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동엔 춥지가 않다.



현재 시각은 11월 7일이고 저녁 8시 20분이다. 앞으로 두 시간이 흘러 10시 32분이 되면 立冬(입동)이다. 


아침 뉴스에서 ‘입동인데도 춥지가 않습니다’ 하는 멘트가 들려왔다. 실은 입동이기에 추울 까닭이 없다. 입동의 立(입)은 ‘일어난다는 뜻’이니 이제 겨울 기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입동은 언제나 늦가을과 같다. 


하지만 입동으로부터 보름이 지나 小雪(소설)이 되면 아, 이젠 겨울이네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니 입동은 이제 얼마 안 있어 추운 겨울이 시작될 것입니다 하는 예보와 같은 것이고 몸으로 느끼는 겨울은 11월 22일의 小雪(소설)부터이다. 


늦은 오후 작업실 창밖으로 내다보니 흐린 하늘 아래 마지막 가을의 情趣(정취)가 완연했다. 창 아래 목련의 커다란 잎사귀의 색깔이 희끗한 녹색에서 황갈색에 이르는 스펙트럼을 나타내고 있었다. 


떨어진 잎이 절반이고 아직 붙어있는 것이 절반이다. 모양새가 모나지 않고 둥그렇다. 끝부분이 조금 뾰족하긴 하나 전체적으로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착하고 선량한 인상이다. 


입동을 맞은 저 목련은 나 호호당이 2005년 봄 현재의 서초동 작업실로 들어온 이래 좋은 친구로 지내왔다. 해마다 3월 하순이면 어김없이 우유 빛깔의 환한 꽃망울을 터뜨려주었으니 참으로 반갑고 고마웠다. 그런 목련이 입동을 맞이하여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인다. 이제 쉴 때가 되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겨울이면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되니



사람 또한 겨울이 되면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우리 대한민국 또한 2009년으로서 60년 순환에 있어 겨울을 맞이했고 2024년이 되어야만 새 봄을 맞이한다. 그렇기에 국운의 겨울이 되자 과거 세월을 되돌아보는 일이 많아졌다. 대중의 정서를 반영하는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 역시 그렇다. 


한동안 “응답하라” 시리즈 드라마가 2012년부터 2016년에 걸쳐 인기리에 방영되었는데 과거를 되돌아보는 내용이었다. 2014년 많은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국제시장’ 역시 파란만장했던 우리의 현대사를 되돌아보는 내용이었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것을 ‘회고’라고 한다. 회고는 주로 인생을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 하게 되고 또 그게 정상이다. 그렇기에 응답하라 시리즈는 우리 대한민국의 국운이 사계절 중에 마지막 계절인 겨울로 접어들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겨울엔 환타지와 몽상도 잦아지나니



그리고 또 겨울이 깊어지면 낮은 짧고 밤은 길어진다. 이에 사람들은 길고 긴 겨울 밤 동안 이불 속에서 환타지 또는 몽상에 잠기기도 한다. 현실적이지 않은 일, 현실에선 불가능한 꿈과 같은 일들을 공상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이에 2009년부터 시작된 겨울이 점점 더 본격 겨울로 접어들자 ‘시크릿 가든’이나 ‘별에서 온 그대’, 그리고 최근의 ‘도깨비’와 같은 환타지 로맨틱 드라마에 빠져들었다. 작년 올 해의 빅 히트 영화 ‘신과 함께’ 역시 그런 흐름이라 하겠다. 



겨울은 생산의 계절이 아니라서



겨울은 생산과 발전의 계절이 아니다. 땀 흘려 일하고 투쟁하는 때도 아니다. 


겨울은 가을에 거두고 저장한 수확을 소비하는 때이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역시 2009년 이후 특히 국운의 小雪(소설)인 2012년부터 경제성장률이 현저하게 둔화되었다. 사실 그건 성장도 아니다, 일종의 통화량 증가에 따른 착시현상에 불과하다. 


