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해 처량해서 

 

끝자락의 가을이 아침녘 내린 비에 젖어 凄然(처연)하다. 남쪽 창 맞은 편 산은 옅은 운무에 가려 푸르스름한 잿빛이고 그 위의 하늘 역시 구름에 가려 쥐색의 잿빛이다. 하늘과 산 사이의 먼 공간만 그나마 밝은 잿빛으로 빛나고 있어 때가 한낮임을 알리고 있다.

 

처연하다는 표현을 쓰고 나니 문득 입에 달라붙는 구절이 하나 있다.

 

 

도연명의 시 한 구절

 

 

秋日凄且厉(추일처차려),百卉具已腓(백훼구이비).

 

옮기면 “가을날 처량하고 매서우니 풀들은 이미 시들고 있구나,” 정도가 된다.

 

이 구절은 도연명의 시 맨 앞부분 구절이다. 오래 전 시의 結句(결구)가 마음에 남아서 전체를 암기했었는데 이젠 잊은 지 오래이다. 구글에 가서 앞부분 구절을 가지고 검색해보니 나온다. 고맙네, 구글!

 

시의 내용은 늦은 가을날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멀리 떠나는 친구를 위한 송별의 자리에서 가진 아쉬움이다. 이런 스타일은 漢詩(한시)에 흔히 보인다. 다만 표현이 절묘해서 한때 기억하게 되었었다.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눈은 떠나가는 배를 저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배웅하지만 결국 지금의 이 아쉬움은 세월 따라 변해가다가 이윽고 사라지겠지” 하는 표현이다.

 

그렇다, 당장이야 아쉬움이 크겠지만 그 또한 시간이 가면 어떤 형태로든 변하고 옅어져서 나중에 잊히게 된다는 표현이 당시 내겐 꽤나 인상 깊게 남았던 모양이다. 원문은 目送回舟遠(목송회주원) 情随萬化遺(정수만화유).

 

 

불행을 통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시인

 

 

도연명은 그 증조부가 陶侃(도간)이라고 하는 일대의 영웅이었다. 이 사람은 중국 삼국시대 이후 생겨난 사마 일족의 晋(진)나라가 내부 분열과 이민족의 침입으로 망하게 되자 그 일부가 양자강 남쪽으로 도망가서 세운 망명 왕조인 東晋(동진)을 건립할 당시 혁혁한 공을 세운 장군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망명왕조 동진은 명맥을 이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훌륭한 인물의 증손자이니 도연명 역시 귀족 중심의 동진 왕조에서 한 자리 떵떵거리며 해먹을 것 같은데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증조부 도간 자체가 출신이 한미해서 크게 공을 세웠어도 사후 그 후손들은 별로 대접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귀족문벌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게다가 증조부 도간이 비록 상당한 유산을 남겼어도 아들이 무려 열여섯, 게다가 으레 큰 아들이나 적자에게 몫이 가는 법이니 도연명 쪽은 거기에 속하질 못해서 전혀 물려받은 것도 없었다.

 

돈도 없고 지위도 없었지만 그래도 도간의 후손이란 점에서 그나마 조정에서 나름 보살펴준 것이 후미진 시골의 縣令(현령) 자리였다. 젊어서 나름 큰 포부를 가졌던 도연명은 급여가 적은 마당에 거들먹거리는 상사의 비위를 맞추고 사는 것이 싫어서 자리를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시를 지으며 살다간 사람이다.

 

이때 지은 시가 저 유명한 歸去來辭(귀거래사)이다. 나 돌아갈래, 하는 시. 영화 박하사탕에서 설경구가 철길 위에서 “나 돌아갈래,” 하고 외치는 그 장면과 대사 역시 결국 오리지널은 도연명인 셈이다. (명작을 만들려면 앞의 명작을 잘 살펴서 변용해야 하는 법이다. 인간은 변하지 않기에.)

 

 

007 제임스 본드, 사망하다. 

 

 

비가 계속해서 오락가락하더니 이젠 좀 그칠 내릴 모양이다. 참, 그러고 보니 오늘은 11월 1일, 어제가 시월의 마지막 날이었구나 싶다. 시월을 흐지부지 보냈다는 아쉬움이 가슴 속에 차오른다.

