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람을 맞으며 책을 사오다.
낮부터 기온이 내려간다. 이건 칼바람, 고개를 파묻고 어깨를 움츠려서 걷는다. 목도리 하고 나올 것을, 잠시 후회한다. 교고쿠 나쓰히코의 後(후)항설백물어가 번역 출간되었다는 신문의 소개를 보고 강남 교보문고를 들렀다 오는 길에서다.
항설백물어, 한자로 巷說百物語, 巷間(항간)에 전해지는 백가지 이야기란 뜻이다. 처음에 항설백물어가 나왔는데 인기를 얻게 되자 계속 속편들이 나오고 있다. 그야말로 天才(천재)작가가 아닌가 싶다. 多作(다작)인데 일정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놀랍다,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생각과 아이디어가 샘솟는 모양이다.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생일을 검색해보니 1963년 3월 26일생, 癸卯(계묘)년 乙卯(을묘)월 戊辰(무진)일이다. 그간의 흐름으로 볼 때 1998년 戊寅(무인)년이 기의 절정인 立秋(입추)였음을 알 수 있다.
1994년에 데뷔한 이래 많은 상을 받았으며 그의 작품은 만화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올 해가 2019년이니 이제 운세는 大雪(대설)이다. 슬슬 힘이 빠질 때가 가까웠다는 생각을 해본다.
책도 상품이기에 유혹을 해온다.
시중에 나온 모든 상품들은 나름의 유혹질을 해댄다. 나 어때?, 나를 사보시지 그래, 이런 식이다. 유혹하지 않는 상품은 상품이 아니다. 그러니 모든 상품은 화장을 하고 차려 입고 있어야만 한다.
책 역시 마찬가지, 그렇기에 책방에 들러 제목과 표지를 눈으로 훑어 가다보면 나름의 유혹이 담겨있다. 우리나라는 책을 잘 읽지 않는 나라, 그 바람에 책 표지와 장정엔 나름 최대한의 功(공)이 실려 있다. 하지만 역시 책은 제목이 중요하다.
하지만 수 십 년간 책을 고르고 읽어온 나로선 어설픈 유혹엔 넘어가지 않는다. 내가 닳고 달아서 그런 것인지 대부분의 책 제목들은 그저 얍삽하게만 여겨진다. 영화를 많이 보다 보면 포스터만 봐도 얼추 눈치를 차리듯이 책 역시 마찬가지이다.
얍삽한 제목은 역시 수필집에 많다. 대부분 몇 년 사이 유행하는 문구나 어투를 약간 변형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아무 것도 없지만 뭔가 있어 보이는 투의 제목.
그런가 하면 최근엔 소위 인문학 책이란 것 역시 마찬가지, 국내 저자들이 쓴 인문학 책은 그 제목이 보는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 물론 한 권이라도 더 팔아보기 위해 그런 제목을 달아야 하는 출판사의 고충도 이해가 가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니 수필집이나 국내 저자의 인문학 책은 어지간하면 바이 패스.
소설책은 사람을 유혹하기가 어렵다.
문제는 소설이다.
소설 역시 책으로 만들어졌으니 당연히 상품이다. 그런데 유혹의 향기를 내기가 정말 어렵다. 표지 장정과 약간의 서평을 제외하면 전혀 정보가 없다.
유명작가라면 그 자체가 셀링 포인트가 되지만 그렇지 않은 작가의 소설은 정말 팔리기가 어렵다. 다른 책처럼 지식을 전달하는 것도 아니요 펼쳐보면 그냥 그저 그런 글과 문장이 인쇄되어 있는 것이 소설이다.
유명작가가 아닐 경우 그 소설이 만족감을 줄 것인지 여부에 대해 책갈피를 들춰본다고 알 수 있지가 않다. 소설은 다 읽어야지만 그 소설이 어떤지를 알 수 있으니 구매시점에선 참으로 난감하다. 서평이란 것이 몇 문장 뒷면에 붙어있지만 그거야 모르는 일.
그러니 잘 모르는 작가나 처음 대하는 작가의 소설책을 구매한다는 것은 사실 무모한 투기행위에 가깝다. 그러니 그냥 운이다.
그에 비해 시집은 구매 결정이 상당히 수월하다. 몇 편 읽어보면 흥취를 느낄 수 있는지 아닌지를 금방 가늠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지금은 내가 ‘빠’가 되어버린 교고쿠의 소설도 처음엔 표지 장정에 끌려서 샀다. 요괴 그림이 그려져 있어 그런대로 흥미가 있을 것 같아서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샀다. 물론 읽으면서 이건 대박인데 싶었지만 말이다.
