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편을 보고 나서 

 

 

“히든 피겨스”란 영화를 텔레비전으로 보았다. 1960년대 초반만 해도 미국에서 흑인들은 엄청난 차별을 받고 있었는데 당시를 배경으로 미 항공우주국 즉 나사(NASA)에서 근무하면서 큰 업적을 남긴 세 명의 천재 흑인여성들의 활약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재미있게 보았다.

 

세 명의 흑인 영웅들 중에서 특히 캐서린 존슨의 활약이 가장 흥미로웠고, 이에 실존인물인지라 당연히 생년월일을 검색해보았다.

 

 

차별 받던 흑인 그리고 여성이 미국을 살려 주었으니 

 

 

캐서린 존슨(Katherine Johnson), 1918년 8월 26일에 태어났으니 戊午(무오)년 庚申(경신)월 乙巳(을사)일이다. 입추의 운이 언제였는지를 알려면 출생의 시각까지 알아야 하지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녀의 경력으로 추산해보면 1955년 乙未(을미)년이 입추였다.

 

어떤 이유에서 그 해를 입추의 운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입추의 운으로 상정되는 때로부터 7.5년이 경과할 무렵이면 인생 전체에 걸쳐 크건 작건 나름 두각을 나타내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가 나사에서 결정적인 활약을 했던 시기가 바로 1962년이었고 그런 까닭으로 1955 을미년을 입추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냉전 시절 미소 양국은 우주 공간을 무대로 엄청난 레이스를 펼쳤는데 그 경쟁에서 먼저 기선을 잡은 것은 소련이었다. 1961년 4월 소련이 먼저 유인 우주비행을 성공시켰고 미국은 따라잡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이듬해인 1962년 미국 역시 유인우주선 비행에 성공했다.

 

(당시의 우주선 경쟁은 결국 로켓의 우수성이 대륙간 탄도미사일 경쟁을 좌우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하면서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캐서린 존슨은 당시 나사의 수학자로서 첫 번째 유인 우주선 프로젝트가 성공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그로서 미국의 숨겨진 영웅이 되었다. 그녀는 그 이후 달 탐사 우주비행인 아폴로 프로젝트는 물론이고 스페이스 셔틀이나 화성 탐사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나사의 최고 수학자로서 활동했다.

 

그녀는 35년간 나사(NASA)에서 일하다가 70의 나이인 1988년에 은퇴했으며 그 이후 어린 아동들을 대상으로 기술 과학 분야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있어 많은 활동을 했다. 독실한 장로교 신자였던 그녀는 2020년 무려 101세의 나이로 편안하게 세상을 떴다.

 

천재 수학자로서 국가 유공자였으며 나라나 단체에서 수여하는 상이나 훈장도 대단히 많은 받았을 뿐 아니라 그녀의 이름을 따서 붙인 국가 연구시설도 건립되었다. 더불어 건강하게 장수했으니 실로 대단히 훌륭한 인생을 누렸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런 그녀 역시 살면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18년생인 그녀는 1939년 21세에 결혼을 하고 자녀를 셋이나 낳았는데 그만 남편이 1956년에 병으로 사망하는 아픔도 겪었다.

 

 

운이 한창 좋을 때에도 좌절도 있고 비극도 발생하나니

 

 

더 중요한 점은 그녀의 운세 상으로 1955년이 입춘의 운이란 사실이다. 입추 다음 해에 남편이 애들 셋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니 엄청난 비극이었는데 그런 일이 그녀 운세가 한창일 때 발생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사람의 일생은 운이 좋을 때에도 예기치 않은 좌절이나 비극이 발생하기도 한다. 운이 좋다고 해서 무조건 만사가 원만하고 잘 되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나 호호당은 운명학에 대해 어린 시절, 정확히 말하면 17세 때부터 호기심으로 인해 흥미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후 책이란 책은 모조리 읽고 공부를 해왔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포기할 생각도 무사히 했으나 다행히도 2000년대 중반, 나로선 마흔 중반의 나이에 인간과 사물에는 60년에 걸친 순환이란 것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다시 집중적인 연구와 분석을 통해 2014년에 이르러 큰 틀에서 체계를 완성할 수 있었으며 그 이후로도 꾸준히 실제 상담과 사례 연구를 통해 더더욱 깊은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실제 상담이나 사례 연구가 깊어지고 넓어지면서 운명의 흐름이란 것에 대해 더 눈이 넓어졌다는 것, 아울러 운이 좋다고 모든 것이 다 좋게만 흘러가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일러 드리기 위함이다.

 

운이 한창 좋을 적에도 어처구니없는 실패나 좌절도 능히 있을 수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을 다 누리고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는 법

 

 

그런 까닭에 나 호호당은 글을 통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든 것을 다 누리고 가지는 자는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능히 다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는 점이다.

 

큰 부자는 아니어도 서울 강남에 아파트 한 채는 있어야 하겠고, 용모는 적어도 중상급 이상의 배우자를 만나야 하겠고, 수명은 적어도 87세 이상은 되어야 하겠고, 자녀는 서울 인 대학에 들어갔으면 좋겠고 등등 이런 식의 바람을 그저 소박한 꿈 혹은 목표라고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이다.

 

이 정도의 목표 혹은 소망이라고 해도 그 모두를 달성하는 사람은 사실상 없는데 말이다, 엄친아란 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욕망이란 이름의 묘한 놈

 

 

소망이나 희망, 그리고 욕망이나 욕심이나 다 같은 말이다. 소망이라거나 희망이란 하면 좋은 것이고 욕망이나 욕심이라 하면 부정적인 것은 절대 아니다. 그냥 같은 말일 뿐이다. 그러니 욕망이라 해두자.

 

그런데 이 욕망이란 것, 이게 실로 묘한 놈이다.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동력이기도 하고 동시에 우리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는 원인이기도 한 까닭이다.

 

우리는 욕망이 있고 바람이 있기에 시간과 세월의 무게를 견딜 수 있다. 오늘 힘들어도 훗날 좋아질 거야 하는 생각 말이다. 동시에 바람이 있고 욕망이 있는 까닭에 현재의 나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 못 하고 또 눈앞의 시간이란 그저 빨리 흘려보내야 하는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게도 된다. 우리의 삶이란 결국 그런 시간들의 연속일 뿐인데 말이다.

 

나 호호당은 지난 달 7월 25일자로 만 65세를 채웠다. 기초연금도 신청했고, 그다지 쓸 일은 없지만 지하철 교통카드도 나왔다. 다른 게 아니라 세상을 제법 오랜 세월 살아왔다는 얘기이다.

 

제법 긴 세월 동안 살아오면서 알게 된 것 중에 하나로서 사람이란 결국 자신의 눈 앞 1 미터 전방에 욕망이란 이름의 열매를 매달고 있기에 그 놈을 먹어보려고 앞으로 내달리지만 결국 달리는 만큼 욕망이란 열매 역시 앞으로 달려 나간다는 점이다.

 

 

양면성을 가진 욕망

 

 

하지만 미래에 대한 욕망이 없다면 현실의 시간이 부여하는 저 엄청난 무게를 우리 모두 견뎌낼 수가 없다. 그렇기에 욕망이란 열매는 내가 달리는 만큼 저절로 앞으로 달려간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내심으론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목표로 앞으로 나아가고 달려가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나이가 들다보니 남성 호르몬이란 놈, 테스토스테론이란 물질의 분비가 줄어들면서 현실의 시간이 주는 중압감도 줄어들고 동시에 욕망에 대한 집착 또한 조금씩 줄어간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욕망이란 놈의 정체, 그건 우리 얼굴 전방 1 미터 앞에 매달린 유혹의 열매란 사실을 알게 된 것 역시 남성 호르몬이 줄어들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뻔히 결말이 내다보이건만 우리 스스로 속아주면서 만들어가는 게임이란 생각도 하게 된다.

 

 

욕망에 대한 사람의 마음 혹은 자세가 운세를 반영한다. 

 

 

아울러 운이 상승한다는 것 반대로 운이 내려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젠 알게 되었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도 있게 되었다. (물론 이 점은 나 호호당이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그간의 연구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욕망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그 욕망의 충족을 위해 비용을 감내할 마음이 있는 자라면 운이 상승하는 자라 보면 된다. 그리고 욕망이 있지만 그것을 위해 비용을 감수할 마음이 별로 없다면 그건 운이 하강하는 자라 봐도 된다.

 

즉 편익과 비용의 문제인 것이다. 비용에 비해 바라는 편익이 너무 크다면 운이 하강하는 경우이고 편익만큼의 비용을 지불해도 된다고 여긴다면 운이 상승하는 경우라 하겠다.

 

예컨대 ‘요행수’라 말이 있는데 이게 바로 비용 대비 이익이 지나치게 큰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요행수를 바라는 자, 요즘 유행하는 말로 ‘개이득’을 바라는 자라면 그 자의 운세는 하락 중에 있다고 봐도 결코 틀림이 없다. (혹시나 개이득을 봤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개피도 보기 마련이다.)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한 마음이 간절한 자는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사람이기에 운세가 상승하는 사람이고, 그 반대는 비용을 비싸게 지불할 마음까진 없다는 것이니 운세가 하강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미끼란 사실을 이젠 알기에 

 

 

나 호호당, 이제 65세가 넘어서 국가에서 기초연금이란 것까지 챙겨주는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런저런 욕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욕망이란 것이 결국 죽는 날까지 아등바등 살게 만드는 미끼란 사실을 이젠 알았기에 아니면 아닌 대로 언제든지 다 털어버리고 놓아버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점이다.

 

(며칠 전 강남역 근처 길거리에서 젊은이들이 대화중에 “이건 정말 개이득이야!” 하면서 키득대는 모습을 슬쩍 곁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런 말을 쓰는 젊은이들도 내 눈에 그저 귀여웠고 ‘개이득’이란 말도 정말 재미가 있었기에 오늘 글에서 쓰게 되었다.)

 

알림: 폭우로 인해 그간 찢어진 인터넷 선을 타고 빗물이 들어와 인터넷도 되지 않고 랜 카드도 망가진 바람에 작업실에선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상황이다. 그 바람에 요 며칠 작업실에 나가질 않고 있다. 작업실 안에선 마치 콘크리트 상자 안에 구류 처분 받아 갇힌 기분이니 말이다. 주말이면 복구될 것이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의 커다란 변화  

 

 

올 해 2020년을 훗날 떠올린다면 그건 단연코 코로나19일 것이다. 그런데 아, 그 해 여름 장맛비가 엄청났었지! 하고 기억하는 이도 있을 것 같다.

 

운의 흐름 상 2019년부터 2021년까지 3 년은 크게 볼 때 하나의 흐름이다. 亥(해), 子(자), 丑(축)의 흐름인 까닭이다. 그러니 운이 모서리를 돌아가는 내후년 2022년이 되어야 또 다른 흐름이 생겨날 것이다.

 

이처럼 당장은 코로나19와 장맛비가 현안 문제이지만 실은 2019년부터 내년까지 실로 엄청난 변화들이 우리에게 닥쳐왔고 또 닥쳐오고 있는 중이다. 오늘은 그 변화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미중 무역전쟁 역시 크게 볼 때 2019년부터 격화되었으니 같은 흐름이다. 무역전쟁은 지난 달 미국 국무장관 폼페이오의 중국 공산당 교체에 대한 연설, “우리가 중국을 바꾸지 않으면, 중국이 우리를 바꿀 것”이란 발언은 당장 전젱은 아닐지라도 거의 국교를 끊자는 수준의 얘기였다.

 

 

흐름 속에 있을 땐 흐름의 실체를 느끼기 어려운 법

 

 

코로나19의 와중에 처해 있어서 그렇지 지금 목하 새로운 산업의 흐름이 금년 들어 부쩍 눈에 들어오고 있다. 제4차 산업혁명이란 말이 정말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최근 들어 새로운 성장산업이 이젠 큰 흐름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말로만 떠들어대던 전기차가 이젠 거역할 수 없는 대세로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 인공지능(A.I)라든가 바이오 신약, 카카오페이와 같이 뒤에 ‘페이’란 이름이 붙은 각종 간편결제와 같은 핀테크 기술이 널리 보급되고 있다. (얼마 전 서울시는 2035년부터는 전기차와 수소차만 등록하는 법령을 정부에 건의하겠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여기에 이번 코로나19로 인해 이른바 ‘언택트’란 말이 대유행을 하고 있고, 또 말로만 얘기되던 재택근무도 광범위하게 실시되고 또 시험되고 있다. 스마트폰을 통한 택배 서비스가 고도로 발전하더니 카카오 택시와 같은 새로운 유형의 서비스가 등장했다.

