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우울증이란 질병
오후 1시 경, 나로선 이제야 일어나서 아점을 먹을 시각, BBC 다큐를 보고 있었다. “트러스트 미, 아임 어 닥터”였다. 겨울 우울증에 대한 것이었다. 영어로 Seasonal affective disorder, 줄여서 SAD 라고 하는 질병이었다. (영문 이니셜이 나름 재치가 있다.)
겨울이 되면 심한 우울증에 빠지는 병이란 것이었다. 그냥 당연한 것 같은데 서구 사회에선 나름 치료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었다. 일조 시간이 짧으면 우울해지기 마련인데 위도가 높은 유럽의 겨울은 일조 시간이 정말 짧다.
런던의 경우 오늘 현재 일출은 아침 8시 3분이고 일몰은 오후 4시 14분, 일조시간이 겨우 8시간 11분이다. 노르웨이의 오슬로 같은 경우 일조시간이 겨우 6시간 30분에 불과하다.
그에 반해 우리의 경우 일출은 7시 47분이고 일몰은 오후 5시 33분, 일조시간이 9시간 46분이니 런던보다 1시간 35분이나 길고 오슬로보다 3시간이나 길다.
그러니 겨울 우울증 같은 것이 우리보다 분명 심할 것이고 사람에 따라 병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해지기도 하겠다. 치료법 역시 빛이다. 아침 햇빛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아니면 집에서 광도가 강한 불빛을 쪼이라는 것이었다.
겨울 생은 기본적으로 우울증 체질
겨울은 그 본질에 있어 죽음의 계절이다. 모든 것이 죽었거나 죽은 듯 지내는 계절이니 인간이라고 예외일 리 없다.
겨울 우울증에 걸릴 확률은 겨울에 태어난 사람이 더 높다. 타고날 때부터 이미 우울증 기질을 가지고 있고, 이에 겨울이 되면 다른 계절, 특히 여름 생에 비해 더 울적해진다.
계절에 따른 자살의 빈도
작업실에 나와 위키를 검색하다보니 겨울 우울증과 관련하여 연관 글이 있어 보니 계절에 따른 自殺率(자살률)에 관한 것이었다.
읽기 전에 그거야 당연히 봄이지 하고 찍었다. 본문을 읽어보니 역시 늦은 봄에서 초여름에 자살률이 가장 높다고 나와 있었다.
일반적으로 우울해지는 겨울을 예상하겠지만 답은 늦봄과 초여름이란 것이었다. 의학자들은 이런저런 요인을 감안하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가장 기본적인 것을 놓치는 경향이 있다.
자연순환운명학의 견지에서 얘기해본다.
겨울은 밤이 길고 해가 짧아서 우울해지긴 하지만 극단적인 선택을 하진 못한다. 자살이 보통 일인가 말이다. 그건 순간적이긴 하나 강력한 동기나 충동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울적하게 가라앉는 겨울엔 충동도 약하기 때문에 겨울에 자살률은 오히려 낮다.
그러나 3월 22일 경의 춘분이 되면 밤보다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춘분 무렵은 사람의 정서가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하는 때가 된다. 그렇기에 그로부터 60일 동안 사람의 정서는 그야말로 뒤죽박죽이다. 용기를 내기도 하고 때론 비관적인 생각도 들고 등등, 그러다 보니 어떤 이는 자살을 택하는 것이다.
3월 22일 경의 춘분이야말로 정서 변화의 때
요점은 즉 변화하는 때가 가장 어렵다는 얘기이다.
우리 대부분의 정서는 정서적으로 춘분 무렵이 되면 짜증이 속에서 치솟는다. 춘곤증이 가장 극심한 때이기에 육체적으로도 힘들다. 게다가 이 무렵이면 모든 것이 급작스럽게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제 더 이상 막연한 생각들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서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이제 힘을 내어야 하는 때가 바로 춘분 무렵부터인 것이다. 그렇기에 춘분이 지나면 아, 올 한 해도 힘을 내어 살아가야 하는구나, 지긋지긋한 현실을 버텨야 하는구나 하는 자각이 든다.
그러니 짜증이 난다.
동서양 공히 봄을 두고 새로운 희망이 샘솟는 계절이라 말하지만 사실 그건 그냥 뻥이다. 立春大吉(입춘대길)이라든가 建陽多慶(건양다경)이라든가 하는 것은 그냥 우리식 덕담일 뿐이다. 좋게 해석하자면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힘들어가는 계절이기에 위로 차원에서 하는 사탕발림이라 하겠다.
