하자면 1968년 수입되어 개봉된 “심야의 결투”에서 ‘금제비’란 이름의 여자협객으로 등장했다. 사실 영화의 원제목이 金燕子(금연자) 즉 금제비였다. 옛 얘기지만 나 호호당과 같은 베이비붐 세대에겐 굉장한 인기스타였는데 그런 그녀가 수년 전부터 파킨슨병으로 해서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 모두 연결되어 있는 하나이기에 

 

 

이쯤에서 오늘의 얘기를 정리해보자.

 

우리는 각자 개체이고 개인인 것이 분명하지만 달리 보면 우리 모두 서로가 서로를 연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나 개인은 ‘나’이기도 하지만 ‘우리’이기도 하다는 얘기이다.

 

그렇기에 저렇게 떠나가고 있는 올드 세대의 아이콘들은 올드 세대가 죽어가고 소실되는 하나의 상징이라 하겠다.

 

우리 각자는 그저 각자이고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주변의 누군가에 있어서는 엄청나게 소중하고 사랑스런 존재가 된다. 사실 별 것도 아닌 우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하고 사랑스럽고 그리운 존재가 된다는 거, 이 대목이야말로 삶과 존재의 엄청난 신비라는 생각을 늘 한다.

 

 

잘 가시오, 당신들을 전송합니다.

 

 

김민기, 현철, 장두석, 정페이페이, 잘 가시오, 그리울 거요.

 

오늘 글은 죽음을 다루고 있는 터라, 특히 나 호호당의 마음이 무거운 터라 쓰면서도 망설였다. 올리지 말까? 하는 고민. 하지만 저들을 기꺼이 전송해야지 하는 생각에 힘을 내어 올려본다. 그런데 묘하게도 오늘 7월 25일은 나 호호당의 생일이다.

 

그런대로 몸이 좋아져서 8월에는 사무실을 열고 상담도 재개할 예정이다. 강좌도 시작할 것이고. 곧 공지 올릴 것이다.

 

좋은 시절은 없고 좋았던 시절만 있는 것 같다.

 

 

웰빙이란 말이 유행하던 시절

 

 

2000년대 중반 무렵 ‘웰빙’이란 말이 유행하던 시절, 그냥 막 사는 게 아니라 좀 더 질, 즉 퀄리티 있는 삶으로 가보자던 그 시절이 돌이켜보면 우리 경제의 황금기였다.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마침내 극복해냈고 그 이후 가계 대출을 통한 통화량 증가는 아파트와 증시를 상승시켜 자산효과(Wealth effect)를 창출했다. 부자가 된 느낌에 젖어 소비가 늘었고 그에 따라 다시 투자가 늘어나면서 나름 선순환을 보였다.

 

어지간하면 무거운 명품 가죽 가방 하나 정도는 가지게 되었고 해외여행도 고급화되었으며 박세리 붐 이후 골프는 대중화되어갔다. 자녀들에 대한 스펙쌓기, 어학연수 등의 교육 투자도 엄청나게 늘어났다. 낡은 주택단지는 재개발, 기존의 복도식 아파트는 재건축을 통해 타워형 럭셔리 아파트로 변해갔다.

 

당시 크게 흥행을 한 영화제목으로서 2005년의 “달콤한 인생”, 2007년의 “우아한 세계”가 있었는데 영화 내용을 떠나서 당시 보통의 중산층은 그런 삶을 꿈 꿀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양극화의 그늘이 짙어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환율이 우리 경제 사정을 말해준다

 

 

우리 경제가 어떤가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단 하나의 지표를 꼽는다면 그건 원달러 환율이다.

 

환율이 1200원 아래면 경제가 그래도 괜찮은 것이고 그 이상이면 어려워지는 것이며 1350원 이상이 되면 그야말로 죽을 맛이 된다. (현재 1390원 대이니 진짜 어렵다.)

 

환율이 내려가면 생필품의 가격이 내려가고 그로 인해 일반 가계의 가처분 소득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고환율은 일부 부유층을 제외한 전 국민을 가난하게 만든다.

