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두리에 있을 때 사람은 불행하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신이 변두리에 있거나 가장자리에 처해있다고 느낄 때 우울해지고 불행해한다. 이런 생각이나 감정은 큰 국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민족감정이라 부르는 것의 상당수가 그 민족이나 나라가 변방이나 가장자리에 처해있을 때 나타나고 만들어진다.

 

변두리에 있거나 가장자리에 있을 때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달리 표현하면 ‘소외감’이라 부른다. 소외감이란 즉 자신이 중앙이나 중심에 참여하고 있지 못하거나 영향을 줄 수 없을 때 느끼는 감정이라 하겠다. 최근 우리 사회에선 ‘상대적 박탈감’이란 표현을 잘 쓰는 데 이 역시 꼭 돈의 문제가 아니라 중앙이나 중심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의 감정이기도 하다.

 

 

소외감이란 변두리에 처한 감정이다. 

 

 

다시 하는 얘기지만 이런 소외감 또는 중앙으로부터의 괴리는 반드시 금전이나 돈, 나아가서 사회적 지위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

 

예를 들면 9급 공무원 직의 청년이 있다고 하자.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공무원의 급여는 훗날의 연금까지 합산할 경우 일류 대기업의 사원보다도 더 많다. 그런데도 그 청년이 불만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업무나 역할이 무한정 반복되는 거대한 기계 속에서 작은 부품, 또는 볼트 혹은 너트와 같은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느끼기 때문인데 이는 결국 중앙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감정이다.

 

갱년기의 주부가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남편은 바깥일로 바쁘고 자녀들은 이제 어느 정도 컸기에 엄마와는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그간 열심히 살아오는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은 가정에 있어 절대적이었는데 이제 그게 아니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중앙에서 밀려났다는 감정이다.

 

최근 부동산 가격 앙등으로 엄청난 불만이 생겨났다. 그리고 부동산하면 으레 강남 서초 송파의 중심 지역이 거론되곤 한다. 바로 그곳이 서울 거주지의 중심이고 중앙인 까닭이다. 이에 서울 변두리에 사는 이들은 소외감을 느낀다. 나아가서 변두리라 하더라도 자가 보유 집에 사는 사람에 비해 전세나 월세에 사는 이들 또한 소외감 또는 박탈감을 느낀다. 점점 밀려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중앙 혹은 중심이란 것이 세상엔 존재한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지방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한사코 서울로 올라오거나 진출하고자 했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한양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지금도 역시 취업했을 때 지방보다는 서울에서 근무할 수 있기를 선호한다. 서울은 중앙이고 중심인 까닭이다.

 

서울,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거대한 중심이다. 돈과 권력, 문화와 예술, 학술, 교육과 의료 모든 면에서 서울은 중앙이고 중심이다. 대한민국의 인재나 나름 잘 났다고 하는 이들은 거의 모두 서울에 있다.

 

서울은 모든 방면에서 중앙이고 중심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무수히 많은 계층과 단계로 나뉜다. 지방보다 구분의 정도가 엄청나게 크고 깊다. 그렇기에 소외를 느끼고 불행을 느끼는 것은 지방에 사는 이들보다 그 정도가 훨씬 심하다. 줄여 말하면 서울이라고 다 같은 서울이 아닌 것이고 그런 까닭에 박탈감은 지방보다도 서울이 더 심하고 극단적일 것이다.

 

학벌 또한 그렇다. 충분히 의대에 들어갈 만한 실력을 갖추고서도 재수도 아니고 3수를 하고 있는 수험생을 보았는데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서울 의대를 가야만 하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서울의 다른 의대론 도저히 만족할 수가 없어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무엇이 그 학생으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품게 했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나름 이유가 있을 것이니.

 

옛날엔 평생 태어난 곳에 살다가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각 고을마다 가장 높은 산이나 그 고을을 지켜주는 鎭山(진산)이 있었다. 그 고을 사람들은 그 신령한 산의 정기를 받아 고을에 인재도 나고 태평하게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들 했다. 고을 밖으로 나갈 일이 거의 없었기에 고을의 진산이야말로 세상 중심에 있는 가장 높고 신령한 산일 수 있었다.

 

 

교통 통신의 발달로 지방의 신령한 산들은 죄다 위신을 잃고 말았으니 

 

 

하지만 KTX 타면 반나절도 걸리지 않고 전국 어디든 갈 수 있는 오늘날, 시골의 鎭山(진산)들은 죄다 과거의 위신과 신령함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인재와 돈은 다 서울로 모여들기에 지방의 마을, 요즘 말로 지자체가 잘 살려면 중앙 정부에서 내려주는 지원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지방 사람들은 예전에 가졌던 고을의 성스런 산에 대한 믿음이나 생각을 가질 수가 없다.

