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쓰기엔 너무 아까운 가을 공기 

 

 

부쩍 공기가 맑아지고 선선해졌다. 마스크 쓰긴 아깝다 싶은 생각. 그제 저녁엔 온 하늘에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여름내 허공 속을 부유하던 수증기가 이제 부지런히 땅속으로 되돌아가니 대기가 투명해지고 있음이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의 작은 영상 클립, 아침녘 찬 공기 속에 힘차게 피어난 샛노란 국화, 언제였는지 남산 힐튼 호텔 앞이었는지 태평로 삼성본관 앞이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기백 당찬 황국이었는데.

 

날이 좋다 보니 정갈한 햇살 받으며 감나무 곳곳에 보이는 시골 한적한 마을의 돌담길 사이를 걸어보고 싶다. 상상을 하다 보니 물소리도 들려온다, 인근 밤나무 숲속 어디선가 실개천이 부지런히 흐르고 있나 보다.

 

 

상강을 맞이하면서 

 

 

이번 주 23일 금요일은 霜降(상강), 한 해 길이의 17/24 지점, 70.83%를 경과하는 자리이다. 상강으로서 한 해의 생산이 끝나고 마무리 단계로 넘어간다. 따라서 올 한 해도 대충 다 넘어간 셈이다.

 

상강이면 秋收(추수)하느라 바쁘다. 익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때이니 그것이 많든 적든 돈이 생기는 때이다. 인생에도 추수의 시기가 있다. 60년 순환에서 17/24 되는 시점이니 입춘 바닥점으로부터 42.5년이 경과하는 때이다.

 

 

상강의 운에 풍성한 수확을 보고 있는 가수 임영웅

 

 

최근 인생의 추수기를 맞이하여 복이 터진 사람이 있으니 대박 난 예능프로 ‘미스터 트롯’에서 1등을 차지한 가수 임영웅이다. 이 친구는 1991년 6월 16일, 辛未(신미)년 甲午(갑오)월 丁巳(정사)일이니 2007년 丁亥(정해)년이 입추였다. 따라서 2020년 올 해가 바로 인생순환 60년에 있어 추수철이다.

 

위키에 보니 광고만 13개를 찍고 있다. 상당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는 얘기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무명가수가 신데렐라 스토리를 쓰고 있다. 얼마 전 제1회 트롯어워즈 시상식에선 상을 무려 6개나 받았다. 인생 순환에 있어 추수철인 까닭이니 타고 난 재능의 바탕 위에 그간의 노력이 이제 충분한 수확을 보고 있는 셈이다.

 

풍성한 수확을 본 농부는 마음이 뿌듯하다. 하지만 그 기분이 영원히 가는 것은 아니다. 겨울 나고 봄이 되면 쌀독에 쌀이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임영웅이란 젊은이, 그간 고생 많이 했을 터인데 앞으로도 지난 날 잊지 말고 성실하고 겸손한 자세로 꾸준히 활동해주길 바랄 뿐이다.

 

 

運(운)이란 말

 

 

늘 이 블로그를 통해 운세의 순환에 대해 얘기해오고 있다. 그런데 사실 운이란 말과 순환이란 말은 뜻이 같다. 동의어란 얘기이다. 運(운)이란 한자 자체가 멀리 갔다가 되돌아온다는 의미를 갖고 있고, 따라서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은 바로 순환을 뜻하기 때문이다.

 

나 호호당은 기존의 명리학을 연구하던 중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 뭔가 빠져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이에 그 빠진 것이 무엇인가를 이리저리 모색하다가 60년에 걸친 운세 순환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이를 집중적으로 검증한 결과 과연 그렇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연순환운명학과 기존 명리학의 차이 

 

 

그런 점에서 나 호호당의 자연순환운명학은 중국에서 전해진 명리학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로부터 크게 진일보한 운명학이라 자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예측의 정확도에서 기존의 이현령비현령 식의 두루뭉술한 명리학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2014년의 어느 날 ‘자연순환운명학’이라고 하는 과학적인 새로운 운명학이 만들어졌다고 선포한 바 있다.

 

그런데 순환의 개념 자체는 나 호호당의 창안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 있어 아주 오래 전부터 이어져온 생각이란 점이다. 모든 창의가 그렇듯이 전적으로 無(무)에서 창조되는 것은 없다는 점에서 당연히 그렇기도 하다.

 

 

순환이란 생각의 역사 

 

 

순환의 생각을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보면 기원전 850년 경 고대 바빌로니아의 칼데아 제국 당시로 이어진다. 그런 까닭에 칼데아란 단어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학문, 특히 천문학과 점성술을 교육받은 사람을 지칭하기도 한다. 역사학자들은 이 표현을 더 자주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고대 인도에선 보다 더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으니 국내에도 잘 알려진 단어 劫(겁), 즉 칼파가 그것이다. 겁이란 힌두교에서 우주의 창조와 파괴가 반복된다는 기간을 뜻하는 바, 이는 우주의 창조신인 브라흐마에게 있어 하루, 즉 하룻밤 하루낮의 시간이다.