 

영화표도 스마트폰으로 하더니 이젠 아예 집에서 넷플릭스나 유플러스로 보고 있고 텔레비전보다는 ‘유튜브’를 통해 즐기고 또 정보를 얻고있다. 이처럼 최근 2-3년 사이에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크게 변해가고 있다.

 

여기에 이성교제나 연애 등을 중계하는 수백 개의 데이팅 앱이 생겨났으니 이런 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다. (미국에선 코로나19로 인해 젊은이들이 집안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 결과 데이팅 앱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흐름 속에 있어서 잘 느끼지 못할 뿐 몇 년 사이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패턴은 엄청나게 변해왔고 또 변해가고 있다.

 

 

어디까지 변화해 갈 것인지 알 순 없지만 

 

 

왜 이렇게 급변하고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볼 것 같으면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LTE, 달리 제4세대 이동통신이란 놈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전송능력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새로운 서비스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아직은 최근에 등장한 5G 기술이 우리들의 생활을 또 어떻게 바꾸어 놓을 것인지, 인공지능 기술이 우리들의 일자리와 삶을 어떻게 변모시켜 나갈 것인지 쉽사리 상상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들 역시 엄청난 변화를 우리에게 가져오지 않겠는가 싶다.

 

이번 코로나19로 인한 증시 폭락과 그 이후 오늘까지의 무지막지한 반등 장세를 보면 앞에서 얘기된 것들과 관련된 종목들이 ‘미래성장주’란 이름으로 불리면서 크게 시세를 내고 있다. 주식하는 사람들은 느끼겠지만 그런 종목들의 기업 이름 또한 참 생경하다. 예컨대 ‘에코프로비엠’이란 기업이 있는데 처음 들으면 이게 대체 뭐하는 회사인가 싶었다. 이에 대해 누군가 설명하길 외국인 투자자들의 이목을 끌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과잉 유동성이 만들어내고 있는 변화들 

 

 

증시와 관련해서 조금 얘기하면 이번 달인 8월 들어서의 증시 상승은 상당히 과열된 느낌이고 내용을 보면 개인투자자들의 마구잡이 매수란 생각이 든다. 경험이 없는 투자자들이라면 몰라도 경험이 있는 투자자들은 오히려 고민하고 있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쉽사리 발을 뺄 수가 없으니 말이다.

 

미국을 비롯해서 전 선진국들이 돈을 찍어내고 있고 그런 흐름에 따라 우리 정부와 한국은행도 돈을 엄청나게 풀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시작되면서부터 이미 통화량 증가가 GDP성장률을 크게 웃돌고 있던 차에 이번 코로나19로 인해 시중에 엄청난 유동성이 공급되었다. (원래 통화량 증가는 경제성장률 증가와 함께 가는 것이 이상적이다.)

 

시중유동성의 대표 지표인 M2를 보면 작년 말 기준 2810조원에서 금년 5월말로서 3054조원으로 늘어났다. 5개월 사이에 8.7%가 증가했고 액수론 244조원이 늘어났다. 성장률은 사실상 마이너스 상태란 점을 고려하면 참으로 엄청난 유동성 공급이다.

 

그러니 현재 시중 유동성은 넘쳐나고 있고 그로 인해 부동산과 증시가 급등세를 보이고 있다.

 

6월이었던가, 경실련 발표에 의하면 2017년 5월부터 금년 5월까지 문재인 정부 3년 동안 서울 아파트의 중위 가격이 3억1400만 원이 올라 52%나 폭등했다는 것이다. 꽤나 놀랐는데 이 역시 문재인 정부 초기부터 시중 유동성 공급을 지속적으로 급증시켜 왔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현 정부 들어 수십 차례의 대책을 발표했음에도 집값 안정, 특히 서울과 수도권의 집값이 안정되지 않고 있다.

 

증시 역시 유례없는 유동성 공급으로 인해 1992년 증시개방 이래 처음으로 외국인과 기관이 사지 않고 거꾸로 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개인투자자들의 매수로 인해 3월 저점 대비 무려 63%나 급등했다. 불과 4개월만의 일이다. 상승폭도 그렇고 개인투자자들의 매수만으로 오른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니 그야말로 이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돈을 풀어서 경제가 돌아간다는 것은 결국 디플레이션을 의미한다. 

 

 

정리하면 2018년 성장률 2.7%, 2019년 2%이니 합치면 4.7%가 늘어났다. 여기에 올 해 예상치는 마이너스 1%라고 하니 다 합치면 3.7%이다. 그러나 그간에 M2통화량은 2,627조원에서 현재 3,054조원이 되었으니 무려 16%가 늘었다.

 

3.7%와 16%의 차이, 이는 간단히 말해서 돈을 풀어서 억지로 경제를 유지해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평상 시국이라면 그 차이만큼 즉 12.3%만큼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야 하겠지만 그렇지가 않으니 이는 결국 우리 경제가 엄청난 디플레이션 압력을 받고 있음을 말해준다. (나아가서 글로벌 경제 전체가 사실상 심한 디플레이션 상태이다.)

 

어쨌거나 한국은행도 속으로 걱정이 되었는지 7월 말로서 ‘무제한 RP매입’을 종료했다. 시중 유동성 공급을 조절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바람에 최근엔 그동안 툭 하면 걱정이다 뭐다 하면서 언론에서 보도되던 가계부채는 아예 언급도 되지 않고 있다. 이미 너무나도 늘어나 버렸기 때문에 사실상 포기 수준이다. 그저 한은의 저금리, 역사상 처음으로 1% 이하 수준인 0.75%로 인해 일단은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코로나19가 문제이지 가계부채가 문제냐? 하면서 말이다.

 

몇 년 사이에 사람들의 생활에 있어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변했다.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들이 우리의 사는 방식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아울러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 경제의 체질은 극도로 악화되어 왔다, 유동성 공급을 통해 억지로 성장률이란 것을 만들어내고 있을 정도로 심한 디플레이션이다.

 

 

코로나19의 충격은 거의 결정타에 가까워서 

 

 

여기에 올 해의 코로나19는 약해지고 있던 글로벌 경제와 우리 경제에 엄청난 충격, 그야말로 결정타라고 말해도 될 정도의 충격을 안겨주었다.

 

미국 상무부 발표로 금년 2분기 국내총생산이 1분기에 비해 연율(年率ㆍ연간으로 환산한 비율)로 -32.9%로 폭락했다고 밝혔는데 이는 1947년 분기 성장률 집계 이후 최악이라 한다. 그런 까닭에 미국 연준은 경제를 지탱하기 위해 무지막지한 돈을 찍어서 시중에 풀고 있다.

 

이번 코로나19로 인해 이제 중앙은행의 역할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예전엔 중앙은행의 핵심 역할은 인플레이션 방지에 있다고 목에 힘주고 권위적으로 읊어대던 시절은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어떻게 해야 불경기와 디플레이션 압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느냐가 관건일 뿐이다.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예전의 경제, 줄여서 올드 이코노미와 작별했거나 작별해가고 있는 참이다. 경기가 과열되면 금리를 올려서 식히고 부진하면 금리를 낮추어서 부양하는 식의 경제가 올드 이코노미였는데 오늘날의 경제는 그 특징을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는지 아직은 전혀 모르겠다. 아무튼 올드 이코노미가 아닌 것이니 뉴 이코노미인 것만은 확실하다.

 

어쩌면 멀지 않아서 돈을 마구 찍어내어도 더 이상 성장이 되지 않고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는 새로운 시대가 올 것 같기도 하다. 경제활동 인구의 감소와 같은 거시적 요인으로 해서 말이다.

 

 

우리 경제의 커다란 숙제

 

 

우리 기업들의 활약을 보면 나름 대단한 면이 있다. 신기술을 흡수하고 개발해가는 노력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제4차 산업혁명의 흐름에서 뒤처지는 일은 있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장담하긴 어렵다. 왜냐면 우리 경제는 큰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기업 상속이 불가능해졌다는 점이다.

 

대기업의 경우 상속세가 무려 65%라는 점, 상속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론 규모가 조금 되는 중소기업 역시 50% 상속세를 내야 하니 그 역시 불가능하다. 상속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어떻게 될까.

 

결국 기업 의욕이 크게 떨어질 것이다. 더 이상 기업을 키워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상장기업들은 대규모 배당으로 갈 공산이 커지는데 그렇게 되면 미래를 향한 투자가 위축될 수박에 없다.

 

그동안 우리 경제는 대기업 중심으로 성장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데 상속이 불가능해지면 성장이 이어질 수 있을까 싶다.

 

당장은 그리고 아직까진 괜찮아 보이지만 조만간 이 문제는 우리 경제의 진로에 엄청난 부담이 될 것이 불 보듯 명백하다. 경제의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대중의 정서는 가진 자에 대해 적대적이어서 정치하는 이들 중 감히 그 누구도 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새로운 길을 찾아가야 하겠구나. 

 

 

2024년은 우리 국운의 60년 흐름에 있어 바닥이자 새로운 시작점이다. 이 말은 조만간 어렵고 힘들더라도 낡은 껍질을 버려야만 하는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새로운 방식을 찾아가야 할 것이란 얘기이다, 그렇지 않으면 뒤로 밀려날 것이니 말이다.

 

오늘의 글은 우리가 현재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의 한 渦中(와중)에 있다는 얘기였다.

중간 가려면 최선을 다해야 하기에 

 

“붉은 여왕 가설(The Red Queen hypothesis)”이란 것이 있다, 생물의 진화 이론에서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다. 알고 계신 분도 많겠지만 간단히 소개해본다.

 

영국 소설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에서 붉은 여왕이 주인공인 앨리스에게 “넌 최대한 힘껏 달려야만 이곳에 간신히 머무를 수 있어, 네가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고자 하면 지금보다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해!” 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따온 개념이다.

 

이 가설은 자연 속에서 어떤 생물이 계속 진화를 하더라도 다른 생명이 더 빨리 진화해가면 상대적으로 뒤처질 것이기에 모든 경쟁 생명체들이 끊임없는 경쟁 환경 속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것, 아울러 자연계의 진화경쟁에선 어느 한쪽이 지속적으로 승리를 거두긴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전쟁  

 

 

최근 코로나19의 공격에 우리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문득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이번 바이러스는 툭 하면 변종이 일어난다고 하니 백신이 만들어져도 지속적인 효과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말들이 무성하다. 크기가 80-100 나노미터에 불과한 놈이 인간의 몸속에 침투해서 사람을 죽이고 있다. 무게가 아니라 길이로 볼 때 자신보다 무려 2천만 배나 거대한 인간을 파괴하고 있으니 실로 어이가 없다.

 

인간이 과학과 기술이란 무기를 앞세워 진화해가고 있지만 저 미세한 바이러스의 변이(진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바이러스란 놈은 유전정보를 감싸고 있을 뿐 세포 조직도 아닌 따라서 생명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놈이어서 현재로선 특별한 공격 포인트를 인간이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인간을 괴롭히는 바이러스 중에는 독감도 있고 간염 바이러스도 있지만 가장 악랄했던 놈은 역시 천연두 바이러스였다. 기원전 10,000년경부터 인간을 괴롭혀 왔으며 20세기에만도 3-5억 정도의 사람을 죽였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천만다행으로 영국의 에드워드 제너가 1798년에 우두법을 개발하고 그 이후 백신이 널리 보급되면서 1979년에 이르러 WHO가 천연두의 박멸을 선언했다.

 

 

어쩌면 이번 일이 전환점이 될 수도 

 

 

재미난 점은 우두법의 개발에서 천연두 바이러스의 박멸까지 180년의 시차가 있다는 점이고 이는 자연순환 주기 중의 하나인 360년의 절반에 해당된다는 사실이다.

 

현재 온 인류가 총력을 기울여서 바이러스 백신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어쩌면 이번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이 향후 바이러스와의 전쟁에 있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천연두 이후 그저 견딜 수 있는 정도란 생각에 그냥 지내왔지만 이번엔 바이러스의 공격이 워낙 무서우니 인간도 최대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 본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백신 개발은 시기를 따라잡지 못하는 바람에 개발 리스크가 워낙 컸고 그로 인해 백신 연구가 도중에 중단되는 일이 잦았지만 이번에 경우가 다르다. 특히 최강국 미국이 저처럼 피를 보고 있으니 더욱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최선을 다해야 중간을 유지하는 현실의 세상

 

 

다시 돌아와서 얘기이다. 인터넷에서 보니 붉은 여왕의 가설에 대해 ‘나무위키’에 소개한 내용을 보니 흥미롭다. 어떤 3컷짜리 만화에서 다음과 같이 재치 있게 제시했다는 것이다.

 

인간 : "저는 그저 적당히 살고 싶습니다."

신 : "적당히 살고 싶다고?"

"그럼 미친 듯이 노력해라."