겨울을 날 때 신경을 쓰고 주의를 기울여야 할 요점은 가을 수확으로 겨울만이 아니라 봄까지 나야 한다는 점이다. 초여름 보리 수확 철이 올 때까지 말이다. 


예전엔 보릿고개란 것이 있었으니 비축된 식량이 떨어져서 햇보리가 나는 철까지 배를 굶주려야 했던 시기를 말한다. 


물론 오늘날은 농사가 大本(대본)이 아니지만 자연의 이치는 변함이 없다. 우리 주력산업들이 최근 경쟁력을 잃어간다는 우려가 적지 않은데 바로 이 주력산업이 다음 번 국운의 여름이 오기 전까지 우리가 먹고 살아갈 식량인 셈이다. 


현재 우리의 주력산업인 철강과 조선, 자동차, 전자, 석유화학 등의 기업들은 대부분이 1970년대 초중반에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36년이 경과한 200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들어서면서 노쇠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 만물은 시작으로부터 36년이 흐르면 어떤 브레이크가 작동되기 때문이다. 비교적 늦게 1983년에 시작한 반도체 또한 내년 2019년으로서 36년이 된다. 


반면에 이른바 ‘미래 먹거리’ 산업은 구체적인 성장궤도에 들어서기까지 좀 더 시일이 걸릴 것이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의 기간, 국운의 겨울 동안 우리 모두 장차 어떤 어려움이나 위기가 닥쳐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의 복지 논쟁



사실 이미 2012년부터 전 국민이 어떤 불안감을 강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2012년 말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의 이슈가‘ 복지 논쟁’이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의욕과 욕심이 많고 부지런하던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2012년 무렵이 되자 갑자기 복지에 관심이 높아졌으니 무슨 연유이고 까닭이었던 것일까? 


이유는 단 하나 아주 간단하다,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급속도로 떨어져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면 달리 무엇이랴! 


그 무렵이 되자 이른바 신분상승의 사다리가 끊어지고 성공의 기회도 극도로 줄어들고 있다는 느낌,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절이 지나갔다는 불안감, 부와 성취를 향한 게임이 이젠 끝이 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젠 발전이나 상승보다도 노후를 걱정하기 시작한 대한민국이 되었기에 복지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촉각을 곤두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미래의 세월이 과거와는 달리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감지했던 우리 국민들이었던 셈이다. 



나라는 부강해졌으나



2012년에 이르러 나라 자체는 세계적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는 부강한 나라가 되었음에도 그 구성원의 대다수는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逆說(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그 불안감이 전혀 막연하거나 근거 없는 것 또한 아니었다. 몇 년 사이 흔히 듣게 되는 얘기로서 ‘이제 우리가 올 수 있는 데까지 왔다, 이제 더 앞으로 나아가긴 어렵다’는 말이 그것이다. 


겨울은 생산과 발전의 때가 아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국운의 겨울을 보내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대한민국이 한창 신명을 내던 시절도 있었으니



다소 부족하고 미흡한 것이 있어도 시간이 가면서 하나 둘씩 생겨나고 얻는 것이 있는 세월이 훨씬 재미가 있고 즐겁다. 우리 대한민국에게 있어 그런 시절은 바로 1987년부터 2002년에 이르는 세월이었다. 한 해로 친다면 여름의 하지에서 가을의 추분에 이르는 시기였다. 


1987년 갑자기 경제가 급성장하고 무역 흑자가 정착되었으며 동시에 감격스런 민중화가 이루어졌던 한 해, 그 한 해 GDP 성장률만 해도 무려 12.5%였다.


그렇게 우리 대한민국 약진의 세월이 시작되었다. 누구나 열심히 하고 잘 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널리 보편화되던 시절이 열렸던 것이다. 비로 그 도중에 외환위기라고 하는 國難(국난)이 있긴 했으나 1987-2002년 사이의 세월은 발전과 전진의 세월이었음이 분명하다. 



