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에 섰을 때 당신은 진정으로 살아있다. 

 

 

가령 당신이 표창장을 받는다고 해보자. 강당 안엔 모든 구성원이 모여 있다. 당신은 약간 상기되고 떨리는 마음으로 연단에 오를 것이다. 조직의 장이 수여하는 표창장을 받는 순간 일제히 박수 소리가 들려온다. 모두가 당신을 주목하고 있고 아울러 연단에 올랐으니 물리적으로도 구성원들보다 높은 자리에 서 있다. 그 순간 당신은 당신의 實在(실재)함, 생생히 살아서 존재하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 누구나가 있고 싶은 곳은 이처럼 세상의 중앙이고 중심이다. 물론 중앙이나 중심은 당연히 다른 곳보다도 높기 마련이다. 일본 영화중에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이런 제목이 있는데 제목만으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문제는 세상의 중앙 혹은 중심이란 곳이 어떤 곳이냐 하는 점이다. 어려서 세상 알지 못하던 시절엔 만인이 인정하고 수긍하는 중앙이나 중심만을 생각하고 그곳에 서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중앙은 한 점에 불과하기에 그 자리엔 한 사람밖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된다. 그 중앙엔 나만 서고 싶은 것이 아니라 만인이 그리 하고자 하기에 그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철이 들면 그렇다.

 

사람은 중앙 또는 중심에 설 때 비로소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 하지만 만인이 바라는 그 중앙엔 확률적으로 설 수가 없다. 그건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만 초래할 뿐이다.

 

물론 이 세상은 하나의 중앙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부문과 분야에 걸쳐 저마다 중앙 그리고 중심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물론이고 그 어떤 사회도 그 구성원 숫자만큼의 중앙을 가지고 있는 가지고 있진 않다. 모두가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려면 인구 숫자만큼의 중앙이 필요한 데도 말이다.

 

 

세상이 작았을 땐 오히려 행복했는데 

 

 

과거 교통과 통신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의 산골 동네로 돌아가 보자. 전체 합쳐서 20 가구라 하자. 모두들 감자나 메밀을 주식으로 먹고 살았겠지만 그래도 그 안에는 배를 주리는 집이 있고 그런대로 배 주리지 않고 사는 집이 있었다. 그런 산골 동네에서 가장 여유롭게 사는 집의 가장은 세상의 중앙 그리고 중심에 살고 있었다. 산골 동네가 모든 세상이었기에 말이다.

 

옛날에 천하장사는 읍내 씨름 대회에서 가장 씨름을 잘 해서 황소를 상으로 차지한 사람이었다. 그는 씨름꾼으로서 천하의 중앙에 우뚝 서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씨름꾼에겐 읍내와 그 주변 마을이 온 세상이고 천하였기 때문이다.

 

바둑을 예로 들어본다. 지방 각 도시마다 바둑천재 혹은 영재가 한 명씩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경쟁의 무대는 도시 안의 일이 아니고 전국이 무대이고 나아가서 한국과 일본 중국의 날고 기는 기사들을 꺾어야만 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다. 그 사이에 무수한 바둑천재들은 어느덧 사라져버리고 만다. 중앙으로의 길은 너무나도 멀고 험하다.

 

 

글로벌 세상은 모두를 더 불행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오늘날 재산으로 가장 부자를 꼽으라 한다면 우리나라에선 고 이건희 삼성회장 한 사람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미 글로벌 세상이라 이건희 회장도 내가 세상 제일 부자란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글로벌 세상은 쉽게 오가고 왕래할수록 많은 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글로벌 최고는 한 사람밖에 없는 까닭이다.

 

사람은 중앙이나 중심에 설 때만이 삶에 만족할 수 있는데 만인이 인정하는 중앙이나 중심에 선다는 것은 오늘날 너무나도 어렵다. 그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만 격화시킬 뿐이다.

 

 

우리 각자는 아무 것도 아니기도 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이기도 해서 

 

 

그러니 달리 생각해봐야 하겠는데 그렇다면 어떤 생각이 과연 가능할까?

 

이 세상은 넓고 무수히 많은 사람이 살고 죽고 하기에 나 스스로는 사실 세상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인류 전체로 놓고 보면 각자는 그야말로 겨자씨 정도도 되지 않는다. 그냥 무수한 衆生(중생) 중의 일원일 뿐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내가 없거나 죽고 나면 세상도 우주도 사라진다는 점이 있다. 나는 나에게 있어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각 개인은 각자에게 있어 세상과 우주만큼의 비중이 있다. 따라서 싯다르타가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은 뒤 오른손은 하늘을, 왼손은 땅을 가리키면서 읊었다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설화는 지극히 옳고 당연한 말인 셈이다. 각자에게 각자의 존재가 우주이고 세상인 것이다.

