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의 시간은 재미난 에필로그가 되길...
이제 63년하고도 6개월을 살았으니 대충 살만큼 살았다. 지금부터의 삶은 일종의 에필로그일 수 있겠다.
소설을 읽다가 어느새 푹 빠져들 때가 있다, 그런 소설을 다 읽었을 때는 미처 감흥이 가시지 않는다. 그래서 말미에서 작가의 後記(후기) 또는 에필로그를 찾게 되는데 그야말로 진짜 제 맛이다. 나 호호당 역시 재미있게 잘 살아왔기에 앞으로의 삶이 그런 에필로그가 되었으면 한다.
먼저 감탄부터 한다. 저 긴 세월 어떻게 크게 다치지 않고 어려운 병에도 걸리지 않고 지금껏 건강하게 잘 살아올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절로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오늘날 거의 독가스로 취급받는 담배, 그걸 스무 살부터 하루에 담배 2갑씩 빠짐없이 꼬박 피워왔으니 개피로 추산하면 무려 657,000 개피가 넘건만 그런대로 멀쩡한 것만 해도 신기한 일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대단하고 강인한 생명체인가, 전체적인 통합성을 유지한 채 끊임없이 再生(재생)을 반복하면서 이어져오는 이 엄청난 생명의 힘. 나는 내 몸과 마음에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거듭해서 고마워해야 하리라.
잘 산다는 것이란
앞에서 재미있게 잘 살아왔다고 말했지만 그게 편안히 살아왔다는 말은 아니다. 돌이켜보면 어려운 고비가 수도 없이 많았고 이젠 정말 끝이구나 싶었던 순간도 두어 번 있었다. 그렇기에 산다는 것은 苦生(고생)이라 단정한다. 이에 잘 산다는 것은 고생을 거듭하는 가운데 그래도 더 잘 살아보겠다고 애를 쓰는 것, 그게 잘 사는 것이라 여긴다.
잘 산다는 것, 잘 살려고 애를 쓰는 것은 사실 끝이 없는 길이다. 굳이 따지자면 숨을 거둘 때만이 끝이 난다.
禪僧(선승)의 수행에 끝이 없듯이 우리들의 고생도 끝이 없으니
그와 관련해서 스님들의 수행에 대해 얘기해보자.
스님들에게 왜 수행을 하시느냐 물어볼 것 같으면 깨달음을 얻기 위함이란다. 하지만 저 대답은 본의 아닌 거짓말이다. 실은 깨달았기에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행이 수단이고 깨달음이 목적인 것이 아니라 수행이 바로 깨달음이고 깨달았기에 수행하는 것이다. 수단과 목적이 하나인 것이다.
수행이 끝이 없듯 깨달음도 끝이 없다. 깨달음에 끝이 없기에 수행 또한 끝이 없다. 가령 이제 나는 정말로 깨달았다고 생각이 든다면 그 순간 그 깨달음은 限定(한정)이 된다. 그걸 두고 불교에선 魔境(마경)이라 부른다. 마음에 魔(마)가 낀 것이다. 수행에 끝이 없고 깨달음에도 끝이 없다. 그건 끝나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불교에선 완전한 깨달음이란 말을 제시하고 있다. 究竟覺(구경각)이라고도 하고 梵語(범어)의 음을 빌려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또는 범어의 뜻을 풀어서 無上正等正覺(무상정등정각), 더 이상 위가 없는 큰 깨달음인 것인데 불교에선 그런 깨달음을 얻은 자를 일러 ‘부처’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은 결국 하나의 方便(방편)이고 꼬드김이다. 그걸 얻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지만 그 수행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깨달음에 끝이 없기 때문이다.
동쪽으로 갈 순 있어도 동쪽의 끝에 도달할 수 없으니
사실 그 누구도 구경의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 한다, 또는 아니 한다. 그 말은 동쪽 끝으로 가서 닿으라고 하는 주문과도 같다. 지구는 둥글기에 동쪽을 향해 걸을 순 있어도 동쪽의 끝엔 닿을 수가 없는 것과 같다.
불교의 가르침은 동쪽 끝까지 가보라는 하는 것이고 따라서 수행자로 하여금 수행을 이어가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방편인 것이다. 따라서 궁극의 깨달음을 얻는 자는 없다. 길을 가는 도중에 숨을 내려놓을 뿐이다.
수행과 깨달음이 하나라는 사실을 나 호호당이 알게 된 것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훌륭한 분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걸 알고 나니 스님은 수행을 하지만 스님이 아닌 우리 역시 수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살면서 부대끼는 苦生(고생)이야말로 바로 수행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스님들이 좌선을 포함하여 겪는 모든 것이 수행인 것이니 그건 스님의 고생인 것이다.
우리 일반인들은 더 잘 살아보겠다고 애를 쓰는 것이고 스님들은 더 없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스님들은 더 없는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행하는 것이니 알면서 속아주는 것이고 일반인들은 그냥 잘 살아보겠다고 애를 쓰는 것이니 몰라서 속고 사는 차이라 하겠다.
나 호호당은 물론 일반인이다. 그런데 글머리에서 얘기했듯 63년과 6개월을 살아오다 보니 출가하지 않았어도 알아차리게 되었다. 이 역시 누적된 시간의 功力(공력)이라 하겠다.