돌이켜본다는 것은 노인의 일이니



글의 앞에서 우리 국운이 겨울로 접어들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일이 잦아졌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말이다, 되돌아보고 回顧(회고)하는 일은 사실 젊은이의 일이 아니라 나이든 노인의 일이란 점이다. 


따라서 우리 국운이 2009년부터 겨울로 접어들었다는 말은 우리 대한민국이 늙었다는 말과도 같다는 뜻이다. 늙어가다 보니 신생아 출생률도 급감하고 활력 또한 떨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계속 이대로 줄곧 늙어만 갈 것인가? 하면 그렇지가 않다는 말씀을 드린다. 2024년이 되면 늙은 대한민국은 죽고 그와 동시에 新生兒(신생아) 대한민국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2024년에 태아가 만들어지고 다시 10년이 흘러 2034년이 되면 세상 밖으로 나갈 대한민국이라 하겠다.) 


저녁 무렵 글을 시작해서 도중에 쉬었다가 이제 마무리한다. 시각을 보니 11월 8일 새벽 1시 57분이다. 그 사이에 立冬(입동)점을 넘어섰고 그러니 이젠 겨울이 시작되었다. 아직은 춥지 않은 겨울이지만. 


미국 트럼프가 중국을 때리자 중국은 총력 체제로 돌입해서 생산을 풀(full) 가동하고 있다. 그러자 중국 북방의 산업단지들이 석탄을 마구 써가며 사정없이 매연과 미세먼지를 뿜어내고 있다. 이에 그 탁한 먼지들이 서풍을 타고 서해를 건너 우리나라로 죄다 몰려들고 있다. 올 겨울 우리 한반도의 하늘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탁해질지 당장은 그게 걱정이다.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며 살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

 

 

우리 사회의 보통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의 장래에 대해 적지 않은 걱정과 우려를 하면서 살고 있다. 거의 예외가 없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경우보다는 그렇지 않은 쪽의 생각을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진 것 같다.

 

중년의 가장들은 직장에서 언제 잘릴 지 걱정이고 이에 혹시 그만 두고 나면 뭐를 해서 생계를 꾸릴 수 있을까에 대해 내심 많은 걱정을 한다. 그만 두고 나면 받아줄 곳이 없으니 선택지는 자영업이다.

 

자영업의 경우 최근엔 취업에 실패한 젊은 청년들도 자영업에 많이 뛰어들었다. 이에 우리나라의 자영업 비율은 27% 정도로서 대단히 높은 편이다. OECD 평균은 15.4%이고 좀 괜찮다 싶은 나라들은 대부분 10% 초반이다.

 

자영업 비중이 높다는 말은 경제구조가 불안정하다는 말과 동의어이다. 조금 더 얘기해보면 OECD 국가 중에서 우리보다 자영업 비율이 더 높은 나라는 그리스 터키 멕시코 브라질 정도이다. 모두 문제가 있는 나라들이다, 네 나라 모두 경제위기가 발생했거나 발생 중인 나라들이다.

 

청년들은 학교를 마친 뒤 제대로 된 직장에 취업할 확률이 대단히 낮다. 청년 실업률도 대단히 높은 편이고 개선될 조짐도 잘 보이지 않고 있다.

 

나름 괜찮은 직장에 들어간 청년들과 대화를 해보면 ‘그래봐야 마흔 중반까지 다니는 거죠, 그 다음에 창업이죠 뭐’ 하는 얘기를 예사로 듣게 된다. 실제 그렇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청년들의 인식이 그렇다는 것은 미래에 대해 낙관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로 해석된다. 어쩔 수 없이 창업하게 되는 청년들도 상당수이고 대부분 3년 안에 실직자가 된다.