봄은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계절이다, 그러니 그게 쉬울 까닭이 없다, 수난의 계절이다. 기독교에서 부활절 또는 오순절 등등 하는 것을 봐도 그렇다, 모두 이 무렵이 힘든 때임을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이에 늦은 봄과 초여름에 자살이 많은 것은 결국 주어진 한 해를 부활해서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라 봐도 된다는 얘기이다.
정초에 세우는 계획은 요망사항일 뿐이다.
지금은 1월 정초이다.
사람들은 이 무렵에 나름 어떤 결심을 많이 한다. 새해 해맞이를 가서라든가 아니면 혼자 조용히 길을 걷다가 갑자기 어떤 목표를 세우거나 결심을 한다. 가령 담배를 끊겠다거나 새해엔 더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 올 해엔 꼭 취업에 성공하겠다는 결심 등등.
하지만 이맘때엔 하는 결심이나 목표 세우기는 사실 지켜질 가능성이 대단히 희박하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길고 길 겨울잠을 자다가 잠시 꾸어본 꿈과도 같다.
그렇기에 나 호호당은 누군가 정초에 올해엔 담배를 끊겠다거나 어떤 결심을 했다고 말하면 그다지 귀담아 듣지 않는다. 그냥 요망사항 정도로 받아들인다.
정초의 플랜이 왜 구현 가능성이 적을까? 이 점에 대해 얘기해보자.
플랜이란 기본적으로 비전(Vision)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비전이 무엇인가? 문자 그대로 앞날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데 1월은 축월이다. 한 해를 통해 가장 어둡고 컴컴한 때가 아닌가. 모든 것이 잠들고 죽어있는 때이기에 사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많지 않고 머릿속으로 즉 상상으로 그려보는 것이 더 많은 때가 축월이다.
상상으로 그려본 그림을 뭐라 하는가. 상상화이다. 달리 말하면 환타지 그림이다.
그러니 구체적인 방법론도 애매할 것이고 계획을 밀고 나갈 의지나 체력 같은 것이 과연 내게 있는지도 잘 모른다. 그냥 요망사항을 나열하는 게 고작이다. 일례로 올 해엔 공부를 잘 했으면 좋겠다는 것은 요망사항이지 계획이 될 순 없다는 얘기이다.
정초에 우리들은 요망사항을 느끼고 그것을 계획이라고 포장하는 것이다.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해나가려면 그 실천 행동이 일종의 습관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전혀 습관이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계획을 세운다 한들 그 계획이 실천 가능할 까닭이 없다.
공부 못 하던 학생이 정초에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적을 올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하자. 성적을 올리는 것은 고사하고 그간에 열심히 하지 못했던 행동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새해가 되었다고 달라진 것 전혀 없는데 말이다.
어느 한 순간 ‘난 할 수 있어’ 하는 말을 백 번 천 번 외친다고 해서 일이 되지는 않는다. 매일 매일 그런 말을 반복하면서 일 년 내내 끈질기게 들러붙을 때 비로소 일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열심히 하는 것이 습관이 될 때 가능하다. 그러니 다시 말해서 정초의 계획은 그냥 요망사항에 그치는 것이 대부분이다.
연초의 전망 또한 그저 상상화일 뿐
새해가 되면 새 해의 전망에 관한 기사가 많이 만들어진다. 방면의 전문가를 모셔서 얘기를 듣기도 하고 나름 전문가들이 기사를 쓴다.
하지만 그냥 들어두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좋다. 석 달만 지나도 당초의 전망과는 전혀 다른 그림 혹은 광경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일 년을 하루에 비견해보자. 양력 1월은 丑(축)월인데 이는 하루 중에 축시, 즉 새벽 1시 30분부터 3시 30분에 해당된다. 캄캄한 밤이다. 멀리 있는 사물이 보일 까닭이 없다. 그러니 한 밤 중에 날이 밝으면 일어날 일을 전망해본들 그 전망이 잘 맞을 수가 없다는 얘기이다.
떨어져 있는 사물을 보려고 하면 일단 동이 터야 한다. 동트는 시각을 대략 오전 6시 반이라 한다면 그건 3월 22일의 춘분과도 같다. 이에 해가 떠서 밝은 시각은 빨라야 7시 반일 것이니 그건 양력 4월이다.
따라서 새 해의 일은 4월 정도가 되어야만 그나마 윤곽이 드러난다.
그러니 연초 또는 정초의 새 해 전망은 그냥 상상 속의 그림인 셈이다. 물론 방면의 전문가가 그린 것이지만 말이다. 아울러 정초의 계획 역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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