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니 힘든 날 편한 날도 있구나!

 

 

한 땐 사는 게 힘들었다, 하지만 아직 삶의 날들이 많이, 아주 많이 남아있어서 언젠가는 편한 날들도 오겠지 싶었다.

 

어제 7월 25일로서 66년을 살았다.

 

다행히도 그 사이에 형편도 많이 좋아졌고 또 아직 큰 질환은 없기에 앞으로 20년은 살 지 않을까 싶다, 목표는 우리 어머니처럼 세는 나이로 90을 찍어보는 거다. 물론 도중에 문제가 생기면 20년을 채우지 못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삶의 날이 대략 20년 정도는 남았다고 여긴다.

 

20년, 길다 하면 길겠지만 그간 살아온 느낌으론 그다지 길 것 같진 않다. 후딱은 아니겠으나 국수 넘어가듯 후루륵- 하고 흘러가지 않겠나 싶다.

 

 

주어진 20년을 어떻게 해야 잘 쓰고 갈까? (가성비를 생각하면서.)

 

 

아무튼 20년이 주어졌으니 그것들을 잘 사용할 생각 또는 계획을 세워보고 있다. 사람들이 노후를 준비할 때 돈이나 자금을 먼저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나 호호당 생각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은 시간과 세월을 어떻게 해야 알차게 보낼 수 있을지 하는 점이다. 해야 할 일이 있고 정리하고 매듭지어야 할 것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아직 할 일이 제법 남았다는 말을 하고 나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웃음을 짓는다. 일본 고대 수필문학의 한 정점을 장식했던 요시다 켄코(吉田兼好)가 지은 “도연초”라는 책 속에 사람은 “길어도 마흔 전에 죽는 것이 남 보기에 흉하지 않고 적당할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있어서 그렇다.

 

그가 살았던 14세기 무렵의 삶은 고작 50 이었기에 늙어서 추한 꼴을 보이지 말고 아직 형색이 살아있는 40 이전에 죽는 것이 좋다는 말인데, 정작 그런 말을 남긴 그는 당시로선 대단히 이례적인 70 까지 살다갔다는 점이다. 마음을 비우고 살아서 오래 살았나?

 

돌아와서 얘기이다.

 

해야 하고 정리 매듭을 지어야 할 일은 두 가지.

 

 

가장 중요한 것은 손주를 보는 일

 

 

먼저는 손주를 보는 일이다. 낳고 또 낳아야만 기본을 달성한다고 본다. 내가 아들 하나를 얻었으니 그 아들이 다시 아들이든 딸이든 낳아야만 내게 주어진 생명으로서의 기본 과업을 마무리한다고 여긴다.

 

아들은 올 해로서 39세, 하지만 그간에 운세 순환이 바닥을 기는 바람에 이제 겨우 일어서려고 하고 있다. 작년이 立夏(입하)였다. 현재 자신의 사업을 하고 있는데 그게 자리를 잡아야만 결혼을 해서 자식을 볼 게 아닌가. (아들은 ‘비혼’이 아니다. 여건만 되면 결혼할 생각을 하고 있다. 다행한 일이다.)

 

손주를 보아야만 죽은 다음 누대의 조상들을 만나도 “내 할 일은 와고 왔습니다!” 하고 큰소리를 칠 게 아닌가. (조상령이란 게 있는지 없는지 그건 확실하지 않지만.)

 

여름 오후나 저녁, 짝을 지으려 정신없이 날고 있는 하루살이들을 보노라면 늘 그런 생각이 든다, 또 아파트 에어컨 실외기 받침대에 알을 낳아서 품을 수 있는 둥지를 틀고자 열심히 집주인 눈치를 보는 비둘기 쌍만 보아도 그렇다. 치열한 삶의 8할은 새끼 낳고 키우는 일이다.

 

 

자연순환운명학을 세상에 남기고 전파하는 일

 

 

다음으로 마무리할 일은 2014년에 성립되었다고 내 스스로 얘기했던 “자연순환운명학”의 이론을 사례와 함께 책으로 엮어서 세상에 남기는 일이다. 올 초부터 원고를 쓰기 시작했는데 세부 사항까지 다 마치려면 3년은 걸릴 것이라 본다.