 

이에 그간 환율의 변동 추이를 돌이켜보면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2-2007년 사이 저환율이었으며 2008년 미국 금융위기로 순간적으로 환율이 급등했다가 2009년 하반기부터 급락해서 그런대로 대략 12년 간 1200원 밑에서 이어오다가 2022년 미국이 급격하게 금리를 올리면서부터 다시 환율이 치솟은 상태이다.

 

 

2009년 이후 풍요의 시대는 사라졌다

 

 

하지만 웰빙 즉 풍요의 분위기는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분위기가 나빠진 것이 컸다.

미국 금융위기는 당시 우리나라의 중국 수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빠른 시일 안에 극복되었다. 하지만 기업들 특히 대기업들은 그 무렵부터 긴장의 끈을 풀지 않고 외형성장보다는 수익성을 더 중시하기 시작했다. 이에 상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공채 중단 등 많은 면에서 고용시장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자 당장 급해진 것은 사회에 진출하려는 젊은이들이었다.

 

이에 청년실업이 늘어나더니 2011년 3포세대란 말이 등장했고 2014년부터 청년취업시장이 크게 위축되면서 2015년부터 N포세대란 말이 일반화되었다.

 

젊은 층은 현실을 자각하고 직업적 안정성을 중시하게 되면서 한때 공무원 붐이 일었다. (이에 노량진 학원들이 떼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 또한 잠시였다. 공무원 사회의 경직성과 민원처리, 저임금 등으로 공무원 붐은 급격히 식어버렸다. 9급 공채시험 경쟁률이 인기가 뜨겁던 2011년에 비해 1/4로 줄었다.

 

그러자 온라인 쇼핑몰 창업 붐이 일었고 또 유튜버 붐이 일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게 절대 쉽지 않다. 그 또한 “레드 오션”이다.

 

 

대졸 백수가 최고치라고 하니 

 

 

오늘 아침 뉴스에 보니 대졸 학력 이상의 비경제활동인구가 405만명을 넘어 1999년 통계집계 이후 상반기 기준 역대 최고란 내용이 있다.

 

역대 최고라 하니 걱정이지만 내용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구직에 나서는 35세 미만의 청년들 숫자 자체가 줄고 있어서 예전 같으면 취업 에 나름 여유가 있어야 하건만 일자리 공급 자체가 더 빠른 속도로 줄고 있다는 점이다. 문재인 정부 당시 청년창업을 강조하면서 한때 바람을 잡았던 것이 결국 별 성과를 보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기성층 또한 초조 불안

 

 

그런가 하면 40-50대의 기성층은 어떨까? 하면 그 또한 당연한 얘기지만 그리 좋지가 않다. 몇 년 전부터 이른바 미국 증시에 투자하는 서학개미들 중에는 물론 20-30대도 있지만 언제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할 지 모르는 불안감과 초조감을 가진 기성층의 비중도 상당하다.

 

2019년 영화 “기생충”이 대박을 쳤고 2021년에는 “오징어게임”이 또 그랬다.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액면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말이다. 현 시국과 상황이 어렵다, 죽겠다 하지만 이 또한 나중에 더 어려워지면 지금의 세월 또한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어, 하고 그리워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런 약간 불길한 예감이 든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런데 나 호호당이 그런 거 다 떠나서 가장 두려워하는 바는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결혼하지 않거나 짝이 없이 혼자 사는 젊은 세대들이 나중에 겪게 될 엄청난 외로움의 문제이다.

 

건강할 땐 괜찮다, 돈벌이가 되면 또한 괜찮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능력 떨어지고 병들었을 때 누가 그들을 붙들어줄 수 있을까? 누군가 곁에 있어서 병시중을 들어주는 것과 혼자 아무 소리도 못하고 끙끙 아픈 것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런데 그런 힘든 경우가 앞으로 10년 후면 만연할 것 같으니 정말 걱정이 태산이다.

 

 

대한민국을 병문안해야 할 것 같아서 

 

 

이제 대한민국이 그다지 건강하지가 않다. 글을 통해서라도 아픔을 쓰다듬고 위로해주는 얘기를 많이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물론 운명에 관한 얘기도 여전히 이어가겠지만 말이다.

 

학전의 김민기가 어젯밤 죽었다. 한 시대가 훅-하고 지나간다. 그와 함께 한 세월은 분명 좋았던 시절이었다. 哀悼(애도)의 마음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