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업자가 많다는 것은 사실상 苦肉之策(고육지책).



자영업자를 영어로 ‘self-employed person’이라 한다. 스스로를 고용한 사업자란 뜻이다. 


물론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어서 시작한 경우는 뭐라 할 말이 없지만 이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난히 높다고 하면 그건 취업하고 싶어도 받아주는 곳이 없는 까닭일 것이다. 


따라서 자영업의 비율이 높다는 말은 벌어먹기는 해야겠는데 채용해주는 데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채용해서 사업을 하는 사람의 비율이 높다는 말이 된다. 이런 경우 다름이 아니라 일종의 苦肉之策(고육지책)이라 하겠다. 


2017년 현재 OECD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자영업 비율은 대단히 높다. 차트를 자세히 살펴보면 자영업자의 비율이 1/6, 즉 16.7%를 넘어서면 사회적 안정성이 떨어진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무려 25.4%로 표시되고 있다. 


(자료; data.oecd.org/emp/self-employment-rate.htm#indicator-chart)


우리보다 더 좋지 않은 OECD 나라를 보면 칠레, 멕시코, 브라질, 터키, 그리스, 콜롬비아 밖에 없다. 터키와 그리스는 경제 상황이 불안정한 나라들이고 나머진 모두 중남미 국가들이다. 우리나 중남미나 동격인 셈이니 우리나라 고용의 질적 측면이 많이 좋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최근 들어 우리가 아주 만만하게 여기는 일본의 경우 자영업 비율은 10.4%에 불과하고 독일이나 프랑스와 거의 같다. 



고용율 또한 좋지가 않아서.



말이 나온 김에 전체 고용율도 한 번 살펴보자. 


고용율 역시 42개 OECD 국가 중에서 32위로서 중위값의 고용율이 71% 정도인데 우리는 66.6%로서 4.4%나 떨어진다. 전체 고용율도 좋지 않다. 



임시직 또는 일용직의 비중 또한 높아서.



내침 김에 임시직 또는 일용직 비율(Temporary employment)도 한 번 살펴보자. 


이 역시 무척이나 좋지 않다. OECD 42개국 중 중위값의 나라는 독일로서 12.8%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무려 20.6%에 달한다. 우리보다 좋지 않은 나라는 42개국 중 7개 나라에 불과하니 우리는 하위권이다. 


전체 고용율도 평균치에 미치지 못하는 마당에 그 내용을 보면 자영업 비율과 일용직 또는 임시직 비율이 엄청 높다. 



高齡(고령)에도 벌이를 해아 하는 우리의 현실



그리고 좋지 않은 게 또 있으니 바로 연령별 고용율이다. 우리의 경우 55세 이상의 고용율이 66.5%에 달한다는 점이다. 고령자의 고용율이 높다는 것은 물론 전문직이나 공직자가 아닌 이상 고령에도 불구하고 소득활동을 해야 함을 의미한다. 


고령자의 비율이 높다는 말은 반대로 핵심연령층인 25-54세까지의 고용율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의미도 된다. 자료를 봐도 역시 그렇다. 우리의 25-54세 고용율은 OECD 나라의 중위값보다 훨씬 떨어진다. 35위로 나타나고 있다.



고용의 양과 질, 모두 좋지가 않으니.



따라서 우리나라는 고용의 질적인 측면과 양적인 측면 모두 좋은 점이 거의 없는 사회라고 하겠다. 고용율 자체도 낮은 편이고 그 내용을 보면 자영업 비율도 아주 높은 실정이고 고령자들 역시 벌어먹기 위해 일하는 비율도 높으며 일용직이나 임시직의 비율도 아주 놓다. 바람직한 구석은 전혀 없다. 


경제 규모로만 보면 OECD 국가 중에서 상위권에 드는 나라인 것이 사실이지만 삶의 질과 직결되는 고용의 질이나 양 모두 전혀 좋지 않은 것이다. 



압박과 스트레스 극심한 우리 사회



안정된 소득이 있어야 사회가 안정된다는 것은 바로 孟子(맹자)의 말이다. 恒産則恒心(항산즉항심)


앞에서 자료를 통해 살펴본 것과 같이 우리 사회는 恒産(항산) 즉 안정된 소득기반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떨어지는 나라라 하겠으니 전체 구성원들이 받는 압박과 스트레스도 대단히 높을 수밖에 없다는 점 역시 쉽게 짐작이 간다. 



공교육과 교육 현실 간의 첨예한 모순



런가 하면 오늘 인터넷 기사에서 본 바, 미국의 모 경제학자는 워싱턴 포스트에 최근 기고한 글에서 “나라마다 다른 양육 방식 차이의 뿌리는 경제, 특히 경제적 불평등에 있다"는 내용을 소개했다고 한다. 