 

그런 다음 그 책을 바탕으로 영문판 책을 만들어서 대략 3천권 정도 찍어서 전 세계 주요 도서관 앞으로 발송하는 일이다. 올 해로부터 10년 사업이라 여기고 있다. 2031년까지 마무리할 생각이다.

 

자연순환이론은 종전의 사주명리학과는 차원이 다른 이론이고 예측의 정확도 면에서 추종을 불허한다. 사람의 운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사 모든 일에 적용이 되는 틀이기에 그냥 나 혼자 가지고 놀다가 가기엔 너무 아깝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오늘날 글로벌 권력 지형 상에서 주목받는 나라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체만 해도 운명에 관한 정교한 이론이 있다고 제 아무리 소리쳐본들 미신 비슷한 것으로 치부되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가끔씩 상상해보는 꿈이 있는데, 하버드 대학이나 영국의 명문대학생들을 모아놓고 속는 셈치고 어디 한 번 내 이론을 들어보렴, 하고 그런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물론 그럴 기회는 없을 것 같기에 꿈이다.

 

그러니 책을 남겨야 한다, 그것도 오늘날의 표준 언어인 영문판 책으로. 글로벌 권력의 핵심 중추가 인지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가령 미국 동부 보스턴의 핵심들에게 자연순환 운운하는 따위는 머나 먼 로키 산맥 저 편 인디언의 알 수 없는 북소리 혹은 주문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달콤한 기대 혹은 상상

 

 

단지 하나 믿는 구석은 ‘옳고 강한 것은 스스로를 세상에 드러낸다’는 점이다. 톨킨이 남긴 반지의 제왕에서 보면 ‘절대 반지는 인두인 큰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았어도 결국은 누군가를 시켜서 자신을 세상에 등장케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영어 단어 right 를 생각해보라, 옳다는 뜻도 있고 권리라는 뜻도 있다. 다시 말해서 Right has right, 옳은 것은 권력(힘)을 갖는다. 이에 나 호호당의 자연순환운명학이 진짜일진대 그렇다면 그냥 맥없이 사라지진 않으리라 스스로 굳게 믿고 있다.

 

자연순환운명학이 세상에 등장한 것은 2014년, 그러니 60 년 뒤인 2074년에 가서는 온 세상 천지에 퍼져있으리라 기대한다. 당연히 그 때 나 호호당은 세상에 없겠으나 말이다. (아니면 저승에서 키득대고 있을라나?)

 

이상 두 가지 해야 하고 마무리를 지을 일에 대해 얘기했다. 나머진 모두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다.

 

 

그간의 다른 목표들은 이제 다 정리했으니 

 

 

젊은 날엔 적지 않은 목표와 호기심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진리에 대한 탐구, 특히 인간의 철학과 종교, 역사에 대한 탐구가 그것이었고 또 하나는 내 발로 걸어서 중국 시안에서 이스탄불까지 여행해보는 일이었다, 땅의 크기를 알려면 걸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이건 40대 초반에 벌써 버렸다.

 

그러니 진리 탐구만 남았었는데 그 또한 이젠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싯다르타를 따르자니 너무 힘이 들어서 

 

 

불교철학만 해도 오늘날 우리나라의 선불교는 원래 고타마 싯다르타가 가르친 것과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 어떤 면에서 대승불교라고 하는 전체가 싯다르타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싯다르타의 가르침은 인도 자체에서 이미 틀려졌을 뿐 아니라 중국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중국식 철학과 사고방식이 곁들여져서 탄생한 것이 화엄경이고 법화경 원각경 등등의 경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 비교적 싯다르타의 가르침에 조금은 더 가까운 이른바 소승불교라고 대승불교 쪽에서 폄하하는 쪽도 열심히 진지하게 탐구해보았다. 대표적으로 ‘아비달마구사론’이나 ‘대승오온론’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세상엔 그 어떤 실재도 실체도 없다고 말한 싯다르타의 가르침과는 달리 실재나 실체를 인정하고 창조해내고 있었다.

 

유식불교는 모든 것이 幻(환)이라고 주장하면서 우리 의식의 근저에는 근본적인 실체인 ‘아뢰야식’이란 게 존재한다고 얘기하고 있으니 그 역시 결국 실재론이다. 이는 사물 자체의 궁극적인 실체를 얘기한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형이상학적 원리나 아뢰야식이나 방향이 다를 뿐 동등하다.