 

인도의 숫자는 그야말로 천문학적 스케일이다. 1겁 즉 1 칼파가 43억 2천만년이라 하니 말이다. 그리고 1 칼파는 1000 마하유가로 이루어졌기에 1 마하유가는 432만년이 된다.

 

이처럼 숫자는 엄청나게 크지만 그 속에 깃든 생각을 보면 이 세상과 우주가 처음에 창조되어 좋았다가 점점 흐려지고 탁해져서 종말이 온다, 그러면 우주가 새롭게 창조되고 생성된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과거 로마제국 시절 당시 사람들도 바빌로니아 천문학과 오늘날 이란 지역에서 만들어진 생각의 영향을 받은 결과 365년이 ‘하나의 해’란 생각에서 ‘Great Year’라고 불렀는데 나라 안에서 내전이 빈발하게 되자 자기들의 조국인 로마의 존속 수명은 바로 365년이란 우울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순환과 종말론

 

 

기독교 종말론 역시 바빌로니아나 이란 지역의 종말론에서 왔다. 세상의 종말이 오면 대다수 사람들은 죽게 되고 세상도 끝나게 되지만 그 이전에 등장한 메시아 예수를 믿고 회개하면 종말이 왔을 때 영원의 왕국에 들어가 시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날 우리들은 종말론을 말도 되지 않는 얘기로 치부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고대 사람들이 왜 종말에 대해 생각했는지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두 가지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종말로서 모든 것의 끝이라고 하는 음울한 생각이다. 하지만 한 편에선 종말은 끝장이 아니라 고된 삶의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궁극적인 구원으로서의 종말론이 제시되었다는 점이다. 기독교의 종말론도 그렇지만 멀리 갈 것 없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증산도에서 말하는 개벽이란 것 역시 새로운 세상의 시작으로서 기존 세계의 종말을 의미한다.

 

순환의 주기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점이 또 하나 있다. 앞에서 얘기하길 순환의 첫 부분에서 모든 것이 새롭고 맑게 시작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지고 탁해져서 마침내 끝이 온다고 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질적인 풍요는 뒤로 갈수록 더 커지고 그 바람에 사람들이 타락한다는 점으로 되어있다는 점이다. 성서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이 두 도시는 물질적 타락과 방종의 대명사로 제시되고 그 바람에 하늘에서 유항불이 내려와 멸망했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처음엔 맑고 깨끗하다는 얘기는 가난하다는 얘기이고 뒤로 갈수록 물질적 풍요와 함께 타락한다는 얘기로 되어 있는 것인데 어쨌거나 그런 모든 스토리들은 기본적으로 순환을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대인들은 시간을 알지 못했기에 오히려 행복했던 것이니   

 

 

고대인들에게 있어 순환의 생각은 1년의 순환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새해가 시작되면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한다고 여겼다. 오늘날의 우리들 역시 새해가 되면 새로운 마음으로 소망을 빌어보기도 하는데 그 역시 우리들의 가슴 솜에 고대인들의 심성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 해의 순환이 전부였던 고대인들에게 있어 사실상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헌 해가 가면 모든 것이 다 지워지고 새해가 되면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그들에게 있어 시간이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옛 사람들은 시간을 모르고 살았다고 말해도 크게 무리가 아닐 것이다.

 

세상 모르고 산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를 모르고 살았기에 어떤 면에서 행복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고 그런 삶을 성서에선 낙원 즉 파라다이스라고 여겼다.

 

 

시간과 현대인의 불안

 

 

근대 이후 사람들은 시간을 잘 알고 있고 철저하게 계산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分(분)은 물론이고 때론 抄(초) 단위까지도 사용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에게 어떤 불안감이 생겨났다. 그 불안감은 바로 시간의 화살이란 생각에서 온다. 시간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즉 非(비)가역적이다.

 

한 번 시위를 벗어나면 되돌아오지 화살처럼 시간은 끊임없이 과거로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로 흘러가고 날아간다. 그렇기에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이 흘러가고 지나가버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은 한 순간이고 찰나의 일이 되고 만다. 이게 바로 우리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불안감이다. 나아가서 아는 싯다르타가 교설한 바, 모든 것은 無常(무상)하고 모든 것의 속에는 본질적 실체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안감이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사례가 있으니 20세기 초 프랑스의 화가 폴 고갱이 생애 마지막에 남긴 커다란 그림의 제목 즉 “우리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이다.

 

 

운이라고 하는 순환의 개념 속에는 위안이 있으니 

 

 

시간이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멀리 날아가 버린다면 삶은 허무하고 불안하다. 하지만 시간에 대한 이런 생각만이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이다. 바로 運(운)이란 단어가 그렇다. 운이란 멀리 갔다가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가령 주식을 하다가 완전히 재기 불능할 정도로 파산했다고 하자. 또 그런 까닭에 콱 하고 죽어버리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것이 운이기에 그 순간 죽지만 않으면 세월이 지나 또 다시 충분히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세월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니 운이란 단어 속에는 그런 慰安(위안)이 담겨있다.

 

운명학이란 것이 결정론을 담고도 있지만 그 이면엔 커다란 위안이 숨어있다는 얘기였다.

 

언제 시간을 내어 순환이란 생각이 어떻게 생성되고 만들어지고 발전해왔는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얘기를 들려드리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