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半(야반)의 독서

 

 

밤공기 차가운 한밤중 혹은 새벽녘에 윌리엄 워즈워스의 장편시인 “서곡(Prelude)”을 읽어나가다가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대목이 있었다. 원문부터 소개해본다.

 

And yet we feel—we cannot choose but feel—

That they must perish. Tremblings of the heart

It gives, to think that our immortal being

No more shall need such garments; and yet man,

As long as he shall be the child of earth,

Might almost "weep to have" what he may lose,

 

번역해보면 이렇다.

 

하지만 우린 느끼네-느낄 수밖에 없네-

그것들은 소멸하리라고. 가슴 떨린다네

불멸의 우리 존재가 더 이상 그런 (거추장스런) 옷가지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리란 생각을 하면 말일세, 그러나 인간은,

그가 대지의 아이들로서 살아가는 한,

결국 잃게 될 것을 ‘갖고자 울’ 것이며,

 

 

인간, 양면적인 존재

 

 

전후 맥락 없이 인용했기에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렵겠다. 거두절미하고 나 호호당이 감동을 받은 대목에 대해 얘기해보면 이렇다. 우리 인간이란 존재가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이상 원하는 무엇을 잠시 소유한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잃게 될 터인데 그럼에도 우리들은 좀 더 가져보고자 울고 소리치며 살아간다는 저 대목, “weep to have”, 즉 “갖고자 울” 것이란 저 시구이다. 이에 반해 그 앞에 있는 “불멸의 우리 존재”란 말은 우리 속에 깃든 神聖(신성)을 말하고 있다.

 

워즈워스의 이런 시각은 인간이 양면적인 존재라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 속에 영원불멸의 신성이 깃들어있기도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땅의 아이들이기도 하기에 언젠가 죽어서 다시 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인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좀 더 가져보고자 울고 소리치면서 안간힘을 쓰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앞에 인용한 시구는 서곡 5권, The Prelude. Book.5 중에 있음을 밝혀둔다.)

 

워즈워스의 말이 실로 맞다. 우리들은 무얼 조금이라도 더 가져보고자 울어대고 소리치고 때론 악다구니까지 하며 살아가고 있다.

 

 

치열한 승부

 

 

엊저녁 시간 부산에서 열린 BMW LPGA 대회에서 연장전 끝에 우승컵을 거머쥐는 모습을 녹화로 보았다. 교포 선수인 다니엘 강이 앞서 가다가 끝내 동점이 되었고 연장전 결과 운은 장하나 편이었다.

 

다니엘 강과 장하나 두 선수는 절친이란 해설자의 멘트가 있어서 두 사람 운세를 체크해보았더니 역시-였다. 서로 바빠서 특별히 따로 만나보진 못해도 시합이 끝나면 함께 아이스크림 사먹고 쇼핑을 즐긴다는 것이었다.

 

장하나는 작년 2018년이 60년 순환에 있어 입추였고 다니엘 강은 올 해가 입추의 운이었다. 게다가 장하나는 태어난 날이 戊土(무토)이고 다니엘은 己土(기토), 같은 土(토)의 사람들이라 두 사람은 친한 것은 당연지사.

 

입추라 하면 이제부터 시작인 셈이고 향후 15년간은 흐름이 더 좋다는 뜻이 된다. 장하나는 또 한 사람의 박인비인 셈이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향후가 더 기대되는 선수들인 것이다.

 

최종 라운드가 펼쳐진 어제 27일은 기해년 갑술월 정유일이었다. 다니엘 강은 어제 64타를 쳤고 장하나는 65타를 쳤다, 두 사람 모두 엄청난 호조의 날이었는데 그럼에도 장하나가 우승한 이유는 날이 丁酉(정유)였기 때문이다. 丁酉(정유)일은 이른바 ‘운발’ 싸움에서 장하나에게 아주 미세하나마 조금은 더 유리했던 까닭이다.

 

밤에 워즈워스의 시를 읽고 있는데 저녁에 본 장하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퍼트를 성공시키고 주먹을 불끈 쥐는 장면이었다. 그래 저것 역시 소리 없는 울음이지 싶었다. 우승 시상식장에 가려고 카트를 타고 떠나는 장하나 뒤로 다니엘 강은 쿨한 표정으로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래, 저 역시 승부에 단련된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일거야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오늘만 날인가 또 기회가 오겠지 하는 모습, 보기에 좋았다.

 

스포츠가 좋은 점은 정해진 룰 안에서 승부가 가려진다는 점이다. 특히 골프와 같은 스포츠는 시비의 여지가 없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승패가 깔끔하다. 비디오 판독이 필요치 않은 담백한 스포츠.

 

 

이 세상이 스포츠만큼 깔끔하진 않아서

 

 

욕망과 욕망이 서로 맞부딪치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 모든 투쟁을 법이나 룰로 깔끔 명확하게 판단하거나 가려낼 순 없다. 정말 그렇다, 현실의 세상은 욕망이 치열하게 갈등을 빚어내고 부딪치고 있지만 깔끔한 판결은 어렵다.

