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해는 죽고 새 해는 잉태되고
엊저녁 7시 2분에 해가 冬至(동지)점을 지났다. 나날이 깊은 바다 속으로 침몰하던 깊은 海底(해저)에 도달한 것이고 그로서 다시 되돌아 浮上(부상)하기 시작했다.
동지로서 낡은 해는 죽었고 그를 이어 새롭게 孕胎(잉태)된 새 해는 아직 저 아래 깊고 깊은 바다 속에 있다. 그러니 오늘 동지부터 내년 3월 22일의 春分(춘분)까지 석 달 동안은 中有(중유)의 기간이다.
애매한 존재의 시간
中有(중유)란 무엇인가?
고대 힌두 철학에 기원을 둔 불교에서 일컫는 개념이다.
불교 철학에 의하면 사유(四有)가 잇다. 여기에서 有(유)란 존재를 의미하는 바, 존재의 방식에 네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생유(生有), 본유(本有), 사유(死有), 중유(中有)가 그것이다.
생유(生有)는 태어남의 순간이고 본유(本有)는 태어난 이후 죽음의 순간까지이며, 사유(死有)는 죽는 순간이고 중유(中有)는 죽는 순간부터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죽는 순간부터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시간이라! 흥미롭지 않은가? 생명이 떠났으니 有(유)가 아니라 無(무)라고 해야 할 터인데 말이다. 그런데 불교 철학에선 그 기간을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이 기간을 中有(중유)라고 일컫고 있다.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이 기간 동안 망자의 영혼이 떠돌아다닐 터인데 혹시라도 처음 겪는 생소한 환경에서 길을 잘못 들지 말라고 현세에서 기원해주고 지원해주는 의식이 바로 49재이다. 7일마다 일곱 번에 걸쳐 재를 올린다, 망자의 영혼이 저승의 迷路(미로)에서 나쁜 길로 빠지지 않도록 혹은 무서워서 방황하지 않도록 현세에서 기원해주어야만 다시 좋은 곳에 탄생할 수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제 해 또한 중유의 시간 속에 들었으니
돌아와서 얘기이다. 동지부터 내년 입춘까지 해는 中有(중유)의 기간을 보낸다. 해가 오늘 동지로서 死有(사유)에 들었으니 내년 3월 22일 春分(춘분)까지 해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애매한 기간으로 들어섰다.
동지와 내년 춘분의 중앙에 立春(입춘)이 자리하고 있다. 예로부터 입춘이 되면 새해라 해서 ‘입춘대길“이라든가 ’건양다경‘이란 문구를 써서 집의 대문이나 방문에 붙이기도 한다. 물론 지금은 그 말의 의미를 잘 모르게 되었지만.
이처럼 입춘이 되어 진정 새 해가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아직은 새 해가 시작된 것도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New Year는 3월22일의 춘분이 되어야만 동쪽 바다 멀리 수평선 위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춘분부터 밤보다 낮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기독교엔 復活節(부활절)이 있는 데 그 날자는 3월 22일부터 4월 26일 사이에 든다. 왜 오락가락할까? 하면 옛날엔 달력이 정확하지 않아서 그랬다. 그렇긴 해도 그 정확한 의미는 바로 3월 22일 즉 춘분을 의미하고 있으니 해다운 해, 즉 활기찬 새 해가 부활한 것이다.
해는 1월1일 새벽 자정으로서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동지로부터 내년 3월22일까지의 기간, 대략 석 달에 걸친 기간은 사실 대단히 모호한 기간이 된다. 中有(중유)의 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12월 31일 밤에 잠을 자지 않고 子正(자정)을 기다렸다가 그 시각이 넘어서는 순간 일제히 환호성을 지른다. 해피 뉴 이어! 하면서.
서울 종로 보신각에선 종을 치고 뉴욕의 타임 스퀘어에선 환호를 지른다. 그러면서 신기해한다. 어떻게 헌 해와 새 해가 一瞬(일순), 찰나의 시간 속에서 바뀔 수 있지? 하면서 신기해하고 신비해한다. 약간 作爲(작위)적인 느낌도 가지면서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건 작위이고 억지인 것이 맞다. 사람들이 그렇게 정해놓았을 뿐이다. 12월 31일의 자정 가까운 시각이나 1월1일의 자정 넘긴 시각은 그냥 연속되는 시간의 흐름인 것이 맞다.
그러니 불교 철학에서 말하는 中有(중유)란 개념이야말로 참으로 탁월한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그 중간의 완충 지역을 설정해놓고 있으니.
이별이나 만남 또한 어느 순간의 일이 아니라서
사랑하는 연인들이 어느 날 헤어졌다. 더 이상 보지 않게 된 날을 기억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그냥 드문드문 만나고 연락하다가 어느 기간인지 정확하진 않아도 그런 식으로 이별하기도 한다.