 

경쟁에서 중간 정도 유지하려면 미친 듯이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보통의 삶을 유지하기란 참으로 어려워서 

 

 

이런 생각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볼 것이기에 쉽게 공감이 간다. 그런가 하면 가끔 상담하다 보면 듣게 되는 말이기도 하다. “저는 큰 욕심 없습니다. 그냥 평범한 삶을 원합니다.” 하는 말이 그것이다. 그럴 때마다 난 속으로 평범하려면 비범해야 하는 데요? 하고 반문하게 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평범하려면 적어도 하나 정도는 비범한 구석이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늘 한다. 그렇기에 흔히 중간 정도면 만족이다 말들을 하지만 그 중간이 결코 쉽지 않다. 주특기 또는 필살기가 하나 정도는 있어야 중간 갈 수 있으니 말이다.

 

나아가서 긴 인생 살아가면서 ‘보통 사람의 평범한 삶’을 줄곧 유지해가기란 그야말로 어렵다. 내가 발견한 자연순환의 원리에서 보면 불가능하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범한 삶이란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게 실로 어렵다. 평균 수명은 살아야 할 것이고 보통의 수입과 직장, 그 결과 보통의 재산도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보통의 체격과 용모도 갖추어야 할 것이며 결혼을 하게 되면 배우자 또한 보통의 체격과 용모, 건강 등을 갖추어야 할 것이며 자식을 낳게 되면 그들 또한 보통 정도는 따라가 주어야 자식으로 인한 마음고생을 면할 것이다.

 

 

보통의 삶은 없다.

 

 

그렇기에 보통의 삶,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수준을 한 개인이 다 누리고 가진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우리 주변에 보통이다 싶은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개개인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어떤 이는 건강하지만 돈이 없고 어떤 이는 재산은 제법이지만 단명하거나 몹쓸 병에 걸려 일찍 세상을 뜨기도 한다.

 

가령 건강과 수명, 용모, 재산, 학력, 직장, 배우자의 조건 등등 보통의 요건이 여섯 가지라 한다면 그걸 다 가질 확률은 대단히 낮아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통의 삶은 이 세상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현실에서의 ‘보통의 삶’이란 어딘가 한 가지 또는 한 구석 이상은 결핍된 삶을 말한다. 그게 보통의 삶이다.

 

수명만 봐도 그렇다. 흔히 요즘 세상에는 85세 정도까진 무난히 살 것으로 여기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는 점이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기대수명은 82.7년이라 한다. 하지만 그건 평균 수치이고 정확히 얘기하면 여성은 85.7년이고 남성은 79.7년이다. 그렇기에 남성의 경우 85세까지 살 것 같으면 보통의 삶이 아니라 장수에 해당이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남녀의 성비에 있어 출생 시엔 남아의 여아에 대한 비율이 1.07이다. 남아 107명에 여아 100명이 태어난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55세에서 64세까지의 성비는 0.98로 역전이 되고 65세 이상이 되면 0.71로 급격히 줄어든다. 55세를 넘기면서 남성의 사망률이 급격히 높아진다는 얘기이다.

 

이 정도면 보통이 아니겠는가 생각하는 그 보통이 실은 보통이 아니라 나름의 기대를 반영하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는 얘기이다.

 

 

앞서가고 뒤처지는 것이지 그 자리에 머물 순 없기에 

 

 

자연순환의 원리에 따라 그 누구에게도 60년의 순환이 존재한다. 사계절이 있다는 얘기이다. 그 중에서 입춘을 전후한 15년은 어쩔 수 없이 힘든 시기를 맞이하기 마련이다. 그 역시 객관적으로 볼 때 정도의 차이야 있겠으나 주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전혀 차이가 없다. 누구에게나 한 때 ‘흑역사’는 있기 마련이란 얘기이다.

 

사람의 일생만이 아니라 기업이나 나라 또한 당연히 그렇다.

 

사람처럼 기업이나 나라 역시 탄력을 잃어버릴 때가 있기 마련이라 하겠다. 앞에서 소개한 “붉은 여왕의 가설”이 암시하고 있듯이 자연계의 진화경쟁에선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긴 어렵다는 것, 때론 앞서가고 때론 뒤처지기도 한다는 것은 인간의 삶이나 나라에도 고스란히 적용이 된다.

 

최근 10년 사이에 우리나라의 역량이 많이 발전하고 반대로 일본의 경우 전혀 발전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일본 사람들 스스로도 우리가 왜 이러지? 왜 이처럼 탄력이 없지? 하고 많이 고민도 하고 성찰도 하는 것 같고 반면에 우리 사람들은 일본을 다소 만만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 같다.

 

하지만 나 호호당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일본을 지켜보면서 우리 역시 멀지 않아 저런 때가 올 터인데, 곧 우리 차례가 될 터인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붉은 여왕의 말처럼 힘껏 달려야만 제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을 어느 순간 대충 달려도 제 자리를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부터 뒤처지기 시작할 것이니 말이다.

 

보통의 삶이라 어려운 것이다. 나아가서 일생을 두고 보통을 유지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사람은 기대와 희망을 안고 살아간다. 그게 밀어주고 끌어가는 힘이니 그렇다. 하지만 한 편으론 현재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 역시 우리로 하여금 무리하지 않게 하고 편안하게 해준다. 어느 선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걸까? 그게 참 어렵다.

1달 급락했다가 4개월만에 원상 회복이 된 우리 증시 

 

국내에서 코로나19가 본격 확산된 것은 30번 확진자부터였는데 마침 그 날은 2월 18일, 절기상으로 雨水(우수)였다. 그 날을 시작으로 해서 증시는 3월 20일 춘분 전날까지 한 달 동안 엄청난 폭락을 보였다. 그 이후 반등해서 어제 7월 22일 小暑(소서)로서 2월 18일의 주가로 원상 복귀했다. 그간의 장세를 정리해보면 1달간의 가파른 하락 이후 4개월간 반등해서 원점으로 온 셈이다.

 

이를 두고 증시에선 V자 반등이라 하지만 1달 하락 후 4개월에 걸쳐 반등했으니 엄밀한 의미에선 그렇지 않다. V자의 오른 쪽 꼭짓점이 높이는 같아도 각도는 아주 완만하다는 얘기이다.

 

 

이제 정리해볼 시점이 되었으니 

 

 

지금쯤에서 이제 최근의 증시상황을 한 번 정리할 때가 된 것 같아서 글을 올린다.

 

글로벌 전체적으로도 그렇고 우리 역시 유례가 없는 글로벌 유동성 공급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증시는 원상회복되었으나 실물 경제는 여전히 부진하다는 점에서 괴리가 발생한 것이고 따라서 지금의 증시 상황은 유동성 공급으로 인한 일종의 단기 버블 상황이라 볼 수 있겠다.

 

최근의 부동산 역시 유동성 공급의 급격한 증가 때문이고 증시 역시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의미심장한 뉴스 하나

 

 

증시로 원점으로 복귀된 그제 7월 22일 小暑(소서)가 되자 뉴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내용인 즉 증권사들이 개인투자자들에게 돈을 빌려줄 수 있는 한도가 소진된 바람에 당분간 대출을 중단한다는 내용이었다. 눈이 번쩍 뜨이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뉴스였다.

 

이제 거의 다 왔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대출 중단이 증시가 원상회복된 것과 시간적으로 일치하고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이건 우연의 일치일 수가 없다.

 

대출 한도가 소진된 것 자체가 참으로 오랜 만, 거의 수십 년만의 일이다. 1980년대 자금경색이 심하던 시절에나 가능했던 일이 지금 유동성이 끓어오르는 현 시점에서 한도가 소진되었다는 것은 한도가 적어서가 아니라 개인투자자들 이른바 동학개미들이 주식 매수를 위해 신용을 지나치리만큼 끌어당겨서 썼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한도가 소진된 것은 정부의 은밀한 지시 같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금융사들에 대한 위험관리 차원에서 증권사들은 투자자들에 대한 대출 한도를 자기자본의 60-70%까지로 정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한도가 소진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증권사들의 금고가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증시가 원상으로 돌아온 날과 증권사의 대출 한도가 소진된 날이 겹치고 있다는 사실. 그 뉴스는 이제 증시의 반등은 여기까지! 이런 소리로 들려왔다.

 

 

신용 레버리지로 주식을 사들인 동학 개미들

 

 

증시가 하락을 시작한 2월 18일부터 그제 소서인 7월 22일까지 4개월간 외국인들은 국내 증시,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 시장 합쳐서 27조 4,364억 원 어치의 주식을 매도했고 여기에 기관투자자들까지 합쳐서 38조 가량을 매도했다. 반대로 이 기간 동안 연기금 매수가 근 4조 가량이고 나머지는 죄다 개인 투자자들이 매수해서 34조 8,800억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런데 개인 투자자들의 대출이나 신용 액수가 실로 엄청나다는 사실이다. 통계를 보면 주식담보대출이 현재 17조이고 신용대출이 13조 6천억에 달하고 있다. 물론 이 액수는 앞서의 기간 동안 즉 2월 18일부터 7월 22일 사이에 전적으로 생겨난 대출이나 신용은 아니고 그 이전부터 누적되어온 액수이다. 하지만 최근 5개월 사이에 신용과 대출이 엄청난 급증세를 보이면서 급기야 증권사의 한도가 소진되는 일이 발생했다.

 

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 2월 18일부터 7월 22일까지 개인들이 34조 이상을 매수하는 과정에서 최소한 40% 정도는 신용을 통한 매수 즉 레버리지 매수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또 여기에 포함되진 않지만 작전 세력들이 사채 시장을 통해 조달한 금액도 상당할 것이다.

 

따라서 동학개미들이 레버리지를 통해 그간 외국인과 기관들이 매도한 주식을 다 받아준 셈이다.

 

그러자 며칠 전인 7월 17일엔 대통령까지 나서서 개인투자자들을 부추기는 일도 있었다. 세법개정안 발표와 관련해서 개인투자자들의 힘이 상당하다는 것이 ‘동학개미운동’으로 증명되었다면서 금융세제 개편이 개미들의 의욕을 위축시켜선 아니 된다는 발언이었다. (대통령 역시 정치인인지라 지지율 관리를 위한 발언으로 이해할 순 있겠으나 그게 참 그렇다.)

 

 

실탄이 떨어졌으니 

 

 

이제 개인들이 레버리지를 일으킬 수 있는 증권사들의 한도가 소진되었다. 다시 말하면 개인 투자자들이 더 이상 증시에 돈을 부어넣을 힘은 사실상 사라졌다는 말이다.

 

게다가 또 한 가지 소식이 있으니 그간 코로나19로 인한 하락 장세에서 적극적으로 주식매수에 나섰던 국민연금 또한 이미 금년도 매수한도가 꽉 들어찼다는 점이다. 운용기금 중에서 국내 주식에 할당된 액수를 이제 최대한으로 채웠다는 얘기이다. 하반기엔 더 이상 매수 못 한다는 말씀.

 

따라서 그간 매도로 일관했던 외국인 투자자들과 기관투자자들이 이제부터 본격 매수에 나서지 않는 이상 국내 증시의 상승은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다.

 

나 호호당은 저번 7월 6일자 글 “고민 중인 동학 개미들에 대한 하나의 힌트 또는 조언”이란 글을 올린 바 있다. 글 내용에 외국인들이 그간 싸게 판 주식을 이제 와서 비싸게 사주진 않을 것이란 얘기가 들어있다.

 

개미 투자자들의 매수 여력은 소진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다시 하락 장세로 반전되면 그간에 누적된 신용매수와 신용대출로 해서 매도물량이 한도 끝도 없이 쏟아질 가능성이 극도로 커진 상태이다.

 

 

이제 마무리 국면으로 들어갈 참이니 

 

 

따라서 이제 국내 증시의 반등 또는 상승은 이것으로서 마무리가 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증시는 실로 무서운 곳이다. 바로 하락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증시는 참으로 영악하고 교활한 구석을 가졌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간 개미들의 매수에 힘입어 주식 작전을 펼친 세력들 그리고 수퍼 개미들로선 이제 슬슬 빠져나갈 기회를 만들 것이 거의 확실하기 때문에 즉각 하락으로 변할 가능성보다는 이제 한 달 또는 두 달 정도에 걸쳐 증시를 떠받치면서 어쩌면 조금 더 상승하도록 장을 조성하면서 마지막 출구전략을 가동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기에 이제 당분간, 아마도 한 달에서 두 달 사이에 증시는 횡보 국면 또는 조금 더 오르는 국면이 연출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래야만 그간 망설이면서 지켜만 보던 개인들까지 최대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니.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야, 당신 말이야,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증시에 뛰어들지 않으면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게 될 지도 몰라!” 하고 강박적인 메시지를 던져올 것이라 본다. 그건 욕심의 충동이기도 하고 공포의 감정이기도 하다.