학교 성적을 올리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라고 내모는 양육 방식이 대세인 나라들의 공통점은 빈부 격차가 크다는 점이고, 반면 빈부 격차가 상대적으로 적고 사회 안전망이 잘 구비된 나라들에서 부모들의 양육 방식은 훨씬 느긋하고 아이들의 상상력 키우기 등을 더 중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고용의 질이나 양이 좋지 않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빈부격차가 심하고 사회적 불평등이 크다는 것과 같은 말인데, 반면 최근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는 사회적 불평등이 크지 않은 사회가 택하는 방식 쪽으로 초점이 모여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니 따로 노는 우리의 교육일 수밖에 없는 셈이다. 사설학원을 통한 치열한 학력경쟁이 엄연한 현실이건만 공교육은 이미 사회적 평등이 구현된 것을 전제로 해서 흘러가고 있다. 과거 20년간 공교육은 평등교육을 지향해왔으나 우리 사회의 현실은 빈부격차가 더욱 커져가면서 학력경쟁이 더 첨예화되고 있다. 矛盾(모순)이고 그 모순이 더 커져가고 있다. 



잘해보려는 마음은 익히 알겠으나



현 정부가 밀고 있는 소득주도성장 역시 그 취지와는 반대로 소득분배 특히 어려운 계층의 소득분배가 더 악화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면서 충격을 주고 있다. 


최저임금의 인상을 포함한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상위 계층이나 일부 계층에는 효과가 있었겠지만 정작 개선이 되길 원하는 하위 계층의 소득분배에는 역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이는 정부의 정책이 표적을 제대로 겨냥하지 못하고 있거나 달리 말하면 더 이상의 뾰족한 수단이 없음을 말해준다. 


이는 마치 공교육이 지향하는 바와는 달리 실제 교육 현장은 전혀 따로 놀고 있는 우리의 치열한 교육현실과도 같다는 느낌이 든다.

 

뉴스에 보니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이 여당 의원들에게 ”소득분배 악화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어떻게 해서든 잘 되게끔 해보려는 정부의 고충과 충정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러나 눈앞의 현실은 정부가 목표하는 바와는 달리 역으로 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현 정부의 목표가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나? 하는 생각, 현실의 얽히고설킨 복잡한 그물망을 너무 쉽게 본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심지어는 눈앞의 어려운 현실은 어떤 사람이 와도 바람직한 쪽으로 바꾸기엔 이미 때를 놓친 것이 아닐까? 하는 비관적인 생각도 든다. 



우울한 소식만 듣게 되니



그런가 하면 또 하나 우울한 뉴스를 접했다. 서울의 신혼부부는 남편이나 아내 모두 평균나이가 전국 평균보다 0.7세가 더 높다는 것이었다. 결혼이 늦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결혼이 어렵다는 말이 된다. 


더불어 남편의 경우 67%가 관리자나 전문직 또는 사무직 종사자였고 아내의 경우 58.3%가 그렇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관리자나 전문직 또는 사무직 종사자가 아니면 사실상 결혼할 엄두를 내기 어렵다는 말이 된다. 


뿐만 아니라 서울의 경우 2017년 신혼부부의 건수도 2년 전에 비해 무려 9.7%나 감소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추세가 지속되고 있다는 말도 있었다. 


서울을 포함해서 부동산 시세가 전체적으로 너무 높아서 수입이 괜찮고 안정된 직장이 있거나 아니면 부모의 재력이 뒷받침 되어야 결혼이 가능한 서울특별시이고 대한민국인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최근 수년 간 지내오면서 뭔가 좋아졌다는 소식을 접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저 들리는 것이라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선 해마다 견실하게 수익을 내던 한국전력이 졸지에 적자로 전환했다는 소식 같은 것밖에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어려워질 것이란 점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물론 2024년을 우리 대한민국의 立春(입춘) 바닥임을 알고 있는 나로선 어쩌면 그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모든 것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노력 또는 우리 모두의 노력에 의해 악화되어가는 현실을 다소라도 완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은 마음에서 놓아본 적 없었기에 하는 말이다. 


올 해 2019년은 우리 국운의 小寒(소한)이다. 소한은 해마다 1월 초에 맞이하는 본격 추위의 때를 의미한다. 국운의 추위란 나라의 힘 또는 에너지가 극도로 소진되고 떨어져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各自圖生(각자도생)인가?



힘이 약해지면 그나마 뭉쳐야 살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눈앞의 현실은 예전보다 더욱 더 제 갈 길로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저 서울 광화문과 시청 앞 광장만 소란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