남은 삶도 잘 살아볼 마음이다, 그리고 고생을 마다할 생각도 이젠 없다. 고생을 겪으며 애를 쓰는 것이 바로 그게 잘 사는 것이란 것을 이젠 너무나도 명백하게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공부를 건성으로 하면 시험에 떨어지나니
우리들은 힘든 고생을 겪고 있을 때라든지 눈앞의 현실이 그저 팍팍하고 답답할 때 ‘아이고 지겹다, 세월아 어서 가거라, 빨리 가거라’ 이런 푸념을 하기도 한다. 또 곁의 누군가 힘들어하면 ‘어서 빨리 세월이 가야지’ 하는 말을 해준다.
그 마음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것은 수행을 약식으로 마치겠다는 것과 같다. 절차대로 수행(고생)을 충실히 마쳐야만 그에 따른 공부가 충실해지듯, 대충 약식으로 마치면 공부 또한 대충으로 끝날 것이 아닌가. 그러니 그건 正道(정도)가 아니라 邪道(사도)가 된다.
힘든 세월 빨리 가라고 하면 인생도 빨리 가나니
힘든 세월 지겨워서 빨리 가기를 바랄 것 같으면 또 한 가지 나쁜 점이 있다. 그건 눈앞의 시간, 현실을 싫어하고 기피하는 마음이 든다는 점이다.
우리가 가진 것을 잘 생각해볼 것 같으면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남은 세월 또는 시간이 전부라는 점이다. 피와도 같은 시간인 것이다. 그런데 그걸 현실이 힘들다고 할 것 같으면 그야말로 차 떼고 포 떼고 나면 남는 것이 얼마 되지 않는 것과 같은 삶이 된다는 점이다.
자연순환운명학으 이치로 말하면 60년 순환에서 좋다 싶은 날은 10년이다. 기껏해야 앞뒤로 더 붙이면 15년이다. 반대로 죽겠다 싶을 정도로 힘든 날 또한 10년이고 앞뒤로 붙이면 15년이다. 총량 불변인 것이다.
그런데 그 좋은 날 10년 혹은 15년만을 목 빼고 기다리는 것은 나머지 45년을 버리겠다는 뜻이 된다는 점이다. 그냥 가볍게 여기거나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살다 보면 인생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주어진 삶의 나날을 알뜰하게 보내야만 죽을 때 후회가 없을 터인데 말이다.
이에 나 호호당은 당장의 시간과 일이 힘들든 즐겁든 관계하지 않는다. 인생에 있어 모든 일은 좋고 나쁨을 떠나 다 나름의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계절을 모두 즐겨야 한 해를 잘 보내는 것이니
좋은 때와 힘든 때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 모두를 좋아하고 받아들인다는 말과 같다.
봄은 힘든 계절이다, 60년 순환에 있어 15년이 봄이다. 여름은 도전하는 계절이다, 이 또한 15년이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로서 15년이고 겨울은 죽음의 계절로서 또한 15년이다.
그러니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만을 바란다면 그건 가을만 살아보겠다는 것이고 나머지 봄과 여름 겨울을 버리겠다는 마음이니 그래서야 60년 중에 45년을 버리겠다는 것이 된다. 그러면 인생은 정말 짧아지고 만다.
말이 제법 길어졌다. 한 가지만 더 얘기해본다.
마음에 끼어드는 魔障(마장), 心魔(심마)에 대해
마음에 끼어드는 魔障(마장), 자칫 잘 못 생각을 하는 바람에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이나 해볼까’ 또는 ‘-나 해볼까’ 하는 생각이 바로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心魔(심마)가 된다는 점이다.
흔히 우리들이 어떤 일을 하다가 힘겹고 지겨우면 에이 다 때려치우고 핑계 삼아 가령 공부나 해볼까, 이민이나 가볼까, 직장 때려치우고 작은 가게나 차려볼까, 예전엔 직장 다니기 싫은 젊은 여성들이 하던 말, 시집이나 갈까 등등 바로 이런 생각이 마음에 스며드는 魔障(마장)이다.
이런 생각은 눈앞의 일이 어렵고 힘들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다. 그러니 그냥 불평에 그친다면 몰라도 그런 생각 자주 해보다 보면 진짜 하게 되는데 그러면 마장에 제대로 걸려든 것이 된다. 낚인 것이다.
‘이나’ 또는 ‘-나’란 조사가 붙은 일은 해서 되는 법이 없다는 사실, 절대 없다, 장담한다. 그런 일은 잘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눈앞의 일에서 도피하고 싶은 심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공부나 해볼까 해서 공부하는 자 치고 공부 잘 하는 이 없고, 가게나 차려볼까 해서 가게를 차린 자 중에 성공한 이 없다, 그건 그야말로 자살골이다.
이제 글을 정리한다.
오늘의 얘기는 63년을 넘게 살아온 호호당, 다시 말해서 구력이 좀 생기다 보니 절로 알게 된 것에 관한 얘기였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독자들께서 너무 고스란히 받아들일 이유도 없다고 본다. 흘려들어도 좋다는 말이다.
다만 더 살아보다 보면, 세월이 좀 흐르다 보면 언젠가 나 호호당의 말이 문득 생각이 나서 ‘그게 그러네’ 하면서 피식- 웃는 날이 있을 거란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리라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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