 

싯다르타가 얘기한 것은 사실 아주 간단하다. 모든 것이 모든 것을 의지하여 생겨나는데 그 모든 것엔 실체가 없다, 즉 無自性(무자성)이다. 전부가 실체가 없으니 그로서 모이고 집합된 나라고 하는 존재 또한 실체가 없다, 그저 그런 것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임시의 구조물이고 그게 끊임없이 변해가면서 이어가는 게 삶의 모습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니 임시의 나라는 것은 있지만 실체로서의 나는 아예 태어난 적도 없고, 태어난 적도 없으니 죽는 법도 없다. 生(생)이 있어야 死(사)가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 스스로 나라는 존재를 실체, 즉 고유의 自性(자성)이 있다고 착각하는 까닭에 고통 받는 게 삶이다. 그런데 나 스스로 실체 없음을 알고 나면 고통 받는 나라는 존재는 임시 구조물로서 실체 없는 것들의 이합집산일 뿐이란 게 싯다르타의 얘기이다.

 

 

욕망이 결국은 앞선다는 사실

 

 

하지만 인간적 욕망은 싯다르타의 가르침만으론 너무나도 성에 차지 않는다. 내가 있는데 왜 없다고 하시나? 하면서 부단히 나라는 존재의 영원불멸을 믿고 싶어한다. 이어가야 하지 않겠어! 하면서. 너무나도 당연한 욕망이다.

 

그래서 사후 세계가 있기를 바라고 하느님이 계시는 천당이 있기를 바란다. 다만 고대 인도 방식에선 사후에 다시 윤회 전생한다는 식이고 기독교에선 영원히 하느님 곁으로 간다는 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싯다르타는 김 팍 빠지는 설법을 남겼다, 현실의 삶에서 너라는 존재의 실체가 없는데 네가 죽은 뒤 갈 곳이 따로 어디 있겠느냐고.

 

너무나도 머리가 명석했던 고타마 싯다르타였다, 그는 비트겐슈타인보다 훨씬 더 똑똑한 천재였고 실천적 수행자였다. 그렇기에 그의 쿨(cool)한 가르침은 뜨거운 욕망으로 가득한 우리들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노 땡큐! 하는 우리들이다.

 

 

고민 끝에 내린 헤징(Hedging) 또는 양다리 걸치기

 

 

저번 겨울 동안 ‘대승오온론’과 ‘화엄경’ 일부를 두어 차례 다시 읽으면서 고민했다. 나 호호당은 고타마 싯다르타의 제자인가 아니면 중국 대승불교의 제자인가, 또는 육조 혜능의 추종자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뿐만 아니라, 사후 세계라든가 절대 神聖(신성)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가득해서 그야말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려놓았다, 더 이상 제대로 알고자 하지 않기로. 그냥 몽매한 중생으로 살다가기로 작정을 했다.

 

이에 생각을 두 가지로 나눠 쓰기로 마음먹었다. 하나는 쿨한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가진다, 또 한 편으론 은근히 또 다른 좋은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버리지 않기로 말이다.

 

나름 知的(지적)이긴 하지만 실은 대단히 교활하고 천박한 잡놈의 생각이고, 말도 되지 않는 얘기지만 어쩔 수가 없다, 살아갈 날도 그리 많지 않으니 이제 좀 더 현실적으로 간다. 그런 나 호호당은 삶과 죽음 앞에서 천박하고 비굴함을 인정한다.

 

 

지적 바람피우기와 수채화에 빠져서 

 

 

그러니 이제 나 호호당의 길고 긴 지적 旅程(여정)은 대충 마무리가 되었다.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저 남은 것은 이 책 저 책, 이 사람 저 사람의 주장을 들어가면서 마치 난봉꾼처럼 독서 편력을 이어갈 생각이다. 그리고 열심히 조금이라도 더 멋진 수채화 작품을 만들어갈 생각이다. 아, 그리고 또 하나, 열심히 하늘과 구름과 바람을 구경하는 일이 그것이다. 

 

66세의 삶을 이 글로서 정리해보았다. 조금 어려운 얘기들도 있었지만 양해해주시길 바란다. 솔직한 글도 가끔은 써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