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감흥과는 연을 끊겠다했던 망상



해마다 2월 20일 경의 우수가 되면 작업실 청소를 하면서 버릴 것은 버린다. 특히 내겐 책꽂이 정리가 중요하다, 필요 없겠다 싶은 책은 버린다. 해마다 수 십 권은 족히 될 것이다. 그러다 보니 후회하는 일도 간혹 생긴다. 


꽤나 된 것 같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이제 대충 다 살았다 싶어서 詩集(시집) 같은 것은 다 버리고 치워도 될 듯 했고 그래서 근 백 권이 넘는 시집을 깡그리 다 버렸다. 수십년 묵은 책도 있었고 비교적 근자에 산 시집도 있었는데 통으로 다 버렸다. 그때 심정은 枯木(고목)에 봄꽃은 어울리지 않지!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고목나무라 해도 죽지만 않았으면 봄이 되어 꽃을 피워 매달듯 시적 감성은 수시로 때때로 가슴 속에서 꽃으로 피어난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오래된 나무를 보면 죽은 가지도 있겠으나 꽃을 피워내는 가지는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나무는 아직 살아있다. 그처럼 나 호호당 역시 살아있는 한 시적 감흥을 느끼면서 살게끔 되어있는 법, 그러니 그런 와중에선 기억나는 시들을 다시 찾게 된다. 



몸이 조금 아프게 되자 생각이 난 시 한 수



일본을 다녀오고 다시 연달아 여수를 다녀왔더니 살짝 몸살이 났었다. 사나흘 쉬고 나면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고 미열이 나면서 근육통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몸져누울 정도도 아니었다. 


며칠 전의 일이다. 작업실에서 저녁이 되자 미열이 올라와서 잠시 매트리스를 깔고 누워 있는데 문득 일본 하이꾸의 명인 바쇼가 남긴 시 구절이 떠올랐다. 마쓰오 바쇼 말이다. 


오래 전 일본어를 공부해보겠다는 생각에서 바쇼의 시들을 몇 수 외웠던 적이 있는데 살짝 몸살이 나자 시 한 수가 떠올랐던 것이다. 


여행길 몸져누우니 꿈은 황량한 들판 헤매이누나, 하는 시. 그런데 일본어로는 구절 전체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바쇼의 시집이 책꽂이 어딘가에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다가가 보니 바쇼의 시집은 물론이고 그 어떤 시집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서야 알았다, 시집을 다 버렸다는 것을. 이런! 내가 미쳤지. 


시계를 보니 교보문고가 아직 열고 있겠구나 싶어서 부랴부랴 달려가서 예전에 버렸던 바쇼의 시집을 샀다. 다행히도 같은 책이 한 권 있었다. 


원문은 旅に病んで/夢は枯野を/かけ廻る,

읽을 땐 たびにやんで / ゆめはかれのを / かけめぐる, 이렇게 읽고 우리말 소리로 바꾸면 다음과 같다. 

타비니얀데 유메하카레노오 카케메구루. 


작업실로 돌아오면서 마치 주문 외듯이 “타비니얀데 유메하카레노오 카케메구루”를 외우면서 걸어왔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몸살이 났으니 병들어 곧 죽을 수도 있는 처지의 바쇼 시인의 심정이 담긴 저 시, “여행길 몸져누우니 꿈은 황량한 들판 헤매이누나!” 하는 것에 조금은 공감이 갔던 까닭이다. 물론 내 경우엔 일종의 엄살이지만 말이다. 



그의 꿈은 무슨 연유였던 걸까?



우리말로 芭蕉(파초)가 되는 바쇼는 세속과 탈속의 경계를 살다간 시인이다. 그랬기에 그는 수시로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고 그 속에서 시적 영감을 얻었다. 앞에 소개한 시는 바쇼의 마지막 작품인 것으로 알고 있다. 유랑길을 돌아다니다가 겨울 무렵에 병이 나서 누웠던 중에 쓴 작품이고 그 뒤로 그만 숨지고 말았다. 


몸은 아파서 누웠으나 마음은 계속해서 마른 벌판을 돌아다닌다고 한다. 당시의 여행은 결코 지금처럼 관광이 아니었고, 때론 몹시 힘든 상황에 처할 때도 많았다. 그러니 병이 났고 오늘날과 같이 아프면 며칠 요양하면 회복되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그만 세상을 떠야 했으리라. 오십의 나이였으니 지금 시절이라면 아직 한창인 나이였다. 


병난 몸이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지만 그럼에도 겨울 마른 벌판을 돌아 다니고 싶다는 저 마음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길 위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꼭 찾아야만 하는 것이 있었을까? 알듯 모를듯 하다. 


마쓰오 바쇼는 출신이 寒微(한미)했던 모양이다, 생년월일이 알려져 있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의 사주팔자를 살펴볼 수가 없고 그 점이 아쉽다. 대시인의 사주를 엿볼 기회가 없는 것이다. 



좋은 시절에 좋은 나라에 태어난 행운



나 호호당은 올 해 예순 다섯이다. 바쇼보다 벌써 15년을 더 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시적 감흥을 수시로 일으킬 만큼 건강하다. 시대를 잘 만난 덕분이다. 


