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면 70, 쉽게 실감이 나지 않는 일

 

 

곧 추석, 연휴가 끝나면 올 한 해도 거의 다 지난 셈이다. 내년이면 세는 나이로 일흔 즉 70이 된다. 옛날엔 70이면 古來稀(고래희)라 해서 드물다 했고 나 또한 예전부터 그 나이 정도가 되면 다 살은 사람이란 생각을 해왔는데 내가 바로 그 70이 된다. 내가 다 살았다는 얘기가 되니 쉽게 실감이 가질 않는다.

 

나이 50을 넘길 때 이제 야, 나도 드디어 쉰이 되는구나, 이제 본격 내리막이네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로부터 어느 사이에 또 다시 20년이 훌쩍 흘러서 이젠 70이 된다.

 

그 사이에 체력은 떨어지고 또 이런저런 증세도 있고 해서 고생 좀 하고 있지만 머릿속은 아주 멀쩡하기만 하다. 기억력이 조금 감퇴했지만 사고력이나 이해력은 반대가 되고 있으니 그냥 퉁 치면 되리라. 아직 죽을 때가 된 것 같지는 않다, 이 모두 영양이나 의류, 방한, 의료 등등 여러 면에서 시절을 잘 만난 덕분이리라.

 

 

생전 처음으로 건강을 돌보게 되었으니 

 

 

최근 담배를 끊었고 잠자는 습관을 정상화시켰으며 하체 근력을 열심히 키우고 있다. 게다가 걷기도 하루에 40분 이상 하고 있으니 생전 처음으로 건강을 돌보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몸을 관리하고 만들어서 老年(노년)을 잘 지내보자는 마음이다.

 

오래 산다, 사실 이런 의욕보다는 최근 내가 느낀 것은 내 몸을 빼앗겼다는 상실감이었고, 이에 다시 잃어가는 내 몸을 어느 정도까지는 되찾아보자는 것이다. 바둑에 비유하면 이제 마무리 국면이고 작은 끝내기 수순들로 이어져가는 것과 같다 하겠다.

 

옛날에 70이면 벌써 죽었고 오늘날 70은 관리 여하에 따라 남은 삶의 시간을 큰 탈 없이 잘 꾸려가거나 아니면 고생 고생하다가 가게 되는 初入(초입)인 것이다. (물론 그 어느 쪽이든 나 호호당이 언제까지 살 것인지 그거야 모르는 일.)

 

 

영원하지 않기에 삶은 아름답다는 사실

 

 

산다는 것, 이건 좋은 일이고 애틋한 데가 있다는 것을 일본의 옛 수필 “쓰레즈레구사”, 한자로 徒然草(도연초)를 읽다가 명확하게 배운 바 있다. 우리의 삶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꽃이 어여쁜 이유 또한 피었다가 곧 질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예쁘고 때론 애처로운 것처럼 말이다.

 

젊은 날 나이 드신 아주머니께서 나를 보면서 아이고, 아까워라! 이런 말씀을 하셨다. 속으로 아깝다니, 이게 무슨 뜻이지? 했다. 세월이 가면서 그 말씀이야말로 참으로 옳았다. 당장은 활짝 피어있는 꽃 같은 젊은 청년이지만 언젠가는 늙고 초췌해져서 사라져갈 것을 생각하면 아깝다는 말씀이셨다.

 

나 또한 길에서 또 어떤 장소에서 젊고 싱싱한 젊은이들을 만나거나 대할 것 같으면 속으로 참 아깝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나 호호당 또한 나이가 들었고 늙었으며 삶의 황혼녘에 서 있음이다.

 

언제 스러질 것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영원하지 않다는 것, 기한이 있다는 것, 모든 생명은 기한이 있기에 삶과 삶의 날들이 아름다울 수 있고 애틋할 수가 있다.

 

 

추분은 한 해의 일몰이어서

 

 

며칠 있으면 秋分(추분)이다. 추분이 무언가 하면 한 해의 日沒(일몰)이다. 2023년의 일몰인 것이다. 하루의 해는 저녁 6시 반에 지고 한 해의 해는 9월 23일에 진다. 따라서 올 추분은 2023년의 이브닝인 것이다.

 

하루의 해는 내일 아침이면 다시 동쪽에서 떠오르겠지만 2023년의 해는 이제 곧 질 참이다. 이처럼 나 호호당의 삶 또한 그러하다. 내일 아침이면 아마도 다시 아침빛을 받아 일어나서 활동하겠으나 삶 전체를 놓고 보면 이제 어둠 속으로 즉 죽음 속으로 또 있음에서 없음의 세계로 서서히 한 발 한 발 걸어 들어가고 있음이다.

 

 

나 호호당의 귀에도 상여소리가 들려오나니 

 

 

그러니 이제 내 귀에 輓歌(만가), 꽃상여가 나갈 때의 노래 소리도 들려온다.

 

북망산천이 머다더니 저 건너 안산이 북망이로구나, 하는 노랫말이 들려온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나 호호당 만으로 아직 68세이니 액면 그대로 숨 꼴까닥 하고 넘어가는 때는 아직 꽤나 남았을 것이다. 그러니 북망산천이 멀어 보일 법도 하다.

 

하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나이 곧 70, 이제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이 실은 북망산천을 향해 이미 출발한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때가 되면 노랫말처럼 저 건너, 개울 건너 案山(안산) 즉 맞은 편 낮은 산이 바로 북망이 되는 때가 올 것이다.

