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보낸다는 것
이제 한 해가 다 갔다. 2023 癸卯(계묘)년은 곧 과거의 年表(연표)가 될 것이고 2024 甲辰(갑진)년이 진행형이 될 참이다.
젊어선 한 해가 간다는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한 해가 갔다? 뭐 그게 어떻다고, 또 새해가 올 거 아냐? 그냥 이어져가는 거지 정도로만 치부했다.
중년이 되자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여러 생각과 감정이 들게 되었다. 이루어 놓은 것도 없이 나이만 들어가네, 중년이 되면 뭐 좀 좋은 일이 있을 줄 알았더니 현실은 더 어려워지고 있으니 허송세월했구나 하는 자괴감 같은 심정도 들었다. 또 한 편으론 뭐 이렇게 살다가 가는 거지 뭐, 인생 다 그렇지 하면서 드라이한 생각, 마른 감정도 가져보았다.
삶의 햇수가 좀 되다 보니
이제 나 호호당 내년이면 세는 나이로 일흔, 즉 칠십이다. 옛날엔 70까지 사는 일이 드물다 해서 古來稀(고래희)라 할 정도였으니 일단 長壽(장수)한 셈이라 하겠으나 오늘의 기준에서 얘기하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그냥 좀 나이가 있는 아저씨 정도(?).
하지만 내 스스로 느끼기로 이젠 적지 아니 살았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가령 호호당이 죽었다 하자, 그럴 것 같으면 나를 아는 사람들은 저 양반 조금 일찍 세상을 떠났네, 아쉽다 하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어디까지나 평균의 개념이 적용되는 법이니 90까지 살았다 하면 장수했다고 할 것이고 80 중반에 운명하셨다 하면 살만큼 살다 가셨다 할 것이며 70 중반이면 좀 빠르다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생각일 것이다.
시대가 가니 사람도 떠나네
글머리에서부터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연말이 가까울 무렵 갑자기 생각하지 않은 訃音(부음)들이 많아서이다. 얼마 전 20세기 후반의 글로벌 세계를 만들어낸 주요 인물 중의 한 사람인 헨리 키신저 박사가 죽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키신저 박사는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70년대 후반 중국을 개방시켜서 미국 쪽으로 끌어들인 중미동맹을 성사시켰고 그를 통해 1991년말 소련의 붕괴를 유도해내는 커다란 업적을 만들어낸 핵심 당사자였다.
그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아 이제 세월이 가도 많이 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글로벌화란 것을 들여다보면 결국 미국이 중국을 끌어들인 동맹체제로부터 시작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 미중 관계는 삐걱대면서 또 다시 새로운 관계 설정을 향해 움직여가고 있으니 달라진 세상인 것이고 이에 옛 사람인 키신저는 떠났다.
그런가 하면 나 호호당의 청춘 시절 국내에서도 엄청난 히트를 쳤던 미국 할리우드 로맨스 영화의 클래식인 “러브 스토리”의 남자주인공 “라이언 오닐”이 82세의 나이로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러브 스토리, 에릭 시걸이란 작가가 쓴 소설이었는데 히트를 치자마자 즉각 영화로 만들어져서 또 다시 초대박이 난 작품이다. 영화 제작비의 무려 62배에 달하는 수익을 만들었던 영화인데 그도 그럴 것이 두 대학생 남녀의 순애보를 그린 영화인 탓에 특별히 들어간 비용이 없는 저렴한 영화였다, 그런데 엄청나게 흥행했으니 초대박이었다.
라이언 오닐이 죽었으니 순애보의 러브 스토리도 끝이 났다. 이 또한 한 시대가 지나갔음을 알리고 있다.
글로벌 구도를 스케치했던 희대의 전략가 키신저가 죽었고 청순한 사랑의 대명사였던 러브 스토리의 라이언 오닐이 죽었으니 마치 나 호호당이 살았던 시대가 이제 끝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시 말해서 이제 나 호호당도 멀지 않아 옛사람이 되겠구나 하는 약간 서운한 감정.
자승스님, 그렇게 가시면 어떡합니까?
그런가 하면 진짜로 충격적인 일은 자승스님의 돌연한 타계이다.
종단 쪽에선 소신공양으로 정리하고 있으나 그게 참 어이가 없다. 그 것의 옮고 그름을 떠나서 요사채에 휘발유를 두르고 불을 붙여서 목숨을 끊었으니 무섭고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생사가 없다 하나 생사 없는 곳이 없구나, 저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반야심경에선 不生不滅(불생불멸)이라 해서 생사란 원래 없다는 식의 말을 하고 있지만 현실의 세상은 어딜 가나 죽기 아니면 살기의 아귀다툼과 이전투구란 식으로 해석이 되니 처절한 심정마저 든다. 많은 생각이 들지만 감히 판단하기도 어렵고 그저 며칠간 먹먹할 따름이다.