 

50대 후반을 넘긴 장년층들 역시 걱정이 태산이다. 어쩔 수 없어서 그냥 놀고 있는 서른이 넘은 자녀를 여전히 부양하고 있는 경우도 허다하고 노후 대책 역시 부실하기 때문이다. 잘못되면 독거노인이 되어 쪽방에서 죽어가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은근히 하며 지낸다.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우리 청년들

 

 

결혼에 대해 청년들과 얘기해보면 몇 년 사이에 아예 풍조가 바뀌었음을 실감한다. 나 호호당이 만나본 대다수 청년들의 경우 최근 들어 꼭 결혼하겠다는 젊은이를 거의 만나본 적이 없다. 젊은 여성들의 경우 결혼했으면 하는 마음은 있으나 과연 제가 결혼할 수 있을까요? 하고 반문하는 경우가 더 많다.

 

정말이지 60대인 나로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이 이렇게 달라졌나 싶다. 자유롭게 살고픈 마음도 예전에 비해 많아졌지만 기본적으론 돈 그리고 수입의 문제라 여겨진다. 결혼을 하지 못하니 애를 낳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출산율이 저 모양일 수밖에.

 

(참고로 얘기하면 유교적인 통념이 강한 우리 사회인 탓에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출산하기란 사실상 어려운 현실이다. 최근 OECD 국가들의 비혼 출산율이 상상 이상으로 높은 것에 반해서 그렇다.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 오늘에 이르러 결혼 제도 자체가 붕괴해가고 있는 현실이다.)

 

 

國運(국운)의 겨울, 불임의 시대

 

 

가히 우리 대한민국의 國運(국운)이 한 겨울에 들어섰음이 분명하다. 겨울은 生産(생산)의 계절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지금 우리는 不姙(불임)의 때를 보내고 있음이 확실하다.

 

청년층은 아니지만 내가 만나는 대다수 중년 이상의 사람들은 우리가 올 만큼 온 것 같다, 앞으로 올라가기 보다는 내려갈 공산이 더 큰 것 같다, 현 위치라도 지킬 수 있다면 다행이란 말을 흔히 한다.

 

 

행복하지 않은 2018년의 우리 사회, 원인은?

 

 

선뜻 인정하긴 싫지만 우리 대한민국은 행복감을 느끼기 어려운 사회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아들 녀석은 인터넷에 들어가 검색하는 기술이 나 호호당보다 훨씬 뛰어나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통해 온 세상을 들쑤시고 돌아다닌다.

 

얼마 전 아들에게 우리 사회가 많이 불행해진 것 같아,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 하는 질문을 던졌더니 “아빠, OECD Better Life Index 란 게 있어, 그 자료들을 살펴보면 나름 설득력이 있어” 하는 것이었다.

 

아, 그래? 하고 즉각 구글로 검색했다.

 

 

OECD Better Life Index

 

 

충분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에게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에 대해 나름 일리가 있는 자료를 발견할 수 있었다.

 

OECD 국가는 현재 38개국이다. 11개 항목에 대한 지표가 있고 나라별 순위가 표시되어 있었다. 주거, 소득, 직업, 공동체, 교육, 환경, 시민참여, 건강, 삶의 만족도, 안전, 일과 생활의 균형(이른바 워라벨)이었다.

 

대다수 항목에 있어 우리 대한민국의 상황이 그렇게 나쁘거나 뒤처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가 유난히 뒤처지는 항목들이 3개 눈에 띄었다.

 

환경 지표에서 우리가 38개국 중에서 36등이었고, 워라벨이 35등이었다. 환경이 나쁘다고 되어있는 것은 사실 뜻밖이었다. 환경 항목은 수질과 공기오염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공기오염도가 38개국 중 꼴찌였다.

 

이런? 했지만 잠시 생각해보니 그래, 우리가 중국 옆에 붙어 있다 보니 어쩔 수가 없구나 싶었다. (참고로 중국은 OECD 국가가 아니다.)

 

워라벨이 열악하다, 뭐 이건 당연히 인정한다. 지금 정부가 주52시간을 시행하고는 있지만 공직이나 대기업을 제외하면 현실은 무진장 열악한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아침에 출근해서 밤 11시에 퇴근하면 싸가지 없다는 말을 듣는 직장이 허다하다. 게임 만드는 회사들이 특히 그렇다고 아들이 일러주었다.