 

그러니 나 호호당이 이번에 담배를 끊고 매일 열심히 걷고 잠시간도 정상으로 돌려놓은 것은 새 삶을 살아보자는 게 아니라 이제 삶의 집문을 나서서 북망으로의 걸음을 떼어놓은 것과 같다고 여긴다. 그간 잘 살았으니 더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젠 잘 죽기 위한 노력이다.

 

 

이미 북망산천을 다녀온 적도 있다는 사실

 

 

북망, 한자로 北邙(북망)이다. 그런데 사실 나 호호당은 젊은 날 죽어서 가는 북망산천이 아니라 실재의 북망산천을 다녀온 적이 있다.

 

1994년이었다. 우리가 중국과 수교한 것이 1992년이었고 이에 나는 다니던 은행을 그만 두고 중국에서 전산망 구축, 즉 SI 사업을 해보고자 중국으로 떠났다. 일단 답사를 해보고 시장 상황을 알아보고자 중국을 두루 돌아다닐 때 우연히 북망산을 갈 수 있었다.

 

처음에 그 북망산이 우리 상여소리에 등장하는 그 북망산인줄 몰랐다. 그러다가 거기에 엄청난 무덤들이 있는 것을 보면서 깨달았다, 아 여기가 바로 북망산천이구나! 하고. 살아서 저승을 가보는 묘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재미난 점은 현지 중국인들은 우리 문화 속에서 북망산천이 나름 큰 상징의 하나란 것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1994년의 일이니 그 또한 29년 전의 일이다. 요즘엔 옛일을 떠올리면 곧잘 30년 전의 일이다. 거 참!

 

북망산천은 오늘날 중국 허난성 뤄양, 즉 洛陽(낙양)의 북쪽에 있는 산이고 그 너머 북쪽에 황하가 흘러간다. 그래서 북망산천이다. 낙양은 중국 역사에 있어 서쪽의 長安(장안)과 함께 양대 古都(고도) 중의 하나이다.

 

낙양이 수도였으니 권력자들은 죽어서 북쪽의 망산에 묻혔다. 그 바람에 북망산에 가면 역대 황제의 능묘들과 왕후장상들의 무덤이 즐비하다. 따라서 죽어서 북망산천을 간다는 말은 살아선 호강을 누리지 못했더라도 죽어서 만큼은 그 반열에 들어가서 冥福(명복)을 누려보라는 기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살아선 고생 많았던 서민이지만 저승에선 부자가 되어 떵떵거리고 살아보라는 축원.

 

어려웠긴 했으나 옛 농경사회 또는 씨족사회 시절의 사람들은 죽어서라도 그런 축원을 듬뿍 받았다. 온 마을 사람과 집안사람들이 꽃상여 위에 태운 뒤 온 마음을 다해 선산의 장지에까지 그런 축원의 노래를 부르며 갔다. 그러니 부럽다. 간단하게 2박3일 영안실에 사진 한 장 올려놓았다가 아침 일찍 화장터에 가는 오늘날에 비하면 말이다.

 

 

열심히 운동하고 몸을 가꾸어서 힘차게 저승길을 달려가보자

 

 

오늘 아침에도 7시 반에 집을 나가서 근처 공원을 크게 한 바퀴 돌고 왔다. 그냥 걷는 게 아니라 속력을 올려서 걷는다. 40분 정도 지나 언덕을 오를 땐 숨이 헐떡댄다. 좋은 유산소 운동이다. 아침 공기가 제법 차갑지만 열이 난 나는 땀에 흠뻑 젖는다. 좋은 아침이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제부터의 삶은 내 스스로의 걸음으로 북망산천을 향해 힘차게 걸어가는 거야! 거의 도달할 무렵이 되면 엉금엉금 기어갈 수도 있겠으나 일단은 힘차게”

 

오랜 시간에 걸쳐 언어학과 운명학에 관해 연구해왔다. 하지만 여기까지란 생각을 한다. 물론 앞으로도 새로운 무언가를 더 알아내고 통찰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것보다는 지금까지의 것을 정리하는데 더 신경을 쓸 생각이다. (물론 자연순환운명학 그리고 실용기술인 증시 투자하는 기술은 앞으로도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가르쳐줄 생각이다.)

 

늘 궁금했고 지금도 궁금해 하는 것이 하나 있다. 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행동이다. 연어는 산란을 위해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오른다, 오르는 과정에서 힘이 다 빠지고 잡혀 먹히기도 한다. 그런 연어들에게 있어 성공이란 다름이 아니라 최종목적지에 도달해서 알을 낳고 수정을 마무리하는 일이다. 그러곤 죽는다.

 

젊은 날엔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산란과 그 직후의 죽음을 위해 저처럼 맹렬하게 죽을힘을 다해 물을 거슬러 오른다, 뭐가 좋지? 이해가 가질 않네, 했다. 가수 “강산에”의 노랫말처럼 “그들만의 신비한 이유”일 뿐이었다.

 

최근엔 생각이 좀 바뀌고 있다. 세대를 이어가는 것과 죽음은 맞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내 경우 자녀 하나는 낳았으니 본전은 건졌고 혹시나 죽을 때 또는 죽고 나면 생각하지 않은 望外(망외)의 이득을 하나 건지게 되는 것은 아닐는지 싶은 것이다.

 

오늘의 얘기는 삶은 영원하지 않기에 더 애틋하고 아낄 이유가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열심히 건강을 회복해서 저승길 또한 힘차게 달려가 보자는 약간은 이상한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