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성 화가의 전시회를 보기 위해 오후 2시 조금 넘은 시각 집을 나섰다. 평창동이라 ‘길찾기’로 검색해보니 동작동 집에서 버스를 한 번 갈아타면 되는 코스였고 소요시간은 1시간 20분이었다. 이 정도면 나로선 도시 안의 여행이지 싶었다. 날도 좋고 해서 택시를 타지 않고 그냥 버스를 탔다. (택시요금은 2만3천 원 정도라 하니 2만원은 굳은 셈이다.)
동작대교를 건너 삼각지 쪽으로 해서 숙대입구 정류장에서 갈아탔다. 모처럼의 강북 행이고 특히 평창동 쪽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밝고 화창한 가을 날씨라서 눈이 즐거웠다. 자하문터널을 지날 무렵엔 遠征(원정)을 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눈에 익은 세검정 정자와 개울 저쪽 산언덕의 가을색도 고왔다. 버스가 평창동 고갯길로 접어들자 “야, 진짜 오랜만이네!” 하고 탄성이 나왔다. 평창동 쪽은 거의 20년 정도는 되었을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횡단보도를 건너 언덕길을 올랐다. 허리 교정을 받고 있어 약간 자신감도 생겼던 터라 성능(?)을 시험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평소라면 당연히 택시를 탔겠지만 버스를 택한 이유도 이런 까닭에서였다.
북한산 자락을 올려다보면서 걷다보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지만 하늘의 구름 보는 재미가 즐거웠다. 뭉게구름 위로 비늘구름이 깔렸고 더 위로는 새털구름이 실오라기처럼 풀어져가고 있었다. 주택가의 길이었지만 산도 가깝고 해서 혼자만의 소풍에 나선 기분이었다.
목적지는 누크 갤러리였다. 정직성 작가의 수물 두 번 째 전시전이라 한다. 정직성 작가는 자연순환운명학 강좌에서 만나 인연이 되었지만 나 호호당이 그림에 관심이 큰 터라 더 각별하게 느끼는 인생 후배이다.
도록에서 작품의 이미지를 이미 보았지만 역시 실물은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이번에 작가는 특별히 나전칠기로 된 작품, 옷칠과 영롱한 빛깔의 자개를 박아서 만든 작품들을 소개했는데 실물을 대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훕-하고 숨을 들이켜야 했다.
가장 큰 작품은 흑단색의 옻칠 바탕 위로 은하수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자잘한 자개 조각들이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작품 전체는 굽이치는 파도의 형상이었다. 큰 자개는 파도였고 작은 자개조각은 파도 위로 튀어 오르는 泡沫(포말)이었다.
사진을 아무리 잘 찍어도 원작의 실물감과 디테일을 살려낼 순 없는 법. 작품 앞에 서면 작가가 느껴지지만 이미지 앞에선 그럴 수가 없다. 와보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프랑스 오르세이 미술관을 찾아갔을 때 알게 되었다. 고흐나 세잔, 드가, 로트렉 등의 작품을 접하는 순간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잘 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물론 그건 착각이고 환상이었겠지만 말이다.
나전칠기 작품을 본 뒤 작가의 통상적인 작품, 캔버스에 아크릴과 유채로 된 그림 중에 한 작품이 오랫동안 내 눈길을 끌었다. 이른 봄의 매화 그림이었다. 바탕칠은 블루였고 그 위에 연분홍의 매화가 검은 가지에 매달려 바람에 날리고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꽃과 푸른 허공 사이에 슬쩍슬쩍 회색조의 그린, 풀색이 자리하고 있었다. 꽃과 가지 사이로 비치는 바탕은 블루와 그린이었던 것이다. 초봄 찬바람을 견디는 쑥이나 냉이가 떠올랐다. 초봄이면 냉잇국이 절로 당기는데.
몇 년 전 강원도 작은 절의 주지로 지내는 스님을 찾아갔더니 스님이 냉이차를 내놓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며칠 동안 눈이 맑아졌다. 혈압을 내리고 눈에 좋다더니 헛말이 아니었다. 언젠가 인도 고산지대에서 나는 오리지널 다즐링을 마셨을 때도 눈이 맑았는데 냉이차도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작품을 감상하다 보니 손님들이 몇 찾아왔다. 작가와 관장님이 그분들을 응대해야 했기에 잠시 한 대 피울 겸 해서 갤러리 바깥으로 나왔다. 다시 하늘 구경.
나이 들면서 호호당의 즐거움 중에 가장 큰 것이 매일 매일의 하늘 구경이다. 운명 순환의 입춘을 지나면서부터 더욱 그렇다. 늘 변하는 터라 같은 하늘은 없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날을 제외하면 말이다. 오늘은 맑았지만 구름도 적지 않았다. 몇 년 전 서양 과학자가 쓴 구름에 관한 책도 읽었기에 제법 구름을 볼 줄도 안다.
떠가는 구름이고 빛은 시시각각 변한다. 빛이 순간순간 변한다는 사실은 사람들은 잘 모르고 지낸다. 하지만 야외에 나가서 그림 한 장을 그려보면 충분히 알게 된다. 야외 사생은 빨라야 한 시간은 걸리는데 그 사이에 빛의 상태는 변해도 너무 심하게 변한다.