 

그러니 우리 사회가 우울하고 사생활이 없다는 말을 들을 법도 한 것이다.

 

그런데 진짜 결정적인 항목이 하나 있다는 사실. 이제 공개하겠다.

 

바로 공동체(community) 항목이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공동체라서 38개국 중에서 꼴찌 하는가 싶어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공동체란 항목 지표는 ‘Quality Of support network’이라 되어있다. 그래서 그게 또 무슨 말인가 해서 읽어보았다.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원문을 옮겨본다.

 

Percentage of people who believe they can rely on their friends in case of need.

 

우리말로 옮기면 ‘필요시 친구나 친지에게 의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백분율’이다.

 

 

인정이 메말라버린 2018년의 대한민국

 

 

바로 이 대목이 38개 OECD 국가 중에서 최하위였다. 처음엔 선뜻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에겐 오래 전부터 유교적 풍조로 인해 상부상조하는 전통이 있어왔건만 아니 이게 꼴찌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75.9%로서 꼴찌였다.

 

1위 국가는 아이슬란드(Iceland)로서 98.3%였다. 하기야 그 나라는 인구가 겨우 32만에 고립된 섬나라이다 보니 사실상 모두가 친족 관계인 나라이다. 그러니 서로 돕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 싶다. 그런 작은 나라가 이번 월드컵 본선에 나올 수 있었던 것 역시 전 국민이 남이 아니라 형제라서 팀워크가 좋을 수밖에 없다 싶었던 바로 그 나라 말이다.

 

중간에 위치한 수치를 눈짐작으로 보니 90% 정도였다. 그런데 우리는 75.9%였다. 이 정도면 나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전혀 그렇지가 않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 사람 4명 중 1명은 어려움이 닥쳤을 때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여기고 있으니 이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란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5천만 인구인 우리나라인데 그 중 1250만 명이 유사시 의지할 데가 없다는 말이 되니 사실 대단히 심각한 문제이다. 우리가 어느새 인정이 메마른 사회가 되고 만 셈이다.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인심이 사나운 나라 대한민국인 것이다.

 

며칠 생각을 해보았다. 어쩌다가 우리가 이처럼 건조하고 강팍한 사회가 되었지? 하는 질문을 놓고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먼저 떠오른 생각은 우리나라는 대단히 급속도로 도시화가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친인척들이 모여 사는 고향을 떠나 오로지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면서 사실상 친척이나 친지와의 관계가 형식적인 것으로 남게 되었다는 생각이다.

 

설이나 추석 명절이면 아직도 열심히 고향으로 내려가긴 하지만 사실 이는 정이 있어서라기보다 체면과 눈치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생각, 며느리들이 명절 스트레스가 많은 것 역시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또 하나 드는 생각으론 우리가 그간 혈연이나 학연, 지연 등에 대해 우리 사회의 문제점으로 여기고 배척해온 결과 결과 지나치게 緣(연)을 끊으며 살아온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촌이라 하면 사실 가까운 사이이지만 1년에 한 번 보기 어렵고 조카라 하면 명절 때나 얼굴 한 번 보는 정도로 우리 사회의 끈이 허약해진 것이 사실 아닌가. 그러니 유사시 의지할 데가 없다는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 한편으로 서양의 개인주의 성향을 우리가 무조건 추종해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사회안전망 확충만이 능사는 아니다.

 

 

우리 사회는 최근에 툭 하면 사회안전망을 들먹이고 있지만 사실 이 문제는 정권이 바뀌거나 새로운 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려워지면 믿을 놈은 나 자신밖에 없다 한다면 우리 모두 얼마나 외로운 사람들인가 말이다.

 

우리 대한민국 사회는 6.25 전쟁 이후 나라를 건설해오는 과정에서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오늘은 8.15 광복절 새벽이다. 나 호호당은 이 시각 오전 4시 30분까지 그림을 한 장 그리고 또 이 글을 쓰고 있다. 2018년의 대한민국은 행복하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