 

 

증시는 사람을 홀리는 무서운 곳이라서  

 

 

제 발로 자신의 페이스로 걸어가는 사람을 달려가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慾望(욕망)이고 또 하나는 恐怖(공포)이다. 욕망에 들뜬 자 이익이 있다 싶은 쪽으로 내달릴 것이고 공포에 질린 자 역시 냅다 달릴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천천히 걸어간다.

 

그런데 증시야말로 이 두 가지를 기가 막히게 믹스해서 부릴 줄 안다. 나 호호당이 오랜 기간 동안 지켜보아온 증시는 늘 마지막 상투 국면에서 또는 마지막 하락 국면에서 엄청난 마법 또는 최면의 힘을 발휘해서 사람의 얼과 넋을 쏙 빼어 놓더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 호호당은 증시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

 

 

이제 설거지 장세가 시작될 참.

 

 

이제 글을 정리할 시간이다.

 

증시는 이번 小暑(소서)로서 오를 만큼 다 올랐다. 하지만 바로 하락으로 가기 보다는 늘 그러하듯 이른바 “설거지 장세”가 시작될 것이라 본다.

 

그간에 잔뜩 재미를 봤다 하더라도 아직 그게 주식으로 가지고 있을 것이니 조심해서 가급적 좋은 가격에 처분해야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일단 팔았다가 다시 조금 더 사들이고 이런 식의 작업을 펼치면서 일정 가격대에서 개미들로 하여금 안달이 나게 만들어 물량을 떠넘기는 과정이 펼쳐질 것이란 얘기이다.

 

최근 며칠 사이 특히 제약 바이오 주식들이 강세를 보이고 있다. 그야말로 마지막 상투장의 모습이 연출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나라 제약 바이오 기업들 중에 코로나 백신이나 치료제를 진짜 만들어낼 수 있는 실력과 행운을 가진 기업이 몇이나 될까? 하나 정도는 될까?

 

우리만이 아니라 전 세계 유수의 제약사들과 바이오 기업들이 일제히 코로나19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뛰어들었지만 최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업은 글로벌 전체적으로 극히 소수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더 나아가서 끊임없이 변종을 일으키는 코로나19에 대한 백신이나 치료제 개발이 과연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그런 마당에 국내의 모든 제약 바이오 기업들이 죄다 들썩이고 급등하고 있으니 냉정히 보면 이건 알고도 속아주는 코미디나 다름이 없다.

 

임상2상이 내년 2월경에 완료된다는 소식 하나로 주가가 불과 얼마 전에 6천원 하던 것이 20배나 급등하고 있다. 그러니 최근의 제약 바이오 급등 현상은 그야말로 돈 내고 돈 먹기 양상이고, 나아가서 마지막 상투 장세의 모습이다.

 

 

모른 척 하고 따라는 가지만 여차하면 튀어야지.

 

 

나 호호당도 주식을 하고 있다. 그러니 재미도 약간 보았다. 증시 반등이 끝났다고 말하면서도 당분간은 모른 척 태연하게 따라가 줄 생각이다. 영화처럼 증시도 라스트 씬이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는 법이니 그렇다. 엑기스는 보고 나와야 하는 법, 하지만 아이쿠! 싶은 순간이 오면 즉각 꼬리는 떼어주고 도망 나올 준비를 해야 하겠다.

 

그 시점이 8월 처서가 될 지 9월 추분이 될 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동학 개미님들의 안녕을 빌면서 글을 마친다.

보통 사람들의 걱정이란 크게 세 가지 

 

 

자식 낳고 사는 보통 사람의 걱정이란 게 알고 보면 크게 세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먹고 사는 걱정, 건강에 대한 문제 그리고 자식 걱정이다.

 

예전에야 워낙 자녀를 많이 둔 까닭에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걱정도 많았겠지만 한편으론 그 걱정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보니 오히려 속 편하게 체념할 줄도 알았던 것 같다. “저 먹을 것은 가지고 나온다” 하는 속담이 그것이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산 입에 거미줄 치는 법은 없다”고 하듯이 크든 적든 먹고는 살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자녀를 둔 부모로서 평생 염두에서 떠나는 법이 없는 것이 바로 자녀 걱정이다. 잘 되면 잘 되는 대로 더 잘 되었으면 하는 걱정이고 잘 되지 않으면 당연히 걱정이다. 그건 생명의 논리이고 生殖(생식) 즉 세대를 이어감에 있어 가장 중차대한 문제인 까닭에 자녀를 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마에 걱정을 매달고 산다.

 

 

자녀 문제 상담에 잘 응하지 않는 이유 

 

 

그런 관계로 자녀 걱정을 하는 부모가 내게 상담을 신청해올 때가 자주 있다. 하지만 대개는 세월이 약이니 나중에 좋아질 거라는 정도로 달래주는 정도로 그치고 어지간해선 상담에 응하지 않는다.

 

자녀에 대한 막연한 걱정이 아니라 질병이라든가 장애와 같은 심각한 사정이 있을 경우 상담에 응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 부모의 답답한 속을 조금치나마 풀어주는 것이 고작일 뿐, 결국 본인의 문제는 본인이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는 까닭이다.

 

상담을 해도 본인과 직접 얘기를 주고받아야 한 마디라도 나름 의미 있는 얘기를 해줄 수 있는 것이지 부모를 통해 전해 듣는 것은 사실 별 소용이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그렇다.

 

 

의욕을 잃은 젊은이와의 상담

 

 

얼마 전 한 젊은이가 찾아와서 상담을 했다. 미국 유학생이었는데 근 10년 사이에 전공을 여러 차례 변경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일러 갈 之(지)자 행보 또는 지그재그 스텝이라 한다. 고등학교 시절엔 인문학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것으론 먹고 살기 어려울 것 같아서 미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가면서 이과를 택했는데 적성이 맞지 않는 것 같아서 이리저리 전공을 변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젊은이의 경우 10년씩이나 미국에서 전공을 바꿔가면서 유학을 하고 있다면 가정의 경제적 사정은 당연히 좋다는 얘기가 된다. 다만 공부만 하고 있을 뿐 사회진출이 늦어지고 있다는 점이 일단은 문제였다.

 

생년월일시를 통해 사주를 펼쳐보니 그 젊은이의 문제가 무엇인지 대번에 이해가 갔고 그간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그 젊은이는 운세가 줄곧 내리막길을 가고 있었다. 올 해로서 동지의 운을 맞이하고 있었다.

 

 

또 한 명의 싯다르타

 

 

유복한 가정환경이고 나이 이제 서른 무렵에 이런 운을 맞이하고 있는 젊은이를 만나게 되면 나는 그를 싯다르타라고 호칭한다. 나중에 불교를 창시한 고타마 싯다르타, 우리들이 흔히 석가모니라 부르는 분 말이다.

 

오랜 경험과 관찰을 통해 운이 오른다는 것과 내린다는 것의 본질적인 차이점을 나 호호당은 잘 알고 있다.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되어보고 싶은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가진 자라면 그는 운이 상승하는 것이고 그런 것들을 원하고는 있지만 그를 얻기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이나 수고가 감당이 되지 않는 자라면 그는 운이 하락하는 사람이다.

 

 

굳이 사주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운의 상승과 하강

 

 

어떤 곳에 가고는 싶은데 그곳으로 가려면 첩첩한 산을 넘어야 한다고 할 때 그 첩첩한 산을 어쩔 수 없이 넘어가는 수고를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거나 또 현재 넘고 있는 중이라면 운이 상승하는 사람이고 첩첩한 산이 너무나도 버거워서 다른 생각 또는 타협을 원하고 있다면 그는 운이 하락하는 사람이다.

 

懇切(간절)한 가 아닌가, 이거야말로 굳이 사주를 보거나 운을 파악하지 않아도 운의 상승과 하락을 구분할 수 있는 결정적 대목이다.

 

그 젊은이는 간절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집이 부유하다고 해서 유학 중에 한껏 즐긴 것도 아니요, 부모님들이 최선을 다해 학비를 조달해 주고 있다는 사실, 세상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 아울러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책임감 등등 많은 것들을 나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건실한 청년이었지만 하던 공부를 그 사이에 벌써 여러 차례 변경해오고 있었으니 그건 간단히 말해서 彷徨(방황)이었다.

 

그 무언가를 얻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이란 다름이 아니라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얻기 위해선 결국 싸워야 한다는 말이다. 경쟁자들과 싸워야 하고 나아가서 자신과도 싸워야 한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싸우고 싶은 생각을 별반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건 그 젊은이가 선천적으로 평화적인 성향을 가져서가 아니라 마음속에 간절한 욕망 또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찾아온 젊은이는 이번에 택한 전공만큼은 꼭 마치겠다는 책임감 또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심리는 간절함과는 거리가 멀다 할 수 있다. 더 이상 방황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인 것이지 본인의 간절한 목표는 아니란 얘기이다.

 

 

싯다르타가 방황하는 이유

 

 

그 젊은이가 방황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사실 간절한 그 무엇을 염원할 만큼 어려운 환경에 놓여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싯다르타라고 하는 것이다.

 

나 호호당 생각에 왕자 고타마 싯타르타는 풍요로움 속에서 더 이상 가지고 싶은 것이 별로 없는 환경에서 생각이 많은 지적인 청년이었기에 삶의 본질적인 괴로움에 대해 날카로운 인식을 가질 수 있었다고 본다. 재능도 뛰어나고 가진 것도 많은 여유로운 입장이었기에 일반인들이 주목하지 않는, 더 본질적으로 말하면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 데 생각이 미치지 않는 삶의 문제에 대해 예민하게 느꼈다는 것이 나 호호당의 생각이다.

 

그렇기에 환경은 나쁘지 않은데 간절한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 달리 말하면 운세가 하락하고 있는 젊은이를 나 호호당은 싯다르타라고 부른다. 역사상의 싯다르타와 나를 찾아왔던 그 젊은이, 내 눈엔 하등의 차이가 없다. 우리 주변엔 그렇기에 적지 않은 젊은 싯다르타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싯다르타이기에 그 젊은이의 앞날 또한 싯다르타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출가한 뒤 싯다르타는 여러 스승님들을 찾아다니며 많은 수행을 했으나 나중에 결국 그 모든 것이 허사였음을 깨닫고 中道(중도)의 길을 스스로 체득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여덟 가지 바른 길을 통해 생사번뇌를 떠나 열반에 들 수 있었다.

 

 

입춘 전의 방황과 입춘 이후의 방황은 다른 것이다. 

 

 

싯다르타에게 있어 출가하기 전의 세월들은 방황이었지만 출가한 후의 수행 역시도 방황이었다. 출가한 뒤 열심히 깨달음을 찾아다녔지만 보람이 없었으니 말이다. 이처럼 명칭은 같은 방황이지만 앞의 것과 뒤의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이 중요하다.

 

자연순환운명학의 입장에서 보면 앞의 방황은 60년에 걸친 운세 순환에 있어 입춘 이전의 것이라 하겠고 뒤의 것은 입춘 이후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앞의 방황은 간절한 그 무엇이 속에 담겨져 있지 않아서 하게 되는 허무함에서 오는 방황이고 뒤의 방황은 이제야말로 간절한 그 무엇을 찾아내기 위한 방황이라 말할 수 있다.

 

찾아온 젊은이에게 얘기해주었다.

 

자네는 현재 운세가 내리막이기에 방황하고 있다는 점, 그러다가 몇 년 뒤 입춘을 지나고 나면 제대로 살아보기 위해 또 한 번의 힘든 시간들을 가지게 될 것이란 점, 그런 과정을 거쳐 중년 이후엔 제대로 사는 맛을 느끼면서 즐겁고 힘차게 살아가게 될 것이란 점을 얘기해주었다.

 

 

사는 맛을 느끼면서 산다는 것

 

 

이 대목에서 중요한 얘기는 사는 맛을 느끼면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사는 맛을 느끼며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간단하다. 의욕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목표에 조금씩 접근해가는 삶을 뜻한다. 우리들은 그런 상태에 있을 때 행복을 느끼고 삶의 보람을 느낀다.

 

하지만 긴 인생살이는 이런 시간들로만 채워지는 법이 없다. 그렇기에 더더욱 의욕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시간들이야말로 소중하다.

 

물려받았든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성취했든 상관없이 가진 것이 많은 자는 더 의욕을 내기 어렵다. 그보다는 포만과 권태에 빠져들기가 더 쉽다. 아니면 무모한 욕심을 부리기도 한다. 그렇기에 잘 생각해볼 때 나름 달성 가능한 목표를 가지고 있고 또 그를 위해 노력을 아끼고 있지 않으며 때론 뒷걸음질 치기도 하지만 그래도 조금씩은 그 쪽으로 향해서 꾸준히 접근해가고 있을 때 우리는 최고로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60년에 걸친 순환의 시간에 있어 그런 때, 즉 의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30년이고 좀 더 엄격히 말하면 15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한 번 살다가는 것이 그리 녹록하지 않은 것이다.