 

특히 정치의 장으로 들어서면 그야말로 이전투구의 양상이 되기 마련인데, 정치가 이전투구가 되는 것은 그만큼 욕망의 總合(총합)이 큰 까닭일 것이다. 달리 말해서 승패에 따라 걸린 몫이 엄청나게 크다는 얘기이다.

 

정치 또한 깔끔하게 승패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지는 않다. 5년마다 있는 대통령 선거와 4년에 한 번 있는 국회의원 총선과 지방선거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적 간격이 꽤나 길어서 그 사이를 메우는 것은 상호간의 치열한 공방전 또는 이전투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운의 순환에는 기초적 욕구를 충족하는 시기가 있으니

 

 

다시 돌아와서 얘기이다.

 

모두가 소유해보고자 울어대는 세상이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개인적으로 보나 국가 전체적으로나 보나 운의 순환이 존재하기에 모두 다 때가 되면 어느 정도는 그 욕망을 충족하는 때가 온다는 점이다.

 

60년 순환에 있어 어느 정도 기본을 갖추게 되는 때는 입춘 바닥으로부터 25년이 경과할 무렵이다. 60년을 한 해로 치면 7월 초의 小暑(소서) 무렵이 되는데 이때가 되면 이제 기초 욕구인 먹고 사는 것 즉 의식주가 어느 정도 해소가 된다.

 

 

우리나라는 1989년으로서 기초적인 욕구를 달성했으나

 

 

이를 우리나라에 적용하면 1964년이 입춘 바닥이었기에 25년이 흐른 1989년이 국운의 소서였다. 그때부터는 당장 급한 먹고 사는 문제가 많이 좋아졌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대충 해결이 되자 정부는 바로 그 해 1989년에 해외여행자유화를 단행했다. 그 이전만 해도 일반인의 해외여행은 피같이 귀한 달러를 소비하고 온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엄격하게 통제를 했다. 그러자 드디어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도 해외를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를 누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해외여행 자유화는 우리가 기초적 욕망 충족 단계에서 그 다음 단계 즉 질적인 욕망 추구로 넘어갔음을 상징하고 있다.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닌 세상이 열리기 시작했던 셈이다.

 

 

2000년대부터 또 다른 투쟁 양상

 

 

1989년으로서 기초적인 욕구를 해결하긴 했으나 가지기 위해 울고 싸우는 투쟁은 조금의 양보도 없이 진행되었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싸움이 시작된 것인데 이 싸움은 다시 10년이 흘러 2000년대로 들어서자 또 다른 국면으로 전환되었으니 양극화와 함께 럭셔리 투쟁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입시나 교육, 취업도 이젠 이른바 돈이 많이 드는 “스펙 쌓기” 싸움으로 변했고 대학진학은 한 판의 시험으로 승부를 보는 정시보다 학생부 종합 전형, 줄여서 학종을 통한 수시 싸움으로 변해갔다. 정시보다 돈도 더 많이 들고 부모들의 부담도 훨씬 큰 저 학종 전쟁판이 벌어진 것이다.

 

어떻게 변해도 또 어떤 룰을 적용해도 경쟁이 치열한 이상 변칙과 반칙은 막을 길이 없는 법, 양보할 까닭이 없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1989년으로서 기본 생활 욕구는 해결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갖고자 울어대는 이 싸움은 조금치도 변함이 없다.

 

 

2010년대가 되자 더욱 각박해지기 시작했으니

 

 

그런데 2010년대로 들어서자 게임의 양상은 또 변해갔다. 국운이 내리막길을 타면서 그 어딜 가도 모든 방면에서 ‘기회의 문’은 좁아져가고 닫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석박사를 취득해도 취업이 되질 않고 미국 유학을 다녀왔어도 마찬가지, 그러자 학생들은 공시족으로 변했고 그 쪽 전장에서 박 터지게 싸우고 있다.

 

일자리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 직장을 두고 기득권 대기업 노조는 맹렬하게 기득권을 지키려는 태세를 보였다. 그 바람에 한 때 나름 사회 정의를 내세우며 큰소리치던 노조들은 비정규직을 포용할 수 없게 되면서 조용히 입을 닫았다. 2000년 초반 한 때 바람을 일으켰던 민노당이 2011년으로서 해체된 일이 상징적이다. ‘노동의 시대’도 사실 그로서 끝이 났다.

 

 

운이란 것은 상승의 흐름도 있지만 반대로 하강의 흐름도 있다. 1989년 기초 욕구를 달성했던 우리 대한민국이었는데 그게 올 해로서 30년이 흘렀다. 이젠 더 가질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그 반대의 흐름이 시작되는 올 해인 것이다.

 

이에 2020년대는 그야말로 처절한 투쟁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또 다시 1960년대의 빈곤으로 되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되진 않아도 흐름은 되풀이된다는 사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도전과 시련의 문턱으로 들어서고 있다. 이제 가지려면 더 많이 울어야 하겠고 또 악을 쓰면서 울다 보면 가지게 되는 날도 언젠가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