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에 고아가 되어 세상을 버리고 수녀가 되고자 했던 처녀
많은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2회에 나누어 글을 쓰고자 한다.
보통의 가정에 태어난 마리아란 이름의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10살 때 불행하게도 양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18세에 교사 과정을 이수한 뒤 정식 수녀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갔다. 우리로 치면 머리를 깎고 행자가 된 셈이다.
그녀의 생년월일은 1905년 1월 26일, 甲辰(갑진)년 丁丑(정축)월 乙丑(을축)일이 된다. 丑(축)월에 태어난 乙木(을목)인 바, 그녀의 일생을 돌이켜볼 때 그녀의 입춘 바닥은 1925 乙丑(을축)년이었고 입추는 1955년임을 알 수 있다.
부모를 모두 잃은 불상사가 그녀의 나이 10살이 되던 해였으니 1915년의 일이었다. 乙卯(을묘)년이고 운세 흐름은 입춘 바닥이 되기 10년 전인 大雪(대설)의 운이었다. 큰 눈이 펑펑 내린다는 대설 말이다. 10세의 어린 소녀가 눈 내리는 벌판에 혼자 내버려진 셈이었다. 얼마나 가련한가!
수도원에 들어간 것은 1923년이었으니 입춘 바닥 2년 전이다. 교사과정을 이수하긴 했으나 그녀에겐 별 의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에 세속을 버리고 수녀의 길을 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의 품안에서 안식을 찾은 것이다.
전설의 시작
그녀는 수도원에 적을 두고 학교 선생 일을 하고 있었는데 입춘 바닥 다음 해인 1926년에 한 아이의 가정교사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부잣집이었다, 그런데 그 집은 자녀를 일곱이나 낳은 엄마가 홍역을 앓던 중 그만 먼저 제 세상으로 떠난 집이었다.
마이라는 처음에 한 아이만을 맡았으나 결국 어쩌다보니 일곱 자녀를 모두 돌보게 되었다. 고아로 자란 터라 아이들을 돌보게 된 것이 마리아에겐 커다란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외로운 사람은 누군가를 돌보게 되면 책임감도 생기고 살아갈 의욕도 생기면서 위로도 받는 법이다.
마리아가 진심으로 자녀들을 아끼고 잘 돌보는 것을 지켜보던 그 집 아버지, 홀아비는 어느 날 그녀에게 청혼을 하게 된다. 홀아비 남자는 마리아보다 나이가 무려 25살이나 많았다. 하지만 마리아는 수녀의 길을 포기하고 청혼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훗날 회고에 따르면 부잣집 홀아비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다 보니 청혼을 받아들였다고 심중을 밝히고 있다. “나는 아이들과 결혼한 셈이지요, 하지만 세월이 가다 보니 서서히 남편도 사랑하게 되었어요.”
나 호호당은 그녀의 저런 말이 액면 그대로의 진심일 것으로 확신한다. 왜냐면 결혼한 때는 1927년 11월인 바, 그녀의 운세로 보면 1925년 입춘 바닥에서 겨우 2년이 지난 때, 그러니 미래에 대해 그저 막막한 심정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살을 부비고 살아가는 아이들과 헤어지기 싫다는 것이 전부였을 것이라 본다.
마리아의 남편 이야기
여기에서 잠깐 마리아가 결혼한 남자, 무려 25살이나 연상인 사람에 대해 알아보자.
마리아의 남편은 오스트리아의 기사 계급 출신으로서 이름이 게오르크 폰 트라프, 오스트리아 제국의 해군 장교였다.
제1차 대전이 터지기 전 게오르크는 영국 해군 제독들과 교분을 쌓았고 그러다가 영국의 부유한 귀족 집안의 딸과 1912년에 결혼을 하면서 크게 부자가 되었다. 아내가 가져온 거액의 지참금 때문이었다.
그런데 1914년 제1차 대전이 발발하자 잠수함 함장으로서 무려 11척의 영국이나 프랑스 함선을 격침시키는 혁혁한 무공을 세웠고 최고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런데 막대한 지참금과 함께 아들 둘과 딸 다섯을 낳아준 고마운 아내가 1922년에 사망했던 것이고 이에 졸지에 애 일곱의 홀아비가 된 그는 어쩌다가 마리아와 인연이 닿게 되었던 것이다.
영원히 이어지는 것은 없어서
아무튼 마리아 남편의 입장에선 정말 그야말로 대박이었을 것이다. 일곱 자녀를 끔찍이 아껴줄 뿐 아니라 나이 또한 25살이나 연하의 젊은 색시를 얻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그냥 그래도 잘 살면 되는 일이었는데 세상사가 그렇지가 않다. 세월이 가면 반드시 변동이 생기는 법.
남편 게오르크는 당초 재산을 글로벌 금융 센터인 영국 런던의 은행에 맡겨두었는데 한 친구의 권유로 오스트리아 은행으로 옮겨오게 되었으니 이게 화근이 되었다.