왜 그랬을까? 궁금해서 생년월일을 찾아보니 나무위키에 1954년 4월 23일이라 되어 있고 춘천시 출생이라 되어 있다. 그 연도면 음력일 가능성이 높아서 그렇게 검색해보니 甲午(갑오)년 己巳(기사)월 辛巳(신사)일이 된다.
음력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 2001년이 입추였을 것이니 秋分(추분)인 2009년에 총무원장에 취임했고 또 재선되어 2017년까지 재임한 것이 된다. 역대 총무원장 중에서 최고 실세였던 분이 갑자기 무슨 사유로 저처럼 가야 했을까? 그저 올해 2023년은 자승 스님의 운세에 있어 冬至(동지)인 것으로 판단된다. 더 이상 구할 것이 없으니 세상과 인연을 끊은 것인가? 그간 무엇을 구했으며 이제 와서 달리 구할 것이 없다는 저 말은 또 무슨 의미일까?
게다가 스님의 죽음을 둘러싸고 정치 쪽 특히 좌파진영의 날선 비판도 많다. 그간 잘 몰랐지만 스님이 평소 그쪽과는 친하지 않았던 모양인데 아무튼 우리 사회는 종교계에도 날카로운 진영싸움이 벌어지고 있으니 생사 없는 곳이 없다는 스님의 말이 실감이 간다.
그런데 스님을 다비했더니 푸른 옥구슬과 같은 사리가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이 나왔다고 한다. 나무아미타불!
삶은 거친 압력 속에 놓여있기에
하지만 자승스님의 선택은 우리와 같은 보통의 사람들에겐 여전히 아쉽고 실망스러운 바가 있다. 우리들이 기독교든 불교든 그 어떤 종교에서든 기대하는 것은 과학적 합리성이 아니라 희망의 메시지인 까닭이다. 더불어서 최근 우리 사회의 종교계 인사들이나 종단이 정치적 좌우 이념의 싸움터가 되고 있는 것 역시 대단히 실망스럽다.
종교의 근원적 역할은 우리들에게 위안을 제시하는데 있다. 왜냐면 삶의 현장은 늘 거친 압력 즉 暴壓(폭압)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삶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그를 기반으로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영위하려면 우리들은 늘 다양한 압력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거친 삶의 현장을 지키고 또 이어가려면 다소 근거가 희박하더라도 그 압력을 견뎌낼 수 있는 희망을 지녀야만 한다. 동시에 우리 서로가 힘들 때마다 위안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마음 즉 사랑이 있어야만 삶의 거친 압력으로부터 견디고 또 다시 내일을 기약할 수가 있다.
해를 보낸다는 말, 다시 새겨보자.
헌 해를 보낸다는 말, 그 말 속에는 묵은해를 보내면서 맞이했던 모든 어려운 일들과 좌절된 희망. 또 그로 인한 상처들도 함께 실려 가기를 기원하는 바람이 깃들어있다.
그래야만 새해에는 또 다시 말끔하게 언제 힘들고 아픈 일이 있었을까 싶은 멀쩡한 표정과 자세로 새로운 한 해의 기원과 희망을 다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을 버리지 말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야만
올 한 해는 다를 거야, 아니 달라야 해! 하는 다짐과 기원 말이다. 물론 그 다짐과 기원은 하루하루 지나가면서 또 다시 변색되고 빛이 바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늘 어떤 지점을 기점으로 삼아 새로운 희망을 품어보는 일을 멈출 수는 없다는 얘기이다.
어려선 잘 모르겠지만 철이 들고 세파에 시달리다 보면 한 번 주어진 삶을 이어간다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뼛속 깊이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 삶의 경륜이 생기고 쌓이다 보면 막연하지만 미래에 대해 희망하고 기원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지닌 가장 강한 힘이라는 사실, 아울러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주는 마음이야말로 이 세상이 유지되는 원동력이란 것을 알게 된다.
올 한 해 나 호호당으로선 여러모로 힘든 해였다. 건강 문제로 인해 담배를 끊었는데 그 금단 증세가 실로 엄청났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의욕이 저하되면서 심한 우울증도 함께 왔다. 50년을 피워온 담배였으니 그걸 그만 두는 것이 결코 만만할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껏 금연을 유지하고 있고 아마도 끝내 금연에 성공할 거란 예상을 해본다.
올 겨울 보내고 내년 봄이면 다시 상담 사무실도 낼 생각이다. 그리고 예전처럼 글도 자주 쓰고 그림도 열심히 그려볼 생각이다. 나 호호당 또한 희망을 안고 살아가야 하고 또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삶이 이어지는 한 말이다.
독자님들에게 감사 인사 드리면서
내년에는 독자님들과 그 주변 그리고 가정에 좋은 일이 이어지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송년의 인사를 마친다. 올 한 해 많은 점에서 부진했지만 그럼에도 독자님들의 지지와 성원, 메일을 통해 보내오는 응원의 메시지들이 있었다, 그저 감사드리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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