가령 대상의 배경을 짙은 블루 그레이로 칠했는데 어느새 붉은 그레이로 변해있다. 주인공이 되는 대상의 빛나는 얼굴이 금방 어둡게 변해있어 당황할 때도 있다. 그런 까닭에 야외 사생은 처음 그리기 시작할 때의 기억에 의지해서 그리게 된다. 빛의 상태가 심하게 변해가기 때문이다. 야외 사생은 스피드 작업일 수밖에 없고 바쁘다.
동일한 하늘과 구름을 본 적이 없다. 비슷하긴 하지만 모두가 다르다. 그러니 물리지가 않는다. 마냥 하늘을 보고 있어도 즐겁다. 이런 날엔 버스를 타도 책을 들고 나서지 않는다. 하늘 구경하느라 바쁘다.
북한산 자락에 서있다 보니 멀리 서울 시내 건물들의 실루엣이 연한 보랏빛으로 보였고 그 위로 뭉게구름 한 뭉치가 크게 드리워져 있었다. 아름다웠다. 나는 無常(무상)한 것들을 정말 사랑하는구나! 하는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그렇다,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은 무상한 것들이다. 늘 같지 않고 늘 변해가며 시간이 지나면 있던 그곳에 없는 것들을 사랑한다. 산과 바위 역시 그러하다. 늘 거기에 떡 하니 버티고 섰는 것 같지만 시간 속에서 계절 속에서 늘 변해간다. 그래도 그것들은 오래 그곳에 머문다.
그러나 생명을 가진 것들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순간에 변해가고 흩어져가는 구름들보다야 오래 머물지만 시간에 대한 느낌은 상대적인 것, 늘 내 곁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아도 어느새 멀어져가고 떨어져간다.
문득 9년 전에 이별한 강아지가 생각났다. 말티즈였는데 이름은 가을이, 날이 가을이라서 떠올랐나 싶기도 하다. 산책 갔을 때 쾌활하게 웃던 모습 그리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꼬리를 한 번 쳐주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을이가 죽던 날 일 때문에 외출하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꼬리를 한 번 털썩- 쳐주던 모습이 생각났다. 고개를 들어보니 흰 뭉게구름 사이로 놈의 웃는 모습이 보였다.
이럴 땐 늘 해주는 말이 있다. 가을아, 잘 있지? 그곳은 편안하지? 아빠도 잘 지내고 있어.
내가 그 놈을 기억하는 한 그 놈은 죽었긴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 모두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생명이란 기억해주는 이가 없을 때 비로소 사라지고 소멸한다.
맑은 바람을 쏘이며 피우는 담배는 유난히 맛이 있다. 평창동 주택가, 지나가는 이도 없으니 더욱 좋다. 하늘을 보다가 생각나는 것이 또 있었다. 앞에 보았던 나전칠기로 된 파도그림과 포말 때문이었으리라.
강원도 홍련암 앞의 거센 파도, 겨울이면 거센 파도가 친다. 거대한 물거품과 포말이 검은 바위를 뒤덮는 광경을 보면서 개체로서의 생명이란 저런 것이구나 하는 느낌 또는 깨달음을 얻었던 기억이 났다.
바위에 부딪친 파도는 무수한 포말을 만들어내고 그 하나하나는 물방울이 되어 잠시 허공을 나른다. 그 순간 그 물방울들은 하나의 생명이 된다. 개체이니 하나의 생명이라 간주해도 된다. 그러다가 잠시 후 바위 위로 떨어져서 물로 흘러들어가고 어떤 놈은 바로 물로 들어간다. 저건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크게 하나로서의 물에 합쳐지면 그건 그냥 물이지 개체가 아니다. 생명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저 커다랗게 하나로서의 물은 무어라 할 수 있을까? 죽음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 無(무)라 할 수도 없다. 그냥 근원이라고 해야 할까. 생명의 근원, 커다란 수수께끼.
나 호호당은 1955년, 지금으로부터 64년 전에 물방울이 되어 하늘을 비상하기 시작한 셈이다. 지금은 방향이 오르는 쪽이 아니라 떨어지는 쪽이다. 언젠가 떨어질 것이니 그 순간을 죽음이라 한다면 허공을 날고 있는 이 시간은 삶인 것이다.
그 사이를 두고 긴 시간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시간은 앞에서처럼 상대적이다. 길다 하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홍련암 앞의 물방울이 허공에 떠있는 시간도 마찬가지. 니나 내나.
가을 하늘에 떠있는 구름의 시간도 마찬가지, 지켜보다 보면 어느새 사라져버린다. 미세한 얼음 알갱이로 이루어진 새털구름은 금방 생겨나고 금방 사라진다. 높은 창공에서 실타래처럼 풀어져서 순식간에 허공 속으로 녹아버린다.
찾아왔던 손님들이 떠나가자 갤러리는 마감을 했고 정직성 작가는 나를 차로 태워다 주었다. 헤어진 뒤 작업실로 들어가면서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었구나 싶었다. 좋은 작품을 감상했고 10월 중순의 하늘을 메우고 있는 구름들과 투명한 하늘의 푸른 저 빛을 한껏 즐겼으니 무얼 더 바라랴! 오늘 하루 또한 일생을 통해 절정의 하루였던 것이다.
가을 소풍이었다. 일생 또한 소풍과 같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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