 

각자는 세상에서 아무런 비중도 없다는 것과 각자는 각자에게 우주와 세상 그 자체란 생각, 이 두 생각은 참으로 극단적인 대립과 모순을 이룬다. 그렇지만 두 가지 모두 틀렸다고 말하긴 어렵다. 모두 타당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은 “어떤 사물에 대하여 같은 관점에서 동시에 그것을 긍정하면서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서 이를 모순율(矛盾律)이라 부르지만 앞의 두 생각은 관점이 다르다는 점에서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의 중앙 그리고 중심에 서라.  

 

 

그렇기에 세상의 중심이나 중앙에 서되 그 중심이나 중앙이 만인이 인정하는 곳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의 중앙이나 중심에 서고 또 위치하면 되는 일이다. 그러면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얘기이다. 앞부분에서 일본 영화 “세상의 중앙에서 사랑을 외치다”에서 보면 세상의 중심이란 결국 주인공이 중심이라 여기는 것이 바로 세상의 중앙이 되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중앙이나 중심에 선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하는 점에 대해 알면 되겠다.

 

사실 알고 보면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서고 싶은 중앙 그리고 중심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대통령이 꿈이었다면 그 시절엔 대통령이 중앙이었던 것이고 나이가 들어 사업으로 입신출세를 하거나 대기업의 고위 간부가 되고 싶다면 물론 그것이 그 사람의 중앙이고 중심이라 하겠다.

 

 

우리 각자는 중앙을 향해 가고 있거나 중앙에 섰을 때 삶에 만족한다.  

 

 

이처럼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있어서의 중앙과 중심은 조금씩 변해가기도 하고 때론 갑작스럽게 변할 때도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사람은 중앙이나 중심에 서거나 또는 그 중앙이나 중심을 향해 다가서고 있을 때 자신의 삶에 만족을 느낀다는 점이다. 목적지가 중앙이고 중심이라면 그곳으로 가는 道中(도중)에 있을 때 말이다.

 

저마다의 목적지로서 중앙이 있고 중심이 있다. 그리고 그곳으로 향해 가고 있을 때 만족할 수 있다. 물론 살아가다 보면 목적지로서의 중앙이나 중심이 바뀔 때도 있다. 이 산이 아니라 저 산이로세! 하면서 말이다.

 

살아가다 보면 때론 길을 잃고 방황하기도 한다. 하지만 길을 잃은 것은 큰 문제가 사실 아니다, 시간이 걸려서라도 길을 찾으면 된다. 그보다 더 문제는 기존에 생각하던 중앙이나 중심을 버리고 난 후 미처 새로운 중앙과 중심을 찾지 못했을 때 사람은 힘들어 한다. 실은 그게 바로 방황이다.

 

예컨대 돈을 벌어 부자가 되면 인생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정작 돈은 벌었으나 그 사이에 잃은 게 너무나 많다면 문득 내 헛살았구나 싶을 때도 있다. 이에 돌이켜 진정한 자신의 중앙이고 중심이다 싶은 길을 찾아 나서려 하니 너무 때늦은 감이 들기도 한다. 세월을 되돌릴 순 없으니.

 

 

방황과 전락의 삶이란 

 

 

그 바람에 사람은 더러 그냥 막 살기도 한다. 세월만 가라시구려 하는데 그건 이제 방황의 단계가 아니라 일종의 轉落(전락)이 하겠다.

 

스스로 자신의 중앙으로 그리고 중심으로 향해 가는 이를 두고 우리들은 그 사람답게 살아간다고 말한다. 자기답게 자신답게 살 때 그는 자신의 중앙과 중심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 만족한 삶을 살기 위해 자신의 중앙과 중심으로 다가서고자 함에 있어 대단히 어려운 하나의 문제와 봉착하기도 한다.

 

 

희생하는 삶은 없다. 

 

 

바로 현실의 여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현실의 여건 때문에 다시 말해서 호구지책 때문에 자신의 중앙이나 중심을 생각하고 있음에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 그냥 삶을 이어가기도 한다. 내 꿈은 이게 아니었는데 하면서 말이다. 이에 스스로 변두리의 삶이라 여기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젊은 시절 가졌던 꿈이 있었는데 살아가면서 가정을 이루다 살다 보니 당장 먹고 살아야 한다. 이에 마냥 자신의 꿈만을 쫓아갈 수 없게 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자녀들을 잘 부양하기 위해 내 꿈을 포기할 때 이를 두고 흔히 자신을 희생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엄밀히 생각해보면 그건 희생이 아니다. 자신의 꿈보다도 가정이 더 소중하고 아이들이 더 소중하기에 그런 것이고 이 경우 그 사람은 자신의 중앙을 가정과 아이들로 옮긴 것이다. 따라서 그건 절대 희생이 아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을 다 희생해서라도 당초의 목적지, 오로지 그 중앙과 중심을 향해 다가갈 수도 있다. 요는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포기하느냐 하는 취사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오늘 글로서 사람은 자신의 중앙이나 중심에 설 때 더불어 그곳으로 향해 다가설 때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다는 얘기를 했다. 다음의 마지막 글에선 이런 개개인의 삶과 사회 간의 문제에 대해 얘기하고 마무리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