1929년 미국에서 공황이 터지자 온 세계로 파급이 되었는데 그러다가 1935년 어느 날 오스트리아 금융 전체가 공황에 빠져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 바람에 게오르크는 막대한 금융자산을 몽땅 날려먹고 말았다. 청천 하늘에 날 벼락 격이었다.
사실 게오르크의 운세 흐름에 대해선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간단히 말하면 그의 운명으로 볼 때 처가로부터 얻은 자산을 지킬 팔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 마리아의 운으로 보면 1935년은 이제 입춘 바닥에서 10년이 흐른 淸明(청명)의 운이었기에 마리아 또한 부잣집 마나님 팔자는 아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행히도 큰 저택 한 채는 남아있었기에 게오르크는 부랴부랴 저택의 꼭대기 층으로 살림을 옮기고 밑의 층엔 임대를 주는 방식으로 생활비를 마련했다.
길이 막히면 또 다른 길을 열어주는 운명, 그 신비함
그런데 운명의 일은 참으로 신비하기까지 하다. 이 무렵 오스트리아 대주교가 음악에 밝은 신부 한 분을 부부 집에서 기거하도록 했는데, 두 부부는 이 신부로부터 음악과 합창에 대해 배우게 되었고 또 그 바람에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가족 합창단을 만들어 공연을 했다.
이처럼 운명은 가장 암담한 때에 훗날 가족이 생계를 꾸려갈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끊임없는 고난의 길
그러나 고난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히틀러가 광기를 내비치면서 파시즘의 물결이 오스트리아를 뒤덮어왔다.
그 사아에 마리아는 남편과의 사이에 세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 부부는 모든 아이들을 이끌고 오스트리아를 떠나 이탈리아로 갔고, 다시 영국으로 갔다가 마침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나치 독일은 부부의 저택을 나중에 히틀러의 실세 막료이자 유태인 학살을 진두지휘했던 하인리히 힘러의 사령부 건물로 사용했다.)
미국으로 간 것은 1940년이었다. 그녀의 운세에 있어 이제 여름이 시작되는 立夏(입하)의 운이었다. 여전히 고달프긴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는 일은 없어진 것이다.
부부가 미국으로 가서 정착한 곳은 미국의 ‘깡촌’ 버몬트 주의 한 시골마을이었다. 버몬트, 메이플 시럽의 생산지이자 수려한 자연풍광으로 유명한 곳이고 반대로 인구는 엄청 적다. (구론산 바몬드의 바몬드는 버몬트이고 바몬드 카레 또한 우리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사실 일본 기업이 만든 제품일 뿐 버몬트 주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
부부는 미국에서 가족합창단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겨우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또 불행이 닥쳤으니 1947년 남편 게오르크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夏至(하지)의 운, 사람이 분발하는 때
하지만 마리아는 더욱 분발했다. 홀몸이 되어 열 아이의 장래를 책임지고 나선 것이었다.
1925년이 입춘 바닥이었으니 1947년은 22년이 경과한 시점, 즉 夏至(하지)의 운이었다. 하지의 운이 되면 사람은 일생에 걸쳐 가장 용맹해진다. 마리아 역시 그랬을 것이다.
책 한 권이 열어준 행운의 길
마리아는 자신과 가족의 얘기를 책으로 써서 출판했는데 1949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 책은 이른바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능히 그럴 법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수녀를 지망했던 처녀가 홀아비의 일곱 자녀와 함께 지내기 위해 25살 연상의 홀아비와 결혼을 했고, 그러다가 다시 집안이 파산을 하고 또 나치의 마수를 피해 이국 만리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가족 합창단을 하던 중 남편까지 잃게 된 과부의 인생 얘기였으니 얼마나 실로 구구절절한 스토리인가 말이다.
책의 제목은 트라프 가족 합창단의 이야기, The Story of the Trapp Family Singers 였다.
책이 많이 팔려나가면서 마리아와 가족에겐 큰 경제적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공연 투어도 일정이 바빠졌다. 음반도 미국 대형 음반사에서 제작되었다. 이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게 되면서 급기야 1956년과 1959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영화로도 제작되어 흥행에 성공했다. 마리아는 출판사의 요청에 따라 후속편을 책으로 출판했는데 역시 판매가 잘 되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등장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으니 1959년에는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이란 제목의 뮤지컬로 만들어져 엄청난 성공을 했다.
그러자 1965년에는 급기야 줄리 앤드류스가 마리아 역을 맡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바로 그 도레미 송이 들어간 영화로 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빅 히트를 쳤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820만 달러의 예산을 들여 박스 오피스 실적이 무려 2억8천6백만 달러, 제작비 대비 무려 35배나 되는 흥행을 기록했으니 실로 엄청나게 성공한 뮤지컬 영화, 실로 전설적인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이 정도에서 일단 끊고 다음 회에서 마무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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