 

숀 코너리가 죽었다고 한다. 아침 텔레비전 BBC를 보고 있으니 그에 관한 보도가 시간을 메우고 있다. 그럴 법도 하지.

죽은 장소가 바하마 군도의 작은 섬 안, 초부유층만이 살고 있는 특별구역의 별장이라 한다. 돈도 엄청 벌었고 기사 작위도 받은 양반이니 그럴 법도 하겠다. 황량하고 차가운 구름 음울한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햇빛 많은 바하마의 별장에서 생을 마감했으니 부러운 일이다. 게다가 그냥 잠자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하니 그 또한 복이다. 고생 전혀 없었고 아들 말로는 한동안 몸이 편치 않았다는 것이 전부이다.

 

이렇게 편히 갈 수 있는 것은 사실 큰 복이다. 그런데 나 호호당은 편히 갈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익히 알고 있다. 그래서 알려드린다.

 

 

운이 좋아야 죽을 때도 편히 간다. 

 

 

숀 코너리는 운세가 한창 좋을 때 죽었기 때문이다. 운이 좋을 때 가면 편히 가고 쉽게 간다. 3년 전에 돌아가신 내 어머니도 본인은 가는 줄도 모르고 멀쩡히 계시다가 순간에 혼절하시면서 돌아가셨는데 역시 좋은 운이 남아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숀 선생은 1930년 8월 25일 저녁 6시 05분에 태어났다. 따라서 庚午(경오)년 甲申(갑신)월 丁未(정미)일 己酉(기유)시가 된다. 입추가 丁酉(정유)가 되니 1957년 그리고 60년이 흘러 2017년이 입추였다.

 

영국 영화계는 상당히 특이한 면이 있는데, 영화배우로 성공하려면 일단 출신이 중상층 이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영국도 아니고 스코틀랜드, 게다가 한미한 출신인 그가 영국 영화계에서 성공하긴 실로 어려웠다. (유명한 영국 배우들에 대해 알아보면 거의 모두 집안 배경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으니 입추로부터 5년 뒤인 1962년의 일이었다. 흔히 ‘황금관운’이라고 내가 부르는 운이다. 미국 헐리우드 쪽에서 기획 중인 스파이 액션물인 007이란 시리즈 영화의 주연으로 캐스팅된 것이다.

 

007 영화가 대성공을 보자 제작사 쪽에선 연이어 후속편을 준비했고 그 바람에 숀 코너리는 1971년에 개봉된 7편까지 계속 주연을 맡으면서 영화 속 인물 제임스 본드가 되어 세계적인 인기스타가 되었다.

 

숀 코너리는 인간적으로도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었다. 1987년이 입춘 바닥이었는데 전혀 티를 내지 않고 보다 진지하게 영화 속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점이다. 입춘 바닥 직전인 1986년에 개봉된 영화 “장미의 이름”에선 세속을 떠난 수도사의 모습을 참으로 훌륭하게 역할을 해냈던 숀 코너리였다. 그가 바닥이었기에 어쩌면 그런 역할을 더 잘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이처럼 전문직업인으로서의 삶을 충실히 살아온 그는 2000년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2006년 미국 영화연구소에 평생공로상을 수여받은 뒤 공식 은퇴를 선언했다. 50녀의 연기 생활이었고 76세의 나이였다.

 

그 이후 그는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이번에 아주 편안하게 생을 마쳤다. 2017년이 또 한 번의 입추였기에 별다른 고통이나 고생 없이 수면 중에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돈도 실컷 벌었기에 바하마의 럭셔리 별장에서 멋진 여생을 누리다가 간 셈이다.

 

운이 좋은데 죽게 되면 아깝다는 생각, 더 살면서 좋은 세월 누리다가 가지 왜 일찍 가? 하고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할 수 있겠지만 박수 받을 때 떠나라는 항간의 말처럼 죽음도 상황이 좋을 때 찾아드는 것 역시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된다.

 

 

최후의 거인, 세상을 떠나다. 

 

 

그리고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세상을 떠났다. 이로서 한 시대가 저물었다는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 巨人(거인)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를 정치적으로 공격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은 현실이지만 그가 세운 공적과 업적은 역사에 남을 것이라 본다. 그가 키워놓은 삼성전자로 인해 우리 대한민국이 명실 공히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인 까닭이다. 삼가 고인의 영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