 

고을마다 존재하던 중앙 혹은 중심이 이젠 그냥 지방의 변두리 산으로 전락해버린 셈이다. 예전엔 읍내에 살면 나름 중앙에 산다는 생각 또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오늘날엔 읍내든 아니든 상관없이 죄다 변방이 되어버렸다. 이젠 중앙이란 오로지 서울 한 곳으로 집중되어 버린 것이다.

 

 

서울이라고 해서 같은 서울이 아닌 탓에

 

 

교통과 통신 그리고 물류가 발달하면서 모든 것이 서울로 집중되었고 그 바람에 서울은 그냥 중앙이 아니라 그야말로 超(초) 거대 중앙이 된 것이다. 서울 자체만으로도 무수히 많은 기준과 격차에 의해 그냥 서울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변두리와 가장자리를 가진 서울인 까닭이다.

 

수평의 서울이 아니라 수직 격차의 서울이란 얘기인 것이니 그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예로서 2000년대 초반 서울 강남에 처음 지어진 타워팰리스를 보라. 그로서 서울 안에 지어지는 신규 아파트는 복도식이 아니라 수직의 타워형 아파트였고, 지방에도 타워형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중앙은 그 높이를 높여가면서 낮은 변두리와 차별화되어 왔다. 중앙에 우뚝 높이 솟은 산의 형태를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끊임없이 분화되어 변두리로 밀어내는 중앙의 힘

 

직장 또한 그렇다. 정규직은 중앙에 속한 직장이고 비정규직은 변두리, 물론 비정규직 안에서도 층차가 나뉜다. 끊임없이 중앙은 중앙대로 분화해서 핵심 중앙과 亞(아)중앙, 말단 중앙이 생겨나고 변두리는 변두리대로 분화해서 차별이 이루어진다.

 

학술이나 예술 또한 그렇다. 대학원을 마친 다음 박사 학위를 받는다 해도 물 건너가서 그 학문의 중앙에 있는 미국이나 유럽의 명문 대학에서 학위를 받지 못하면 그건 학위가 아니라 변두리 학위이기에 잘 해야 ‘지방시’가 고작이다. 그러니 그런 정도론 서울 인 대학의 전임교수 직을 꿈꾸기란 아예 難望(난망)이다.

 

 

글로벌 시대엔 서울 또한 변두리일 뿐

 

 

물 건너간다는 얘기가 나왔으니 이참에 얘기를 해본다.

 

오늘날은 이른바 글로벌 시대이다. 글로벌 전체를 놓고 보면 우리나라의 중심이고 중앙인 서울 또한 일종의 변두리 혹은 변방이다. 서울대학교 졸업장만으로 통용되던 시절은 까다득한 옛날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모 대학에서 수료하거나 학위를 받아야만 학계에서 또 취업에 있어서도 나름 엘리트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음을 보라.

 

 

반대의 노력도 없진 않지만 역부족

 

 

물론 이런 중앙과 변두리의 차별화에 대한 반대 흐름도 없진 않다. 정치인들이 지방분권을 외치고 세종시를 만들어 행정수도로 하고 있지만 세종시를 중앙으로 생각하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사람을 채용하는 일에서도 이른바 블라인드 면접을 통해 차별 없이 인재를 뽑겠다곤 하지만 과연 글쎄? 그게 잘 될까. 지방대학을 배려하기 위한 노력도 있지만 서울의 명문 대학과 서울 인 대학, 그리고 소위 ‘지잡대’의 격차가 어디 가겠는가 말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중앙은 존재한다. 

 

 

중앙의 높은 산, 이는 인류 역사를 관통해오는 권력의 상징이다. 힌두 신화 속의 수메르 산,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구중궁궐의 높은 계단, 이 모두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다. 그건 중앙이고 중심이며 높은 곳이다. 그러니 정상에 오른다는 것은 성공과 출세를 상징하는 말이 되고 있다.

 

한때 존재했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실패한 것 역시 재산과 소득의 차별은 어떻게 해서든 줄일 수 있어도 권력의 공평한 분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사회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포지션을 부단히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인 까닭이다. 권력의 공평한 배분은 이론적으로 무정부 상태에서만 가능하다는 점.

 

오늘날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만족을 느끼고 자족하면서 살아가기란 너무나도 어렵다. 중앙에 속해 있거나 중앙에 서 있기가 너무나도 어렵기 때문이다. 양극화의 시대가 아니다, 무수한 많은 기준에 따른 다극화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에 행복하기란 너무나도 힘들다.

 

 

오늘은 문제제기에 그치지만

 

 

제법 긴 글이기에 오늘은 문제 제기에 그친다. 다음 글에서 이 문제를 우리가 어떻게 극복해갈 수 있는지, 나아가서 행복하고 만족스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본격적인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비는 내려도 날씨는 포근하다. 비에 젖은 은행잎 가로에 수북하게 쌓이고 빈가지 사이로 공간이 드러나는 가을의 마지막 날들이다. 모쪼록 시간 내어 젖은 낙엽이라도 한 번 밟아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