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글을 썼던 "밀란 쿤데라"가 죽었다는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작가 밀란 쿤데라가 죽었다. 젊은 날 그 소설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실로 대단했다. 우와!-어쩌면 글을 이렇게 멋지고 ‘뽀대’나게 쓸 수가 있지? 했다.

 

먼저 생년월일을 살펴본다. 1929년 4월 1일, 생시는 미상. 己巳(기사)년 丁卯(정묘)월 丙子(병자)일이다. 생시를 모르니 그간의 프로필을 감안하여 입추를 추정해보면 1926년과 1986년의 丙寅(병인)년이 된다. 왜냐면 그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앞의 작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1984년에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란 게 과연

 

 

소설은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주제로 하고 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거 가볍게 사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무겁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다. 동시에 가볍든 무겁든 다 중요하지가 않다는 얘기도 하고 있다, 삶이란 한 번에 그치는 것이고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으니 그렇다는 것이다.

 

가볍게 살다보면 추를 내리지 못 하고 깃털처럼 공중으로 날아갈 정도로 의미가 없기도 할 것이고 무겁게 사는 것 또한 너무 스스로를 자학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 하고 묻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볍게 살고 싶어도 삶은 절로 무거워지고 무겁게 살고 싶어도 삶은 절로 가벼워진다는 얘기도 하고 있다.

 

소설은 니체의 철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니체는 삶이 순환의 연속이란 사상을 갖고 있으니 이를 니체는 “영겁회귀”라고 불렀다. 동일한 매 순간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얘기인데 사실 이는 불교철학과 깊은 연관이 있다. 미래라든가 과거는 개념일 뿐 그저 주어진 것은 바로 “이 순간이 전부”라는 생각과 통하다.

 

우리 앞에 주어진 매 순간을 살아내는 것이 삶의 전부라는 주장이다. 그렇기에 쿤데라는 소설을 통해 가볍게 살든 무겁게 살든 두 가지 태도 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얘기한다. 매 순간 가볍다 싶으면 좀 무겁게 하고 무겁다 싶으면 좀 가볍게 살아라, 하면서 삶의 기교를 소설의 주제로 삼고 있다.

 

쿤데라는 소설 속의 또 다른 여주인공을 통해 어떤 주의(-ism)에 대한 집착은 ‘키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특정한 삶의 태도를 이상적이고 절대적이라 간주하려는 의지야말로 엉터리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니체 철학이나 쿤데라의 소설 속 내용 그리고 불교철학을 잘못 이해하면 허무주의가 된다. 하지만 쿤데라는 어떤 주의(-ism)란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틀렸다고 말하고 있다.

 

 

존재에 대한 우리들의 집요한 갈망

 

 

이 대목에서 나 호호당이 받아들이고 있는 般若心經(반야심경)의 내용에 대해 조금 얘기해보고자 한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있다, 내가 있다, 이런 생각이 바로 고통의 원천이다. 나라고 하는 것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통일체인데 사실 그건 어떤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일시적인 결합체에 불과하다, 따라서 조건이 변경되거나 사라지면 나 또한 사라진다. 다시 말해서 생로병사라고 하는 과정을 통해 나라고 하는 존재는 결국 없어지는데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자연스런 일이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 어떤 힘든 苦厄(고액)도 잠시의 것이고 항구불변의 것이 아니다.

 

조건을 떠나 진짜의 모습, 반야심경의 표현으로 諸法(제법)의 空相(공상)은 태어나서 늙어죽는 것도 아니고 늙어죽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아니다. 원천적으로 그런 것은 없다, 바로 이게 모든 것의 참된 모습이지 않겠느냐? 그러니 ‘나’라고 것이 있다는 왜곡된 생각, 반야심경의 말로는 顚倒(전도)된 夢想(몽상)을 버리게 되면 그로서 마침내 涅槃(열반)에 들 수 있다고 한다.

 

이거 허무주의 아닌가? 싶겠지만 그 허무를 감지하는 ‘나’ 자체가 일시적인 설정이란 얘기인 것이다. 自我(자아)란 것이 살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그 자아가 느끼는 허무와 슬픔, 고통, 행복도 모두 잠시의 일, 꿈속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싯다르타의 가르침이었다.

 

그렇다고 自我(자아)를 원천 부정하지도 않는다. 살아있는 동안 자아는 존재하는 것이니 그렇다. 하지만 그 자아라는 게 어디까지나 조건이 지워진 限時(한시)적인 것이니 그것 또한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게 싯다르타의 가르침이다. 줄여 말하면 存在(존재)에 구애받지 말라는 얘기이다.