바로 그 애매한 기간이 완충 기간이다. 만나서 사랑하게 된 사이라 해도 어느 날 꼭 집어서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요, 헤어지는 것 역시 어느 날 몇 시 몇 분부터 헤어지는 것도 아니다.
가까워져 가는 것이고 멀어져 가는 것이다. 예전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나미’가 불렀던 “슬픈 인연”이라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멀어져가는 저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난 아직도 이 순간을 이별이라 하지 않겠네.”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은 어느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서히 이별해갈 뿐이다. 수시로 만나긴 해도 실은 ‘점점 멀어져가는 것’이고 그러다가 멀리 시야 밖으로 사라졌을 때 아, 우리는 이별했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하다. 내가 멀어져온 것인지 상대가 멀어져간 것인지 그마저도 분명치 않을 때도 많다.
다시 되돌아간다.
서서히 헌 해가 가고 서서히 새 해가 다가온다.
헌 해는 12월 31일 밤 12시로서 보내는 것이 아니고, 새 해 또한 1월 1일 자정 넘은 시각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헌 해를 보내고 새 해를 맞이하는 것 역시 석 달에 걸친 짧지 않은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다만 極限(극한)이나 極點(극점)을 따지고 규정하기 좋아하는 현대인들이 12월 31일 밤 12시를 지나는 순간 새 해가 시작되었다고 여길 뿐이다.
사람들은 1월 1일 새 해가 되면 동해 바닷가로 해맞이를 떠나기도 하고 서울 남산 또는 각 지역마다 높은 산에 올라 해를 맞기도 한다. 그냥 떠오르는 해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순간에 새 해의 소원을 가슴 속으로 빌어보기도 한다.
이론적으로 따지면 동지에서부터 춘분에 이르는 中有(중유)의 기간 동안에 가령 해를 보내고 또 맞이할 것 같으면 동지에 하든지 아니면 입춘에 하든지 또는 춘분에 해야 논리적이고 합당하다. 하지만 우리 모두 사용하는 달력이 흔히 말하는 양력 즉 ‘그레고리’력이기에 1월 1일 아침에 산에 오르거나 바닷가로 나간다. (사실 과학적인 측면에서 봐도 그레고리 달력은 그다지 좋은 역법이 아니지만 그냥 전 세계가 공통으로 쓰고 있을 뿐이다.)
지금 시각이 새벽 1시 23분, 엊저녁 7시 2분의 동지점을 지난 지 6시간이 조금 더 지나가고 있다.
어떤 것의 끝에서 새로운 시작까지의 시간
우리들은 습관상 기억을 할 때 처음에서 끝까지의 경과는 잘 기억해도 ‘어떤 끝에서부터 새로운 시작, 즉 처음이 시작되는 때’에 이르는 기간을 미처 인식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中有(중유)의 기간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왜 이런 이상야릇한 말을 호호당은 늘어놓고 있지?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유가 있다. 그 중유의 시간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떤 일을 하다가 그만 두고 다른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하자. 대개의 경우 어떤 일을 그만 두는 그 순간 다른 일을 시작하지는 않는다. 그 사이에 완충의 시간이나 기간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 시간이야말로 새로운 시작을 열기 위한 창조의 시간인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有(유)에서 無(무)로, 無(무)에서 다시 有(유)로 이어져간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無(무)란 바로 中有(중유)로서 바로 이 모호한 기간이야말로 새로운 시작을 열기 위한 위대한 창조의 기간이 된다는 얘기이다.
이는 마치 섹스를 통해 정자가 난자를 만나 수정란이 형성되고 그것이 子宮(자궁)에 착상된 이후 엄마의 뱃속에서 태아가 자라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 이후 아기가 출생한 후의 모든 일과 변화, 그리고 발전은 이미 그 이전의 시간, 즉 胎中(태중)에서 다 결정된다고 볼 수 있는 것과도 같다.
모든 창조는 시작 이전에 이루어지고 끝난다.
모든 창조는 시작 이전에 결정이 난다는 말이다. 그러니 중유의 시간이야말로 대단히 의미 있고 중요한 시간 또는 기간이라 하겠다.
우리가 내년 2021년에 하게 될 일, 그리고 변화 변천, 발전 혹은 퇴보 등의 모든 것은 어제 동지에서부터 시작되어 내년 3월 22일 춘분이 되면 다 결정되어 있을 것이다. 애매한 시간 속에서 말이다.
일의 향배를 알고 싶을 때 우리는 그 일의 機微(기미)를 살피라는 말을 듣는다. 그래서 살펴보고자 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왜냐면 모든 기미와 기틀은 애매한 시간, 어떤 끝과 새로운 시작 사이에서 생성되고 결정이 되기 때문이다.
그만 글을 맺고자 한다. 오늘의 얘기에 대해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침 시각 간밤에 써놓은 글을 읽어보니 동짓날 긴 긴 밤의 꿈속과도 같아서 절로 어허!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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