 

생각에 잠겨 글을 쓰다 보니 밤이 깊었다. 자칫 아침 해를 볼 수도 있을 것 같으니 서둘러 자야 하겠다.

넘쳐나는 시중 유동성

 

 

이번 코로나19 쇼크로 인해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전 세계 경제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증시는 불과 석 달 만에 코로나19 직전 상황까지 회복되었다. 실물 경제는 무척 어려운 상황인데 증시가 원상회복을 했다는 것은 현재의 증시가 실물 경제와는 꽤나 큰 괴리가 발생했음을 뜻한다. 외국인투자자들이 그렇게 팔았어도 국내 자금의 힘만으로도 너끈히 반등에 성공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서 부동산 시장 또한 여기저기에서 부풀어 오르면서 정부가 이를 막느라 애를 먹고 있다.

 

이 모두 시중에 유동성이 넘치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경기부양을 위해 정부와 한은이 돈을 엄청나게 풀어대고 있기 때문이다.

 

 

퇴물이 되어버린 전통적인 금융정책 수단

 

 

예전 같으면 시중에 돈이 넘치면 인플레이션 압력이 발생할 것이기에 한은은 당연히 금리를 올려서 그 유동성을 흡수해버릴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금융정책의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기본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시중에 돈이 넘치니 그 돈을 흡수한다거나 줄인다는 것은 그야말로 더 이상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경제상황인 까닭이다. 우리는 물론이고 글로벌 경제 전체가 그렇다.

 

1980년대 이후 글로벌 경제는 사실상 부채 증가 즉 통화량 증발을 통해 번영을 누려왔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미국 연준을 비롯해서 각국 중앙은행들은 사이사이 금리인상을 통해 경제의 거품을 꺼지게 하거나 누그러뜨리기도 했다.

 

그렇기에 금융당국자들은 경제 거품이 심해질 경우 금리인상을 통해 어느 정도 불경기를 조성함으로써 경제의 정상화가 가능하리란 생각을 가져오고 있었는데 이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종전의 전통적인 금융정책은 퇴물이 되고 말았으니 그 계기는 바로 2008년 미국 금융위기였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경제는 되돌릴 수 없는 선을 넘어섰다. 

 

 

사실 당시의 금융대공황 역시 처음엔 연준의 금리인상이 시발점이었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로 인한 부동산 거품이 더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2004년 연준은 금리인상을 단행했는데 바로 이게 도화선이 되어 결국 2008년 미국 금융위기가 발발했던 것이다.

 

당시 미국은 물론이고 글로벌 전체적으로 부채가 이미 너무나도 많아서 금리인상을 통해 버블을 종식시켰다가는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전체가 풍비박산날 수 있는 상황임을 감지했던 것이다. 이미 경제의 체질이 너무나도 나빠져 있었기에 금리인상은 시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돈을 더 풀어내기 위한 새로운 기술들만 속속 등장하고 있으니 

 

 

이에 새 연준위원장이 된 버냉키는 새로운 수법을 들고 나왔으니 바로 양적완화였다. 부채가 너무 많아서 위기에 처한 경제를 돈을 더 찍어서 막아버린 것이 양적완화였다. 양적완화는 그야말로 극약처방이었다. 그로 인해 일단 글로벌 경제는 그럭저럭 되살아났지만 그로 인한 부작용도 엄청나게 컸기 때문이다. (어쩌면 훗날 버냉키야말로 세계 경제를 확실하게 말아먹은 최악의 인물로 기억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부작용이란 다름 아니라 전 세계 경제가 돈의 홍수에 빠졌다는 점이다. 부채가 더 많아졌고 반면 생산성은 떨어지면서 글로벌 경제는 예전의 활력을 더 이상 회복할 수가 업었다. 오히려 디플레이션 위험이 감지될 정도였다.

 

물론 그 부작용을 잘 알고 있던 연준은 2015년부터 몇 년에 걸쳐 그간에 지나치게 많이 찍어낸 돈을 점차적으로 회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부진하던 글로벌 경제에 또 하나의 직격탄이 된 코로나19

 

 

그런데 금년 들어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경제를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 연준은 찍어낸 돈의 회수는 고사하고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앞서 근 6년에 걸쳐 찍어낸 양적완화와 동일한 액수를 시중에 추가로 공급한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연준의 경우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돈을 살포한 액수는 2014년까지 6년에 걸쳐 3조 6천억 달러였는데 이번 코로나 19에 대해선 불과 6개월 만에 3조3천억 달러를 찍어내어 시중에 살포했으니 그 속도에 있어 실로 유례가 없다. 그러자 미국 금융시장은 연준의 조치에 환호작약했다. 시중에 다시 돈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올 것이고 그러면 증시가 또 다시 반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연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간 영국의 탈퇴 등으로 존립기반이 끊임없이 흔들려오던 EU 역시 중앙은행인 ECB를 통해 그간에 풀어낸 양적완화를 또 다른 명목을 붙여 더 확대실시하고 나섰다. “팬데믹긴급매입프로그램”, 이니셜로 PEPP이 그것이다.

 

안 그래도 부채로 돌아가는 경제란 지적을 받아오던 글로벌 경제였는데 이제 어쩌면 더 이상 과거처럼 상황에 따라 금리를 올리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면서 경제를 조절하는 종전의 상태론 되돌아갈 수 없는 어떤 한계선을 넘은 것 같기도 하다. 이제 금리인상이란 것은 전 세계 경제가 일제히 동반자살하자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버린 셈이다. 금리인상? 큰일 날 소리가 된 것이다.

 

 

돈을 찍어내는 구체적인 방식 세 가지 

 

 

말이 나온 김에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이 실시하고 있는 돈 찍어풀기 정책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간단히 알아보자.

 

크게 세 가지 방식이다. 첫째는 금리인하인데 이제 더 이상 내릴 금리가 없어졌다. 그래서 두 가지 새로운 초식이 등장했으니 하나는 양적완화가 그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해서 “부채의 화폐화”라고 하는 어려운 용어를 쓰기도 한다. 다음으론 정부가 마치 헬리콥터에서 공중에 돈을 살포하는 방식과 같다고 해서 “헬리콥터 머니”라 부른다.

 

최근 우리 한은 역시 금리를 인하해서 사실상 제로금리가 되었지만 그마저 불충분하다 싶어 이번엔 국고채를 세 차례에 걸쳐 4조5천억을 매입했다. 이 역시 양적완화이자 소위 “부채의 화폐화”에 해당이 된다. 셋째 정부가 재난지원금이란 명목으로 광범위하게 돈을 살포했으니 이는 바로 “헬리콥터 머니”에 해당이 된다. 우리 역시 미국이나 EU, 일본이 해오던 방식을 조금씩이나마 다 손을 댄 셈이다.

 

부채의 화폐화, 실로 논란이 많은 주제이다. 정부 부채가 많아져서 문제가 되니 중앙은행이 정부의 빚을 탕감해주는 방식이다. 그럴 경우 GDP 대비 정부 부채의 수준이 줄어든다. 일종의 사기라고 하겠지만 엄연히 시행되고 있다. 결과적으론 중앙은행이 그 액수만큼 돈을 더 찍어내는 것이기에 양적완화와 같다.

 

“헬리콥터 머니” 또한 논란이 많다. 재난지원금은 1회성이었으나 최근 미래통합당의 김종인 대표가 먼저 주장하고 나서면서 이슈가 된 기본소득 제도가 만일 도입될 것 같으면 헬리콥터 머니가 항구화되고 제도화된다는 얘기가 된다.

 

“부채의 화폐화”라든가 “헬리콥터 머니” 방식은 과거에 전혀 사례가 없진 않지만 그래도 제2차 대전 이후론 자취를 감췄다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제로금리만으론 불충분하게 되자 또 다시 등장했다.

 

 

돈을 엄청나게 찍어내었어도 발생하지 않은 인플레이션 

 

 

부채의 화폐화라든가 헬리콥터 머니 등의 방식은 결국 시중에 돈을 더 많이 공급하기 위한 일종의 편법이다. 그런데 돈을 마구 찍어내면 당연히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기 마련이라고 그동안 알려져 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2008년 이후 양적완화를 했음에도 전혀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금융위기 이후 6년에 걸친 연준의 돈 찍어내기, 양적완화만 해도 종전대로라면 무려 500%의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는 메가톤급 조치였는데 사실상 인플레이션은 없었다.

 

이에 대해 여러 설명이 제시되고는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왜 인플레이션이 없었는지 실은 아무도 모른다고 해야 정상일 것이다. 유럽중앙은행의 양적완화 역시 마찬가지이고 일본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미 정부의 부채를 인수해서 탕감해주고 있기에 동일하다.

 

돈을 마구 풀었음에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자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연준은 자신감을 얻은 모양인지 불과 몇 달 만에 과거 6년간 찍었던 돈만큼을 신속하게 공급했다. 전광석화와도 같은 작전이었다. 이에 그간 상황을 지켜보던 한은 역시 돈을 찍어도 큰 문제가 없겠구나 싶었는지 소규모나마 ‘연준 따라하기’에 나섰으니 최근의 조치들이 바로 그렇다.

 

그런데 그렇다 해도 부작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 것이 우리의 경우 풍부한 시중 유동성 때문에 부동산이 들썩이고 있다. 이에 정부는 며칠 전 실로 과감한 세금정책을 통해 부동산을 억제하겠다고 나섰다. 정부로선 세수도 늘리고 부동산 잡는다는 명분도 있고 하니 대단히 즐거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증시 역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실물경제와 유리된 상태에 급반등한 증시는 현 상태만으로도 이미 거품이라 하겠지만 이게 장차 하락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힘을 받아서 거품을 더 키우면서 상승해 갈 것인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다. (거품이란 말은 언젠가 소멸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란 점 알려드린다.)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 그 누구도 모르는 새로운 세상

 

 

아무튼 현실은 금융위기에 따른 돈 찍어 풀기에 이어 이번 코로나19로 인한 초단기간의 돈 찍어내기가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이게 장차 어떤 작용을 하게 될 진 사실 아무도 모른다. 글로벌 경제를 어디로 몰고 갈 지 전혀 알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잘 모르지만 어쨌거나 당장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시도해보는 행위를 무엇이라 해야 할까? 아마도 그런 행위를 두고 도박이라 하는 것이 온당할 것 같다. 따라서 지금 전 세계 중앙은행들과 정부들은 일제히 도박에 나선 셈이다.

 

도박의 결과? 현 시점에서 나 호호당은 물론이거니와 경제에 해박한 그 누구도 모를 것이라 장담한다. 이런저런 수치를 잔뜩 늘어놓으면서 어려운 얘기를 하는 경제학자나 전문가들 그리고 정책 당국자들 역시 모를 것이라는데 베팅한다. (전문가라고 하는 입장에서 질문을 받으면 이리저리 돌려 말하는 수밖에 더 있으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글로벌 경제가 미증유의 불확실한 환경으로 크게 한 걸음 들어섰다는 점이다. 되돌아갈 길은 없다. 독을 독으로 막는다는 말처럼 부채가 많아서 생긴 문제를 더 많은 부채로 막더니 이번 코로나19로 인해 또 다시 더 많은 부채로 막고 있으니 이를 항간에선 돌려막기라고 하던데 목하 글로벌 경제는 글로벌 스케일의 돌려막기에 나서고 있다.

 

이 글은 결과적으로 장차 초래될 상황이나 결과에 대해 답은커녕 힌트도 드리지 못하는 글이 되고 말았으니 그저 미안한 일이고 재미없는 일이다. 현금의 글로벌 경제는 예전에 없던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는 말만 드리면서 글을 맺는다.

 

독자들의 쉬운 이해를 위해 나 호호당이 여러 날에 걸쳐 글을 몇 번이고 고쳐 쓰다 보니 당초 지난 일요일에 올리려던 글이 늦어졌다. 그만큼 고생했다는 점 독자들께서 알아주셨으면 참으로 고맙겠다.

 

영화음악의 거장 세상을 떠나다.

 

 

영화음악의 거장인 엔니오 모리코네가 어제 6일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웨스턴 영화 “황야의 무법자” 를 보고 받았던 감동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특히 영화음악의 박진감 가득한 신비한 소리에 뻑 간 바 있다. 나중에 그 곡을 만든 이가 ‘엔니오 모리코네’란 특이한 이름의 이탈리아 음악가임을 알게 되었다.

 

유튜브에서 다시 들어보았다. 여전히 멋지다. 음악과 함께 말을 달리는 느낌이 여전히 환상적이다.