 

존재하고픈 욕망, 이는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의 원초적인 욕망이다. 이를 싯다르타는 無名(무명), 즉 밝게 살피지 못함에서 생겨나는 집착과 갈애라고 말했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 또한 결국은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의 또 다른 표현이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면서 존재의 의미에 대해 묻고 있는 심술궂은 쿤데라 

 

 

쿤데라는 묻고 있다. 어차피 한 번의 삶인데 의미가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떠냐고.

 

다만 재미난 점은 사람을 포함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나름의 어떤 영고성쇠를 거치는 週期(주기) 즉 사이클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게 바로 나 호호당이 말하는 자연순환이고 운세의 변화이다.

 

 

우리 모두 번창하고 싶고 존재하고 싶다

 

 

이와 관련해서 얘기할 것이 있으니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은 영화롭고 번창하길 갈구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 역시 지속적으로 존재하고픈 욕망의 확장 버전에 불과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운세에 대해 궁금해 한다. 지금 힘들다 싶으면 앞으론 번창하기를 기대하고 지금 그런대로 좋다면 앞으로도 쭉 이 상태로 이어지거나 또는 더 크게 번창할 수 있기를 갈구한다. 이 역시 너무나도 자연스런 갈망이다. 이 모든 게 존재에 대한 욕구이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바로 이 자연스런 욕망이야말로 無明(무명)에서 오는 집착과 갈애라고 지적하면서 존재에 대한 욕망에 구애받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나 호호당은 자연스런 욕망, 어차피 우리는 그렇게 생겨먹었고 만들어져 있기에 그를 틀렸다거나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존재하면서 번창하길 바라는 욕구는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싯다르타야말로 헛된 가르침을 남겼던 것일까? 하고 곰곰이 따져 묻는다면 그 또한 절대 틀리지 않다.

 

너 존재해본들 그거 얼마 되지도 않는 거야, 사실 우리가 겪는 것은 눈앞의 찰나 찰나에 불과한 것인데 긴 스토리룰 구상하거나 멋진 플랜을 세워본 들 어느 순간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알게 되거든, 그러니 존재에 집착하지 않는 게 마음 편할 거야, 하고 엄청 쿨(cool)하게 지적해오고 있는 싯다르타이다. 결국 涅槃(열반)이란 것은 존재 그리고 존재에 대한 뿌리 깊은 집착으로부터의 탈피라 하겠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존재에 대해 묻고 있는 작품이다. 집착과 갈애를 많이 가지다보면 삶이 무거울 것이고 그로부터 벗어나자니 그 또한 너무 허무해지고 맥이 빠져서 참을 수 없는 우리의 삶이라 얘기한다. 대략난감한 우리의 삶이다.

 

 

세속의 삶 그리고 본질의 삶

 

 

세속의 삶, 존재하고 싶고 존재를 확장하고 싶은 삶을 나 호호당은 世俗(세속)의 삶이라 부른다. 세속의 삶에선 운세가 중요하다, 저는 언제쯤이면 꽃을 피울까요? 저는 언제쯤이면 이 곤궁에서 벗어날까요? 모두 사뭇 중차대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살다보면 알게 된다, 삶이 그다지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건강한 몸도 한 때의 일이고 부귀영화도 잠시 지나쳐가는 것임을 우리는 살다 보면 깨닫게 된다. 그저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곤 지금 눈앞을 스쳐가는 찰나의 시간들이 전부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여기에는 순서가 없다, 당연히 이것의 逆(역)도 가능하다. 삶과 세상을 다 버렸다가도 또 다시 맹렬하게 세상 속으로 들어와 욕심을 부려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삶이기에 그 무엇을 하든 욕구하든 다 정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나 호호당은 이제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어버린 “무의미의 축제”를 읽은 적이 있다. 마지막 장을 다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을 했다. ‘하찮은 삶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축제처럼 즐겨야 한다는 말 같기도 하고 삶이란 축제를 즐겨보고자 하지만 결국 무의미하다는 말 같기도 하구나.’

 

“무의미의 축제”를 읽은 뒤 자연스럽게 정현종 시인의 詩(시)가 떠올랐다. “고통의 축제”란 시집 안에 실린 “기억제”란 시의 마지막 구절들이 떠올랐다.

 

쓰레기는 가장 낮은 데서 취해 있고/ 별들은 천공에서 취해 있으며/ 그대는 중간의 다리 위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음을.

 

 

비밀이란 것은 알고나면 시시해지는 법

 

 

나 호호당은 오랜 연구 끝에 運(운)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알게 되었으니 적어도 나 호호당에겐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비밀인 때가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비밀만큼 섹시한 것이 다시 있으랴!

 

장마야 이제 고마해라, 마이 뿌렸다 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