나 호호당 역시 조선시대였다면 아마도 어쩌면 필시 벌써 세상을 하직했을 것이라 여긴다. 1955년생이지만 1997년이 입춘 바닥이었기에 그로부터 7-8년 뒤인 2004-2005년 무렵에 죽었을 것이란 얘기이다. 


그러면 나 호호당 역시 향년 50이었을 것이다. 죽으면서 세상을 한탄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세상 시절을 잘 만나서 영양 충분한 오늘날 세계적으로도 빠지지 않는 대한민국에 태어났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날씬한 초사흘 달과 다시 돌아온 겨울밤의 시리우스



그제 저녁 서쪽 하늘을 보니 날씬한 초사흘 달이 저물고 있었다. 산뜻한 초사흘 달 말이다. 초사흘 달의 몸매는 정말 날씬하고 날렵하다. 성깔도 있어 보인다. 


그런 뒤 늦은 밤 뒷산 산책할 때 보니 겨울 밤하늘의 왕별 ‘시리우스’가 동남쪽 하늘에서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간 잊고 지내다가 또 만나게 되니 많이 반가웠다. 


다시 흥이 날 때마다 좋아하는 시집들을 기꺼이 사들여야 하겠다. 곁에 두고 수시로 즐겨야 하겠다. 괜히 늙은 시늉 할 까닭 전혀 없고 마음은 꽃을 피워내는 청춘으로 남아서 흔쾌히 살아가야지 하는 다짐을 해본다. 



어려워져가는 우리나라를 지켜보노라니



최근 점차 어려워져가는 우리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꽤나 묘한 생각이 든다. 내 경우 이미 이럴 것으로 오래 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지 않은가, 그러니 눈앞의 일을 당연시해야 할 터인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롭다고 하면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 경우 우리나라가 씩씩하게 발전해오는 과정을 그 시대 속에서 살아왔기에 몸으로 경험했다는 것, 그러니 그 반대의 흐름, 쇠퇴해가는 흐름을 눈으로 찬찬히 지켜보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국제시장’의 시절에 대한 회상



어린 시절 조금씩 세상 물정을 알아가던 시절이 1960년대였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우리 사회는 정말로 힘들었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살던 동네에 대학 다니다가 등록금이 없어서 휴학하던 형이 있었다. 스무 살 남짓이었겠지만 내가 워낙 어렸기에 형이 아니라 큰 어른처럼 여겨졌다.

 

어느 날 그 형님 집에 일이 있어 들렀는데 그 분은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찬밥 반 공기 정도를 그냥 드시는 것이 아니라 물을 불려서 두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왜 물을 부어 먹어요? 했더니 그래야만 양이 많아지잖아 하시는 것이었다. 


늘 대학생 교복 한 벌이 전부이던 그 분은 얼굴이 몹시도 창백했다. 왜 그럴까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밥 한 공기를 절반씩 나눈 다음 물에 불려서 간장을 숟가락으로 조금씩 찍어가며 먹는 것이 하루 식사였으니 영양 상태가 좋을 리 만무였던 것이다. 지금도 그 분의 검은 대학생 교복과 창백한 얼굴이 기억 속에서 선명하다. 그래도 당시 그 분은 휴학 중인 대학생, 즉 우리 사회의 엘리트였다는 생각이다. 


중학교 시절 월남, 지금은 베트남이지만 파병 장변들을 환송하거나 귀국장병들을 마중나가는 일에 자주 동원되곤 했다. 부산 부두로. 수업을 하지 않으니 우리들은 마냥 신이 났었다. 군가가 크게 울리면 우리들 또한 가슴이 울렁거렸고 이에 종이 태극기를 세차게 흔들다가 찢어놓곤 했던 기억. 


수돗물이 나오지 않으면 급수차 앞에서 양동이를 잔뜩 가져다 놓고 자리를 지키던 기억, 초등학교 시절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나누어주는 옥수수떡을 내가 가져간 도시락과 바꾸어먹을 때 상대방이 건방진 표정으로 약간 손해지만 너그럽게 베풀어준다는 식의 그 건방진 표정 또한 여전히 새록새록하다. 


바로 그런 때가 몇 년 전 소개된 영화 “국제시장”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나 호호당은 굳이 그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리라. 


우리 국운이 가파르게 하락 중이고 이에 10년 후, 즉 2029년이 되면 그야말로 한심하다 싶은 때가 올 것이다. 2029년이 되면 국운의 재바닥, 가장 힘겨운 시점이 될 것이니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금 말한 국제시장의 시절로 원점 복귀한다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법이라서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힘들어져 있겠지만 이미 우리에겐 성공해본 경험이 있고 또 상당한 기술력과 인재들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렇기에 또 다시 단합하고 뭉치면 힘들긴 해도 또 다시 더욱 힘차게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니 사실 나 호호당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그저 그 途中(도중)에 겪을 일들이 힘들 뿐이라 여긴다. 


변해가는 세계와 우리 대한민국을 열심히 지켜볼 생각이다. 어쨌거나 끝이 좋으면 가는 길이 아무리 험하고 힘들어도 다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며칠 엄살을 부렸는데 기력을 회복한다는 핑계로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입안에 가시가 돋을 판이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책방에 가서 읽고 싶은 시집을 몇 권 사와야 하겠다. 


(이 글은 토요일 새벽에 시작해서 일요일 새벽 이 시각에 마무리했다. 그래서 이미 오늘은 음력 6일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