 

조금 더 얘기하면 2008년 김지운 감독의 여름의 흥행작인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란 영화는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 3편인 “석양의 무법자”란 영화의 원 제목을 그대로 따온 오마주란 점도 알려드린다. 내 개인적으로도 그 영화의 곡이 가장 압권이었단 생각이다. 여성 가수의 신비로운 소리가 사람을 전율시킨다.

 

국내 팬들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연이은 세부 영화 3편을 통해 모리코네란 이름을 뇌리에 새겼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사주를 통해 일생을 살펴보니

 

 

그러니 그의 사주를 한 번 살펴본다.

 

1928년 11월 10일 밤 10시 25분생이라 되어있다.

 

사주로 바꾸면 戊辰(무진)년 癸亥(계해)월 甲寅(갑인)일 乙亥(을해)시가 된다.

 

사주에 火氣(화기)가 없으니 그와 관련된 일을 하면 스스로 즐기고 열중하는 법, 영화는 오행 상 불의 기운이기에 음악을 해도 영화음악이 적성에 아주 잘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운세를 보면 甲午(갑오)년이 입추가 되는데 27세인 1954년과 87세인 2014년이 입추의 해였다.

 

아버지가 연주자였기에 일찍부터 음악과 접했던 모리코네는 1961년 秋分(추분) 무렵에 영화음악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추분은 그 사람의 재능과 역량이 현저하게 드러나는 때인 까닭이다.)

 

이어 그의 운세가 寒露(한로)에 이르자 드디어 황야의 무법자 시리즈의 음악을 맡아서 엄청난 흥행과 함께 명성을 날리게 되며 그 이후로도 무수히 많은 영화음악들을 작곡한다.

 

하지만 참으로 償(상)을 받는 복 즉 상복이 없었다. 예를 들면 아카데미 음악상의 경우 무려 5번이나 지명되었지만 상을 타진 못했고 훗날 2007년에야 명예음악상을 시상할 수 있었다. 이유는 그가 할리우드 사람들과 가깝지 않았기 때문이라 본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탈리아의 살던 동네를 떠나지 않았다. 아울러 그의 운으로 본다면 1984년 갑자년이 입춘 바닥이었기에 상복이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그가 영화음악의 귀재요 최고의 거장이란 사실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할리우드와 친하지 않았을 뿐이다.

 

1984년이 운세의 바닥이었지만 그의 타고난 재능만은 꾸준히 변함이 없었다. 운세가 저조한 기간 중에도 영화 ‘미션’이라든가 ‘시네마 천국’ 등등에서 서정성 넘치는 대단히 아름다운 곡을 꾸준히 선보였기에 천재이자 거장이란 평을 할 수 있다.

 

내 발로 걸을 수 있어야 사는 맛이 있는 법이니 

 

 

그는 2014년으로서 또 한 번의 입추를 맞이했는데 그만 올해 그만 대퇴골 골절상을 당한 것이 그만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91년과 8개월의 一期(일기)였으니 노화로 인한 사망이라 봐도 되겠다. (연세 많으신 분들이 대퇴골 부상을 입으면 대부분 그로 인해 돌아가신다.)

 

오래 사는 것 물론 좋지만 그 역시 자신의 두 발로 걸을 수 있을 때의 얘기이다. 이른바 運身(운신), 즉 내 몸을 내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느냐 여부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란 얘기이다. 엉덩이 근육과 허벅지 근육.

 

 

사람의 운세를 파악하는 것은 나 호호당에겐 아주 간단한 일이지만

 

 

나 호호당은 생년월일시만 알아서 사주를 뽑고 나면 3초 정도면 그 사람의 평생 운세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자연순환운명학을 연구해오는 과정에서 위키와 구글을 통해 지금까지 아마도 12만 명 정도의 사주를 그 사람의 프로필과 대조하면서 분석해왔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사람의 60년 순환에 있어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입춘 연도만 알 것 같으면 나머진 24절기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 즉 운의 변화를 추단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그런 글을 쓰다 보니 가끔 독자들 중에는 자신의 입춘이 언제인가를 알고 싶다는 요청 메일이 오곤 한다.

 

그런 요청에 대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응하지 않는다. 입춘 연도만 알면 전체 운을 알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독자가 하기 때문인 것 같은데 실은 24절기에 따라 나타나는 변화를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입춘 연도만 아는 것은 도움이 전혀 되지 않거나 더러는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기에 그렇다.

 

 

알고 보면 평생 고생이 따르는 것이 삶일진대

 

 

삶의 과정을 냉정히 분석해보면 끊임없는 고생이다. 운이 상승한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생산을 하고 있다는 말이고, 운이 하락한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생산이 끝나고 이제 쉬는 때라 보면 아주 정확하다.

 

그런데 생산이란 것은 당연히 수고가 곁들여져야 하는 것이기에 고단함이 수반된다. 생산이 끝나고 쉬게 되면 수확의 기쁨은 잠시인 것이고 그 이후론 허허롭고 재미가 없으니 그 또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니 사실 삶의 전체 과정 자체가 고생인 것이다.

 

가령 우리나라 역시 그렇다. 2012년으로서 국운의 생산이 사이클이 종료되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도 잘 사는 나라가 된 것은 분명한데 미래가 불투명해졌고 특히 젊은이들의 좋은 일자리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먹고 사는 것은 해결이 된 것도 같은데 장차의 희망이나 비전이 별로 없고 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운의 하락 과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나라가 생산 사이클에 있을 때엔 즐거웠을까 하고 회고해보자. 1982년부터 본격 생산 사이클로 접어든 우리나라였는데 도중에 무수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성장해왔다. 어려운 일이 많았으니 그 역시 힘들었다.

 

 

운세만 안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닌 까닭

 

 

그렇기에 상담을 통해 나 호호당이 오신 분에게 알려드리고 도움을 드리고자 하는 것은 운의 흐름도 중요하지만 30개월씩 즉 24개의 단계에 걸쳐 변화해가는 60년 순환에 있어 저마다의 타고난 성격 특성에 따라 앞으로 있을 수 있는 위기에 대해 미연에 방지하도록 하기 위해 나름의 충고를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 여긴다.

 

특히 이제 물러날 때인지 아니면 어려워도 용기를 내어 과감하게 앞으로 나아갈 때인지, 인생 전체에 걸친 진퇴의 시기와 그 원인에 대해 얘기해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충격을 받고 맥이 풀려서 

 

 

그런데 충격적인 일이 발생했다.

 

글 쓰는 도중, 새벽 1시 경에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박원순 시장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고 하는 놀라운 뉴스를 접했다. 많이 놀라게 된다, 충격이다. 짐작컨대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 분의 생년월일이 호적과 다르고 또 음력 양력 여부를 정확히 모르고 있기에 함부로 말하진 않겠다.

 

다만 한 가지 생각이 들긴 한다. 현 정권의 주요 인사들 상당수가 그다지 좋지 못한 일에 휘말려서 어려움에 처하고 있다는 점이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를 시작으로 해서 그렇다. 이러다가 자칫 서울시장과 경기도 지사, 경상남도 지사, 부산시장의 자리를 놓고 일제히 보궐선거를 치러야 할 참이다.

 

글을 쓰다가 생각을 돌려 왜 갑자기 이런 일이 빈번할까? 하는 쪽으로 생각이 가다 보니 갑자기 맥이 풀린다. 그냥 전체를 삭제해버릴까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올리기로 한다. 오늘 글은 그런 면에서 미완의 글이라 하겠다.

참으로 없던 일이 벌어졌으니 

 

 

외국인들이 주식을 사지 않는데 개미들의 매수에 힘입어 증시가 많이 올랐다. 종전에 없던 일이다. 우리 증시는 외국인이 사면 오르고 팔면 내리는 것이 거의 20년 동안 이어져온 양상인데 이번 코로나19 이후의 증시 양상은 정반대이다.

 

외국인들은 연일 팔았고 기관들은 중립 코너인데 개인 매수세에 힘입어 코로나19 직전인 2월의 주가수준으로 회복되었으니 종전에 없던 일이고 한편으론 기이한 일이다. 그러자 나름 경제채널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소위 증권 전문가란 사람들이 이를 두고 ‘동학개미운동’이라 부추기고 나섰다.

 

아무튼 외국인은 여전히 주식을 매수하지 않고 있다. 사지 않다 보니 원/달러 역시 1200원 이상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 외국인 자금이 국내로 들어와야만 달러가 약세로 갈 터인데 매수는커녕 매도하고 있으니 그럴 수가 없다.

 

현재 상황은 미국 연준이 미국 국채를 매입하는 형식으로 달러를 풀고 있다. 그러자 글로벌 유동성들은 가장 안전한 미국 국채 매입으로 몰려가면서 달러가 여전히 강세를 보이고 있다. 달러를 많이 푸는 데도 불구하고 그러니 아이러니이다. 하지만 결국 이런 현상은 향후 글로벌 경제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라 하겠다. 글로벌 경제가 불안하면 안전 자산인 달러라든가 미국 국채에 대한 수요가 커진다.

 

 

고민이 깊어가는 동학 개미들

 

 

그렇다 치고 최근 일반 투자자들 즉 동학개미들의 고민이 깊어가고 있다.

 

개미들의 매수세만으로는 앞으로 증시가 계속 상승할 것 같진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쯤에서 그간에 매수했던 주식을 팔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눈앞의 증시가 하락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고 더 결정적인 점은 이제부터라도 그간에 매도로 일관했던 외국인들이 매수세로 돌아서면 그야말로 지금부터 증시가 더욱 오를 수 있다는 기대감을 저버릴 수 없다는 점이 있다.

 

그간에 이른바 V자 형태의 반등을 보였으니 이젠 슬슬 이익을 취할 때가 된 것도 같고 또 이제 더 오르기가 쉽지 않다는 점 누구나 생각하면서도 반대로 외국인들이 본격 매수에 나설 경우 전혀 다른 얘기가 된다는 점이다.

 

지금부터 외국인 매수세가 돌아온다면 지금 팔아치우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수익 기회를 날리는 바보짓이 될 것이니 지금의 상황에 대해 개미 투자자들은 팔기도 그렇고 또 사기도 그런 애매한 형국에 처해 있다. 즉 간을 보고 있다.

 

이게 바로 최근 우리 개미들의 고민이다.

 

 

고민하는 개미들을 위한 힌트 또는 조언

 

 

그렇기에 오늘은 바로 이런 개미들의 고민에 대해 힌트가 될 수 있는 얘기를 하나 해드릴까 한다.

 

나 호호당은 1985년부터 증시를 해왔다. 35년 경력이니 적은 세월이 아니다. 그간에 벌기도 했고 잃기도 했다. 외국인들이 우리 증시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92년부터이니 이제 28년이 되었다.

 

그간 지켜본 바에 따르면 기관도 그렇지만 외국인 투자자들 역시 개인이 아니라 시장에서 이골이 난 ‘꾼’들이란 점이다. 그런데 꾼이 괜히 꾼이겠는가? 주식에서 돈을 벌려면 쌀 때 사서 비싸게 팔아야 하는 법인데 이제 증시가 회복될 만큼 회복된 시점에서 그냥 단순하게 주식을 사들인다? 만일 그럴 것 같으면 그건 정말이지 꾼의 자격이 없다.

 

지금 시장상황은 2월말부터 외국인들이 지금까지 20조원 이상에 걸쳐 거의 줄곧 주식을 매도했는데 그걸 가격이 다시 2월말 시점까지 회복한 현 시점에서 그냥 비싸게 사주겠느냐 하는 얘기이다.

 

2200 포인트에서 1440포인트까지 팔았으니 단순평균해서 1820포인트 정도에서 팔아치운 주식을 이제 2150포인트 선부터 다시 채우고자 한다면 사는 과정에서 주가가 오를 것이다. 이에 가령 2500까지 오른다 하면 그들의 평균 매수단가는 낮게 잡아도 2300포인트 정도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1820에서 판 주식을 2300에서 다시 산다면 무려 26%나 비싸게 되사는 꼴이니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손해가 될 것이고 그들이 손해를 본만큼 동학개미들에게 그만큼의 수익을 안겨준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니 시장에서 이골이 난 그 꾼들이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느냐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그건 꾼의 자격이 없다. 오랜 기간 동안 나 호호당이 지켜본 바에 의하면 그들은 어쨌거나 쌀 때 사더라는 점이고 오른 다음에 팔았다는 점이다. 이 점 하나만큼은 불변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환경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

 

 

이에 외국인 투자자들이 그간에 팔아치운 주식을 다시 채우려 할 것 같으면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일단 이제부터라도 서서히 매수 환경을 만들기 위한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 본다.