책이 좋다 싶을 때 내가 표하는 최고의 敬意(경의)는 책의 문장을 소리 내어 낭독하는 것이다. 낭독은 目讀(목독)보다 읽는 시간이 2-3배는 걸린다. 하지만 그만큼 얻는 즐거움도 크다.
글과 내용이 시시하다 싶으면 눈으로 다 읽는 것이 아니라 건너뛰기를 한다. 그럼에도 아니다 싶으면 마지막 페이지 근처로 가서 좀 살펴보다가 던져버린다. 그리고 다음 해 2월 20일 경의 우수가 되면 내다버린다.
서글프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한 이야기
또 다른 이야기를 해본다.
‘서양중세사’란 책이 있다. 원 제목은 Western Europe in the Middle Ages, 300-1475 이니 엄밀히 말하면 ‘서구 중세사’라 해야 할 것이다. 1970년 미국에서 출간되었는데, 집문당이란 국내 출판사에서 아주 오래 전에 번역본을 내었다.
번역도 대단히 훌륭하고 내용은 더더욱 좋다. 서양 중세사 입문 텍스트라 할 수 있는 이 책은 대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뿐만 아니라 국내의 경우 서양 중세 전반을 다루고 있는 국내 유일한 입문서이기도 하다. 그러니 국내에서 서양사학과를 전공한 모든 학생은 이 책으로 공부를 시작한다고 한다.
아쉬운 것은 서양 중세를 개괄하는 책이라곤 이 책이 전부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서양 또는 西歐(서구)란 사실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근대화라 하면 서구 근대화나 별반 차이가 없지 않은가. 서유럽의 중세를 모르고서야 어떻게 서유럽의 근대와 오늘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니 그 거대한 존재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서유럽 중세사에 대해 입문할 수 있는 번역된 텍스트가 겨우 이 한 권밖에 없다는 점은 사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솔직히 내겐 평생을 두고 충격적이다.
게다가 서양 역사에 관해 다양한 책을 읽어오면서 눈이 넓어지다 보니 앞서의 저 책 역시 부분적으로 저자의 치우친 견해도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런데 국내의 경우 저 책이 유일하니 저자의 편견 역시 고스란히 입문자들에게 옮아왔을 것이라 생각하면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좀 더 확장하면 서양 중세를 개관하는 책이 달랑 한 권밖에 없다보니 우리 사회 전체가 서양 또는 서구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이해에도 일정한 한계가 주어질 수밖에 없으리란 생각도 하게 된다.
하지만 비판은 그만 두자. 어쩌다 책 얘기를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이 또한 세월이 가면 나아지겠지 하는 마음이다.
요괴는 세상엔 없지만 그렇기에...
바야흐로 丑(축)월이다. 한 해를 통해 가장 어둡고 추운 때이다. 가만히 있어도 갖가지 공상들이 허공에서 스물스물 머릿속으로 배어든다. 쉬이 잠들지 못하는 긴 밤, 시간을 메울 긴 이야기책이 필요하다. 그러니 교고쿠 나쓰히코의 요괴 괴담 소설을 찾게 된다.
교고쿠의 주장은 참 말이 된다. 요괴는 세상에 없다, 하지만 있다고 여기면서 사는 것이 재미도 있고 나아가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이다. 가히 환타지 문학의 정신 또는 스피릿(spirit)이 아닐까 싶다.
축월에 꾸는 꿈은 저마다 비밀이어서
축월의 땅은 꽁꽁 얼어붙어서 딱딱하다. 몇 년 전 서울 교외로 나가서 포장되지 않은 맨땅을 맨발로 밟아본 적이 있다. 차갑고 딱딱해서 내가 알던 폭신한 땅이 아니었다. 땅이 사람과 소통할 마음이 없구나! 땅이 거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두기로 했다. 땅의 마음은 지표면으로 나와 있지 않고 깊은 땅속으로 들어가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속에서 저만의 꿈을 꾸고 있구나 하는 생각.
그 꿈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땅은 외면하고 있었다. 그래, 저만의 꿈을 꾸고 있겠다는데 굳이 내가 성가시게 할 것은 없지 싶었다.
시내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땅이 저만의 꿈을 꾸듯이 축월엔 나도 나만의 꿈을 꾸어야지 했다. 축월의 모든 꿈은 그러니까 비밀인 것이다.
글을 마쳤으니 오늘 사온 후항설백물어 속으로 즐겁게 빠져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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