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말에 대한 또 다른 해석
登高自卑(등고자비)란 말이 있다. 유교 경전인 中庸(중용)의 말로서 먼 곳에 이르려면 가까운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하고 높은 곳에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말에서 왔다. 譬如行遠必自邇(비여행원필자이),譬如登高必自卑(비여등고필자비).
때론 등고자비란 표현을 달리 해석해서 지위가 높아질수록 스스로를 낮추어야 한다는 處世(처세)의 말로 쓰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의 글은 또 다른 뜻의 말로서 얘기해보고자 한다. 높은 곳에 오르면 일부러 몸을 낮추어야 한다는 當爲(당위)의 말로서가 아니라 절로 자신의 왜소함을 알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 보고자 한다.
긴 인생 살다 보면 알게 되는 것들이 참 많다. 그냥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러함을 이해하고 체득하게 되는 것들이 많다는 말이기도 하다.
높은 산에 오르면 모든 것이 다 거기에서 거기라서
높은 산에 오르면 시야가 완전히 달라진다. 낮은 땅에선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하늘이 더 높아지고 땅이 더 크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건너 편 산은 물론이고 더 멀리 더 많은 산들의 능선과 봉우리들까지 눈에 들어온다.
낮은 곳에 있는 것들은 일목요연하다. 낮은 곳에선 커다랗던 숲도 큰 땅에 비하면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고 눈앞을 흘러가던 강도 그 길이가 훨씬 더 크고 길게 이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을을 내려다 볼 것 같으면 2층 건물이나 10층 건물이나 다 그만그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 알게 된다. 우리가 평소 지내는 낮은 땅에선 차이가 크게 느껴지는 것들이 높은 곳에서 보면 그 차이가 거의 없거나 미미하다는 사실을. 줄여 말하면 땅 아래의 모든 사물이 높은 산과 거대한 산, 장대한 하늘에 비하면 그저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물의 一齊(일제)함
사물의 一齊(일제)함을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알게 된다, 자기 자신이 이 크고 넓은 세상에 비하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존재란 사실까지 알게 된다. 즉 自卑(자비)함을 깨닫게 된다.
나아가서 지위가 높다 해도 돈이 많다 해도 얼굴이 잘 생겼다 해도 그게 다른 이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낄 순 있다 해도 세상의 거대함과 유구함에 비하면 그 차이란 것이 사실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다른 사물들까지 포함해서 다 미미하고 왜소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달리 얻는 게 있다. 그건 만물이 모두 微微(미미)하고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 각자는 어떤 통쾌함과 호쾌한 마음을 얻게 된다.
그간 좀 잘 살아보고자 또는 좀 더 앞서가고자 아등바등 애를 쓰고 기를 썼던 것이 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 애를 써도 계속 뒤쳐진다 싶어서 가졌던 열등감이나 自塊(자괴)의 심정 또한 전혀 그럴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 주변의 누군가가 내 눈에 참으로 한심하고 ‘찌질’해서 무시하던 마음 또한 실은 나의 찌질함으로 인한 것이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한심하다고 여겼던 주변의 그 사람이나 좀 잘 났다고 우쭐대는 당신이나 모두 이 세상에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것을 알고 나면 그로서 시원해지고 통쾌해지며 이윽고 어떤 자유를 얻게 된다. 편해진다.
장자의 소요유 그리고 제물론
어쩌다 한 번 태어나 살아보고 살아가는 인생, 주어진 시간 동안 재미나게 놀다가야지 하는 마음을 가질 것 같으면 그건 다름 아니라 莊子(장자)가 글을 통해 남기고 이름을 붙인 逍遙遊(소요유)편의 내용이고 만물이 실은 一齊(일제)하고 평등하다는 것을 보았다면 그건 장자 齊物論(제물론)의 경지이다.
높은 산에 올라 땅을 내려다보고 눈을 수평으로 두어 멀리까지 바라본 뒤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를 것 같으면 모든 사물을 포함해서 자기 자신의 卑賤(비천)함을 알게 될 것이고 세상과 천지의 장대함과 유구함을 보게 되니 마음이 호쾌해지고 시원해져서 걸침이 없게 된다. 크다 해도 그만이고 작다 해도 그만이다, 모두가 평등하고 모든 사물이 일제하다. 그러니 통쾌하고 시원하다.