 

우리 기관을 포함해서 외국인들이 바라는 매수환경이란 결국 증시가 또 다시 하락했을 때 조성이 된다. 그냥 이 가격대에서 단순하게 사들인다는 것은 동학개미들만 즐겁게 해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이 무서운 것은 그들은 의도적으로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외국인들은 우리 증시를 올리고자 할 것 같으면 국내외 매체를 통해 우리 경제나 증시에 우호적인 뉴스를 흘리도록 할 수 있고 그 반대로 내리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나쁜 뉴스를 만들어내고 유통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 뉴스는 겉으로 보기에 전문가들의 분석과 평가를 통해 만들어지기에 높은 개연성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그 역시 큰 그림에서 보면 하나의 거대한 작전이고 조작이라 봐도 절대 무방하다.

 

 

핑계야 만들어내기 나름인 것이니 

 

 

최근 수급이 펀더멘털을 앞서고 있기에 기업들의 실적보다 주가가 더 높이 올랐다는 말들을 한다. 수급에 앞서는 재료 없다는 말이 그것이다. 하지만 외국인들이 저들의 매수 시점을 만들기 위해 정말이지 글로벌 전체적으로 소식을 만들어내고 또 풍부한 자금력을 통해 선물매도나 여타 방법을 동원할 것 같으면 얼마든지 그럴 듯한 이론 또는 설득력 있는 여론 조성을 해낼 수 있다.

 

이에 주가가 내리고 나면 역시 주가는 펀더멘털을 따라간다는 말을 할 것이고 개인들 즉 개미들이 다 팔고 나가면 또 다시 다른 핑계를 만들어내면서 서서히 조심스럽게 주가를 올려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외국인들이고 이에 그 눈치를 차리고 동조에 나서면서 동반 매수에 나서는 것이 국내 기관 투자자들이다.

 

그들이 매수하는 동안엔 절대 좋은 뉴스나 소식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매수하다가도 다시 악재를 만들어서라도 대거 팔아 치우고 우리 시장에서 떠날 것 같은 시늉을 내는 등 다양한 심리 작전을 반복하면서 끌어올리기에 개미들은 섣불리 매수에 나서지 못한다.

 

 

결국 고급 야바위꾼이라는 점 

 

 

겁을 줘서 싸게 사고 비위를 맞추면서 비싸게 팔아 수익을 챙긴다. 결국은 이게 바로 나 호호당이 1992년부터 지켜온 바의 외국인 투자자들의 방식이다. 좋게 말해서 꾼이고 나쁘게 말하면 고급 야바위꾼들이다.

 

그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요 경제를 분석하는 능력이 그다지 탁월한 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은 글로벌 전체를 움직여가는 미국 증시와 연결되어 있고 국제적인 경제 연구소들로부터 보다 빠른 정보를 입수할 수 있으며 아울러 매체를 글로벌 차원에서 조작 혹은 조종할 수 있는 능력, 여기에 풍부한 자금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우리 증시에서 그동안 수익을 낼 수 있었다는 것은 결국 우리 증시에 참가하는 개미들의 돈을 우려내고 앗아내었다는 말과 전혀 차이가 없다.

 

 

당장은 동학 개미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 같지만 

 

 

당장은 동학 개미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외국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어떤 계기를 만들어서 또 다시 칼자루를 되찾아갈 수 있는 궁리를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좀 더 부연하면 그들이 코로나19로 인해 암울한 뉴스가 마구 나올 때 거침없이 주식을 팔아 치웠다는 것은 그 주식을 나중에 얼마든지 채워 넣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그래서 마치 바보처럼 근 석 달에 걸쳐 기계적으로 팔아치울 수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당장은 싸게 팔지만 나중에 얼마든지 그 가격보다 더 저렴하게 매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외국인들이라 봐도 무방하다는 말이다.

 

그런 까닭에 올 하반기 증시는 상승할 가능성보다는 거꾸로 하락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이유는 경제적 전망이 하반기에 부정적이라거나 기타 수많은 지수나 변수들을 예측해서가 아니라 외국인 그들이 그간에 싸게 팔아치운 주식을 매도한 가격 또는 그보다 더 저렴하게 매수할 수 있는 환경을 그들이 만들어낼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개미가 중시에서 수익을 올리는 방법이란 

 

 

일반 개미 투자자들이 증시에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볼 때 세 가지 길이 있다고 여긴다.

 

첫째는 정상적인 성장주나 대형주를 본인의 실력으로 샀든 운으로 매수했든 어쨌거나 좀 수익이 났다 싶으면 팔고 빠져나오는 방법이다. 꾹 참고 들고 간다? 그게 참으로 어렵다.

 

둘째로 주변 개미들의 행동이나 생각과는 철저하게 정반대로 행동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기회를 엿보는 방법인데 이게 바로 개인 고수들의 영역이다.

 

마지막으로 외국인들이나 기관이 잘 쳐다보지 않는 마이너리그의 소형주나 작전주를 잘 연구해서 개미들끼리 치고받으면서 수익을 올리는 방법이다. 경력이 있는 개미들은 이쪽에 능하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다.

 

(코로나 때문에 수강 신청에 아직 여유가 있다는 점 알려드린다. 크게 무리가 없는 갖춘 강의장 환경이란 점 다시 한 번 알려드린다.)

강의 중에 나온 질문

 

 

토요일 강의 중에 한 분이 질문을 했다. 삶에는 60년에 걸쳐 1년 사계절 24절기와 같은 운의 변화와 흐름이 있다는 것은 알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운에 따라 어떻게 사는 것이 좋겠느냐는 질문이었다.

 

12회에 걸친 기초 강좌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라 그 분의 질문은 무척이나 적절했다. 살아가면서 자신의 운을 모르고 있다면 헷갈릴 수도 있고 더러 실수도 할 수 있겠지만 강좌를 통해 60년에 걸쳐 운의 변화가 있다는 것을 이해했고 나아가서 본인이 처한 운세가 지금 어떠한지 알았다면 그에 맞추어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겠느냐는 질문이었으니 참 적절한 질문이었다.

 

 

내 님의 사랑이 철따라 흘러가듯이 

 

 

기분이 좋아진 나는 미소와 함께 답변을 하기 시작했다.

 

“내 님의 사랑은 철따라 흘러간다”, 뭐 그런 노래가 있지요. (곡명은 “내 님의 사랑은”이고 양희은 씨가 불렀던 노래로 기억한다.) 그처럼 철따라 살면 됩니다, 하고 답변했다.

 

그러면 철따라 산다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에 대해 얘기를 하면 되겠네요, 하는 말로 운을 떼고 이어서 설명을 시작했다.

 

철이란 말은 원래 24절기할 때의 절기를 줄여서 절이라 하고 다시 그를 철로 바꿔 쓰는 말이다. 철은 節氣(절기)의 節(절)인 것이다.

 

 

철들라는 말

 

 

어려서 공부 열심히 하지 않고 노는 데만 열중하는 아이에게 흔히 부모님들이 야, 너 철 좀 들어라 하는 말, 들어보셨을 것이다. 철이 든다는 말을 국어사전에선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할 줄 알게 되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사실 “철들다”는 말의 意譯(의역)이다.

 

철이 든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가을이 되면 가을에 맞추어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말이다. 물론 겨울이 되면 겨울에 맞게끔 산다는 뜻이 되겠다.

 

그런데 사실 부모님들의 철들라고 하는 주문은 계절 중에서도 유독 가을철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바람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 부모님들의 욕심이다.

 

 

철들라는 말 또한 부모님들의 과한 바람이어서 

 

 

한 해 사계절 중에 가을은 날씨도 선선해서 지내기 좋고 동시에 결실의 계절이어서 가장 풍요로운 때이다. 따라서 부모님들이 자녀에게 철들라고 요구하는 그 말은 사계절 중에서 가을철처럼 결실을 거두는 사람이 되라는 말, 뭐든 자신의 할 일은 야무지게 챙기면서 내실 있게 사는 사람이 되어달라는 말, 즉 성숙한 사람이 되어달라는 말이라 하겠다. 그렇기에 그건 다분히 부모님들의 욕심인 것이다.

 

 

철 없이 지내는 것 또한 실은 철따라 사는 것이기에 

 

 

알다시피 한 해엔 사계절이 있는 것이니 자녀가 때론 힘든 봄철의 모습을 보일 때도 있을 것이고 때론 욕심 등등한 여름철의 모습, 그리고 가을을 지나 겨울처럼 내성적이고 사색적인 모습을 보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계절 중에 가장 영양가가 높은 가을철만 주문한다는 것은 좋게 말해서 바람이고 노골적으로 말하면 욕심인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장난기도 별로 없고 덤벙대지도 않으며 그저 생각이 깊은 말이나 행동을 주로 한다고 하자. 이 경우 사람들은 저 애는 애어른 같다는 표현을 쓴다. 하는 짓이나 생각이 어른 같은 아이를 일러서 하는 말이다.

 

그런 경우 그 아이의 사주를 보지 않아도 운세가 겨울이라 판단해도 거의 틀림이 없다. 그건 겨울의 모습인 것이다. 물론 타고난 성격이 그런 아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 아이의 운세 변화가 60년에 걸쳐 사색하는 계절인 겨울을 보내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 대목에서 어떤 아이가 학교에서 말썽만 부리고 더러 싸움박질을 자주 해서 문제아가 된다거나 반대로 왕따가 되어 지내고 있다면 그런 아이들은 운세가 바닥 또는 봄을 지내고 있다면 그야말로 정확하다. 15년에 걸친 봄.

 

그리고 어떤 아이가 의욕 혹은 욕심도 많고 열심히 하면서 전투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 아이는 15년에 걸친 여름을 보내고 있다고 보면 그 역시 정확하다. 또 아이가 성적도 좋고 총명해서 좋은 학교에 진학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면 그 아이는 현재 결실의 계절인 가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더 얘기하면 어려선 공부도 잘하고 똑똑했는데 이상하게 고등학교 진학하면서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다면 그 아이는 가을을 지나 운이 겨울로 접어든 셈이다.)

 

그런가 하면 중학교까진 열심히 하긴 해도 성적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는데 고등학교 가면서 더 발전해서 좋은 대학이나 또는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면 그 학생은 이제 가을로 접어든 것이다.

 

 

사람을 판단하려면 삶 전체를 보고난 뒤에 

 

 

이처럼 사람은 타고난 능력과 성격도 있지만 운의 변화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가령 학교 시절엔 영 아니었는데 사회 진출 후 크게 성공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 역시 중년에 운이 가을을 맞이한 사람이라 보면 정확하다. 그렇기에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그 사람의 전체 삶을 지켜보아야 한다. 이 모두 실은 운의 작용 때문이라 하겠다.

이제 원래의 질문으로 되돌아가보자.

 

 

자신의 처한 운을 알고 있다면 그건 네비를 장착한 것과 같아서 

 

 

스스로 처한 운을 알고 있다면 그건 삶의 항해 지도 또는 네비게이션 컴퓨터, 줄여서 ‘네비’를 장착한 것과 같아서 실로 큰 효용가치가 있다 하겠다.

 

어떤 이유로 크나큰 효용가치가 있는가? 하면 운의 계절과 철에 맞추어 살 것 같으면 인생의 큰 좌절이나 실패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쉬운 일만은 아닌 것이 사람에겐 젊은 시절 남성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기에 자칫 지나치거나 과격하기 쉬운 탓이다.

 

 

알고 보면 호운도 없고 악운도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운이란 것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고 또 그런 까닭에 好運(호운)과 惡運(악운)을 얘기하지만 실은 그런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악운이란 것은 그 사람의 운 즉 철에 맞지 않는 생각이나 행동을 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런 것이 있다고 여기는 것에 불과하다. 운이 한 여름이면 상황이나 환경이 힘들어도 과감하게 앞으로 나아가면 성공할 것이요, 아무리 객관적으로 좋은 상황일지라도 운이 한 겨울이면 반대로 처참하게 실패하게 될 것이다.

 

스스로의 운을 알아서 지금 운이 봄이라면 준비하는 때이기에 미래를 보면서 힘을 기를 때인 것이고 여름이라면 용기를 내어 힘껏 원하는 바를 향해 과감하게 전진해야 한다, 운이 가을이라면 모든 일이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질 것이요 겨울이라면 그간의 성취를 되돌아보면서 이젠 여유롭게 쉴 때인 것이다.

 

 

운을 알 것 같으면 삶의 운행지도를 얻은 셈이라서 

 

 

이처럼 60년에 걸친 운의 사계절만 알아도 이처럼 잘 대처를 할 수 있을 것이니 그를 24개의 단계 즉 24절기까지 사전에 미리 알고 있다면 사실 상세한 삶의 운행지도를 얻은 것과 같다.

 

역사상의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때 즉 운을 잘못 판단하는 바람에 비극으로 끝나거나 실패로 생을 마쳤다.

 

 

운을 모르는 탓에 자초한 비극

 

 

이에 간단하게 예를 하나 들어보자. 천하영웅이자 상승의 장군 나폴레옹은 1812년에 60만 대군을 휘몰아 러시아 원정을 떠났다가 무참하게 실패했다. 당시 나폴레옹의 운은 해마다 11월 하순이면 찾아드는 小雪(소설)의 운이었다. 그 바람에 그는 퇴위하게 되고 지중해의 엘바 섬으로 귀양을 가야 했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만일 나폴레옹이 자신의 운을 알아서 현실을 받아들였다면 사실 그 이후 오래 살면서 유럽 사교계의 명사로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말이 귀양이지 한때 적대국이었던 유럽 강국들은 나름으로 나폴레옹의 위신과 명성을 인정해주었기에 작은 섬 엘바 섬에서나마 왕으로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처지를 인정할 수 없었고 그 바람에 섬을 탈출해서 또 다시 풍운을 일으켰다. 이때가 1815년, 당시 그의 운은 12월 초의 大雪(대설)이었다. 대설의 운이면 이제 겨울이 본격화되었으니 마음을 편히 먹고 지난 날을 회상하면서 지냈으면 아무 탈도 없었을 것을 그만 참지 못하고 일을 치고 말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워털루에서 비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에 다시는 유럽으로 돌아올 수 없는 남대서양의 절해고도로 떠나야 했고 그곳에서 철저한 감시를 받으며 우울하게 살다가 6년 뒤인 1821년 병에 걸려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지위도 명예도 집안도 그리고 몸도 다 망치고 말았던 것이다.

 

만일 그가 자신의 처한 운을 알았더라면 능히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 여긴다.

 

 

운에 맞추어, 철에 맞추어 살면 가장 잘 살 수 있다는 얘기

 

 

그런데 이는 비단 영웅호걸들만의 얘기가 아니란 점이다. 보통 사람의 삶도 본질적으론 전혀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운세 변화를 알 것 같으면 운에 맞추어 살면 된다. 운에 맞추어 산다는 것은 운명의 주어진 철에 따라 살면 된다는 얘기와 같다.

 

우리 모두 철따라 흘러갈 수 있다면 바로 그게 가장 잘 사는 것이란 점을 얘기하고 싶어서 오늘의 글을 썼다.

찰나간에 생멸하는 세상

 

 

찰나란 말이 있다. 한자론 刹那이고 고대 인도의 ‘ksana’라고 하는 시간 단위를 한자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발음은 ‘크싸나’가 아니라 ‘싸나’라고 더 가깝다.)

 

찰나는 고대 인도에서 가장 짧은 시간 단위로서 지금의 시간으로 바꾸면 1초의 75분의 1일, 즉 0.013초가 된다.

 

刹那三世(찰나삼세)란 말도 있다. 현재의 찰나를 현세(現世)로 하고 그 앞뒤의 찰나를 각각 과거세(過去世)와 미래세(未來世)로 해서 삼세란 것이다. 다시 얘기하면 0.013초 전이 과거, 지금 0.013초가 흐르는 시간이 현재이며 그 다음 0.013초 뒤가 미래란 것이다.

 

가령 당신의 과거는 어떠했나요? 하고 물으면 0.013초 찰나 전의 과거 말인가요? 하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웃긴다.

 

힌두 철학에 바탕을 둔 불교 철학에선 刹那生滅(찰나생멸)이란 말도 한다. 매 찰나, 즉 0.013초마다 생겨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 역시 늘 그대로 있는 것 같지만 매 찰나마다 사라지고 생겨나고를 반복하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無常(무상)속에서 치열하게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닌 것이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들은 생각보다 빨리 죽고 태어나고를 반복하면서 교체된다. 간세포나 혈액 세포는 150일이면 싹 다 바뀌고 피부의 세포는 2-4주면 다 교체되며 허파를 이루는 세포들은 1년이면 모두 갱신된다고 한다. 심장이나 뇌의 세포들은 갱신되지 않지만 그를 이루는 단백질 단위에선 끊임없이 바뀌고 있다. 우리는 매 순간 바뀌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뇌는 부단히 변하는 우리 스스로를 동일한 개체로서 통합시켜 가고 있기에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동일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실은 모든 것이 늘 사라지고 늘 생겨나기에 일정하고 恒常(항상)된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그를 불교에선 無常(무상)이라 한다.

 

 

시간은 상대적이어서 

 

 

시간, 즉 때의 간격은 대단히 상대적이다. 그렇기에 힌두 철학에서 말하는 대단히 긴 시간, 거의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永劫(영겁)이라 하지만 그 또한 보다 더 긴 시간에 비하면 찰나일 수도 있다.

 

1劫(겁)의 시간은 43억 2천만년인데 이건 우주의 창조신인 브라흐마에게 있어 하루라고 한다. 브라흐마가 하루를 보내면 43억 2천만 년이 흐르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재미있는 계산을 해볼 수 있다.

 

사람의 하루는 86,400 초이고 브라흐마의 하루 즉 1겁은 43억 2천만 년이다.

 

우리가 하루를 보내면서 느끼는 감각을 브라흐마가 하루인 43억 2천만년을 보내면서 느끼는 감각과 같다고 가정하면 창조신인 브라흐마에게 1초는 우리에게 무려 5만 년과 같다. 5만년을 1초로 느끼는 브라흐마에게 있어 1찰나는 우리에게 666년이 된다. 그러니 그 사이에 생겨나고 사라지고가 무수히 가능해진다.

 

 

우리를 좌절케 하는 힌두 철학

 

 

힌두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좌절케 한다. 본래 의도부터가 그런 것 같다. 우리가 살면서 중요시하는 그 어떤 것도 실은 아무 것도 아니고 찰나의 일도 아닌 그저 허망한 찰나 안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생멸의 일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준다.

 

우리에겐 나름 길고 긴 인생, 그래서 인생길이라 우리들이 부르는 삶 전체가 창조신인 브라흐마에겐 1 찰나의 시간도 되지 않는다니 말이다. 기껏 100년도 살지 못하는 네가 잘 살든 못 살든 내겐 아무런 의미도 없단다, 라고 브라흐마가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고대 인디아의 사상과 철학, 즉 힌두 철학이 이처럼 엄청난 규모의 숫자와 시간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제로 즉 零(영)을 일찍부터 사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힌두 철학에 있어 劫(겁)이란 시간 단위 역시 가장 큰 수가 아니었다.

 

1겁이 43억2천만년인데 그래봐야 4.32 곱하기 10의 9 제곱에 불과하다. 힌두 철학의 가장 큰 수인 無量大數(무량대수)는 10 뒤에 제로를 무려 68개나 붙이는 수, 10의 68제곱수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1920년에 와서야 미국의 한 수학자, 정확히 말하면 그 수학자의 9살 난 조카에 의해 10의 백 제곱이 되는 수인 구골(googol)이 만들어졌다. 참고로 미국의 인터넷 검색엔진 업체 구글(Google)은 처음에 구골(Googol)로 등록하려던 것이 실수로 잘못 표기한 탓에 그렇게 되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 찰나의 연속이지만 어떤 존재에겐 영겁과도 같은 시간일 수 있으리라. 우주의 창조신인 브라흐마에게 하루가 우리에겐 43억 2천만년인 것처럼 말이다.

 

 

시간, 절대적이면서 상대적인 것

 

 

강아지들과 살다보니 때론 관찰하게 된다. 우리 막내 강아지 ‘바리’는 밤이 되면 형이 귀가하기를 기다리며 현관 앞을 마냥 지키고 있다. 저 놈에게 기다리는 그 시간이 꽤나 길게 느껴질 터인데 어쩜 저렇게 하염없이 꼼짝도 않고 기다리고 있을까나? 참 신기하기도 하다는 생각을 한다. 개는 수명이 사람보다 훨씬 짧기에 1시간의 느낌이 우리 인간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질 법도 한데 말이다. 개는 인내심이 강하다. 그만큼 멍청하기도 하다.

 

어린 초등학교 시절 매일 아침마다의 조회 시간, 교장 선생님의 말씀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가을 학기 개학하는 날, 학교로 향하면서 겨울 방학은 영겁 저편에 있는 것 같은 암울함 또는 절망감을 느낀 기억도 선명하다. 주말의 토요일과 일요일은 너무나도 짧고 주중의 날들은 왜 그리도 길기만 하던지.

 

시간이란 그렇기에 실로 묘한 놈이다.

 

간절하게 소식을 기다리는 자에게 一刻(일각), 15분의 시간이 三秋(삼추), 3년이란 말도 맞는 말이고 보고픈 연인을 저녁에 만나 사랑을 나누며 새벽을 맞이한 커플에게 그 하룻밤의 시간은 一刻(일각)일 것이다.

 

살다가 힘든 고비를 만나 힘들 땐 1년이 천년 같아서 이 세월 어서 가라 하는 말과 생각을 무수히 되뇐다. 사실이다. 반대로 영화의 세월은 10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래서 시간은 절대적이면서 상대적이다. 시간의 길이와 간격은 대단히 정확하게 측정될 수 있는 물리학의 단위이지만 우리의 시간에 대한 감각은 지극히 상대적이기에 그렇다.

 

 

나 호호당은 시간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나 호호당은 운명을 연구해온 사람이고 따라서 시간을 연구해온 사람이기도 하다. 그 사람이 처한 자연순환의 週期(주기)에 따라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내가 중요하게 살피고 내다보는 주기는 60년 간격이다. 왜냐면 우리의 삶이 대략 85년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론 며칠이 중요할 때도 있기에 60일 간격의 주기를 살피기도 하고 때론 60개월의 주기에 따라 일을 살피기도 한다. 나라의 경우 60년보다 때론 360년의 주기가 더 중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週期(주기)라든가 시간의 길이는 그다지 중요하지가 않다. 시간은 절대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현재 극심한 고생을 겪고 있는 이에게 장차 15년만 지나면 많이 편안해 지리라고 답변해줄 때도 있다. 이에 상대방은 15년이라고요? 그땐 다 살았을 터인데 그 때가서 편안해지면 뭘 해요! 하고 어이가 없다는 식으로 되묻는 이도 있다.

 

그런 상대를 보면서 난 속으로 그래봐야 한 계절 지나가는 것에 불과한데요, 하는 생각을 한다. 60년 순환을 사계절로 하면 15년은 한 계절이 된다. 또 그 15년은 666년을 1 찰나로 느끼는 절대자 브라흐마에게 있어 시간이라 할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여름날 저녁 하루살이를 바라보면서 때로 측은함을 느끼기도 한다. 정말 이슬과도 같은 삶이니. 그런데 우리의 삶, 길어야 100년의 삶은 브라흐마에게 있어 하루는커녕 1찰나의 1/6도 채 되지 않는다, 우리를 보면서 브라흐마가 측은함을 느끼기라도 할까?

 

눈앞의 시간이 너무나 힘들어서 암울할 때도 있다.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힘든 시간의 暴壓(폭압)으로부터 견디게 해주고 또 맞설 수 있게 하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

 

 

망각, 시간에 맞설 수 있게 하는 강력한 무기

 

 

그 무기는 바로 忘却(망각)이다.

 

망각이란 개인의 장기 기억에 저축한 지식이나 정보를 상실하는 것이다. 오래 전의 일일수록 기억을 더 급속도로 많이 상실한다고 한다. 망각은 사실 우리를 편안하게 해준다. 삶에서의 마찰과 실패, 갈등과 같은 스트레스들을 지워주기 때문이다. “세월이 약”이란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실연한 후 오래 되면 그 상처도 잊히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런 까닭에 제 아무리 힘든 시간도 삶도 살다보면 살아진다.

 

올 해로서 만 65세가 된 나 호호당이 살아온 모든 생을 뒤돌아볼 것 같으면 순간에 지나쳐간다. 65년의 세월이 순간처럼 느껴진다. 물리적인 시간은 분명 65년이었을 것이고 그 사이에 힘든 시간과 괴로운 세월들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 모두가 한 순간의 일처럼 느껴진다. 이 역시 우리 뇌가 가진 능력인 忘却(망각)의 효과 때문이다.

 

장수한 사람이 임종을 앞두고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돌이켜보니 잘 살아온 것 같다는 말. 하지만 그 역시 망각의 덕분이다. 긴 인생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스트레스와 좌절 또한 적지 않았을 터인데 그게 다 잊히고 망각되었기에 그런 회고를 한다고 본다.

 

이처럼 우리에겐 시간을 견디게 해주는 망각이란 무기가 있다. 생각해보면 , 참으로 고맙고 또 근사한 우리 뇌의 능력이 아니겠는가! 절대적인 시간을 시간의 경과와 함께 나중에 가서는 상대적으로 짧게 만들고 나아가서 결국 無(무)로 되돌려놓는 우리 뇌의 功能(공능)인 것이다.

 

 

찰나와 영겁 사이를 오가는 우리 

 

 

우리 모두 찰나와 영겁을 오가면서 살아가고 또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