절로 낮아지는 자기 자신
높은 곳에 오르면 억지로 자신을 낮출 것이 아니라 절로 낮아진다. 높은 지위에 올라 겸손을 떨면서 그 지위를 보전하려고 애를 쓸 일이 아니라 절로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잘 난 내가 없으니 굳이 겸손을 떨고 그다지 사양할 나도 없다. 잠시 어쩌다가 그 지위에 있게 되었다고 여기면 그만이다.
객관과 주관
사물을 이렇게 볼 수 있다면 그게 비로소 客官(객관)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주관의 마음도 없지 않다, 각자는 작은 小宇宙(소우주)란 말이 있으니 말이다.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고 우주도 없으니 나야말로 귀한 존재란 생각이 있는데 그 또한 틀린 말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는 바로 나 자신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 절대 틀린 말이 아니다.
이에 만물이 미미하고 평등하며 일제하다는 객관의 생각과 나야말로 더 없이 소중하다는 주관의 생각은 그렇다면 충돌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충돌할 것도 같지만 전혀 충돌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 각자가 소중한 만큼이나 타자도 소중하다고 알면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이 소중하고 귀하다고 알면 된다. 크게 눈을 뜨고 보면 모든 생명들은 저마다 존재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엄청난 투쟁을 하고 있다. 살기 위해선 다른 생명을 잡아먹기도 하고 잡아먹히기도 한다.
알고 보면 모든 것이 다 애처로워서
그렇기에 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고 슬픔으로 가득하다. 삶은 苦海(고해) 즉 고통의 바다인 것이 맞다. 이에 그 고통과 슬픔을 직시하면서 애처롭게 바라보는 눈이 있으니 그를 慈悲(자비)의 마음이라 한다. 慈悲心(자비심)이 그것이다. 동시에 사랑의 마음이다.
이런 자비의 눈은 객관의 눈이자 주관의 눈이기도 하다. 동시에 자비의 눈은 바깥으로만 향하지 않는다. 바깥에 있는 다른 존재들과 생명들도 애처롭지만 우리 모두 스스로도 애처롭다. 우리 모두 살아보려고 그 얼마나 애를 쓰고 참고 견디고 있는가.
이 또한 높은 곳에 오르면 보게 되고 알게 된다. 너른 세상이 온통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세 가지 시선과 생각이 하나로
객관의 눈에서 만물이 다 거기에서 거기란 사실, 일제하고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면 속이 통쾌하고 시원해진다. 豪爽(호상)해지니 莊子(장자)가 일러준 가르침이다. 각자가 하나의 소우주란 점은 동서양의 공통된 지혜로서 주관의 눈이다. 또 하나 만물이 그리고 모든 생명이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애처롭고 측은하니 자비의 눈이고 사랑의 마음이다.
높은 곳에 오르면 이 세 가지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세 가지 생각과 마음이 서로 충돌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높은 곳이라 해서 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 드라마에 ‘펜트하우스’란 것이 있다. 100층 고층 건물의 가장 높은 층에서 지상을 오만한 자의 눈으로 내려다보는 자들과 그런 위치에 가고자 발악하는 그야말로 세속의 드라마이다. 아직 진짜 높은 곳에 올라보지 않은 탓에 펼치게 되는 찌질한 자들의 애처로운 얘기이다. 아직 성숙되지 않은 자들의 성장 드라마라 해도 좋겠다. 아무튼 ‘스카이 캐슬’에 이어 시청률 좀 나오게 생겼다.
자아에 빠져 헤매다가 어느 순간 알게 되리니
사람은 태어나서 몇 년이 지나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된다. 自我(자아)를 알게 되면서 자신의 존재 증명, 세상에 있어야 할 근거와 타당성을 찾느라 애를 쓴다. 그게 좀 부족하다 싶으면 열등감에 괴로워하기도 하고 좀 잘 된다 싶으면 자만감에 우쭐댄다. 그렇게 열등감과 자만감 사이를 오가면서 수십년을 살아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인생의 연륜이 쌓이면 문득 알게 된다. 앞에서 말한 것들을, 그건 인생이란 높은 산에 올랐기 때문이라 해도 무방하다.
운과 명을 넘어서서
운명이란 것이 과연 있는가? 하는 궁금증에서 시작된 나 호호당의 긴 여행이 시작된 것이 1971년이니 이제 근 50년에 이르고 있다. 길고 긴 여정이었다. 이제 운명이란 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 제법 알만큼 알게 되었다.
이에 사람이란 운명의 곡선 위에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위상이 달라질 뿐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원운동은 돌아오는 것이니 운 또한 돌아오는 것에 지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제 2020년도 나흘 밖에 남지 않았다. 오늘 글로서 송년 인사를 갈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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