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걱정은 돈 걱정이다.

 

 

언젠가, 아마도 10여 년 전쯤에 걱정이 생겨서 앉아있는데 가까운 이가 나를 보더니 무슨 걱정이 있는 것 같다는 얘기를 했다. 이에 그렇다고 답했더니 그 이가 말하길 걱정이라면 돈 걱정일 텐데... 하는 것이었다.

 

사실이었다, 당시 나는 돈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어떻게 내가 돈 걱정을 하는 줄 알았냐고. 그러자 그 이가 답하길 살면서 하는 걱정의 대부분은 돈에 관한 것이지 달리 있겠냐고 했다. 그 말 또한 지극히 옳은 말이었다.

 

우리가 살면서 하는 근심 걱정은 90% 정도는 돈에 관한 것이다. 그 사실을 나는 그 이의 말을 통해 깨달았다. 달리 표현하면 돈은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의 90% 정도는 해결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걱정하면 으레 먹고 사는 걱정이 대부분이니 먹고 사는 문제란 것이 결국은 돈 걱정이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저 놈의 우라질 돈이란 것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는 푸념을 하게 된다. 정말이지 원수 같은 놈의 돈이다.

 

 

돈은 원수가 아니라 고마운 존재

 

 

그런데 최근 2-3년 사이에 생각이 또 한 번 바뀌게 되었다, 돈이란 것에 대해 말이다.

 

돈이란 놈이야말로 참으로 고마운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나 호호당이 이젠 돈이 많아져서 고맙다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다. 보다 정확한 이유는 돈, 그리고 돈 걱정을 하면서 살아가는 동안이야말로 제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돈 걱정을 통해 우리가 깨어있고 살아있게 되니

 

 

돈에 관해 신경을 쓰고 걱정을 하고 때론 힘들어하는 시간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날이 서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돈과 돈 걱정은 나로 하여금 覺醒(각성)된 상태로 만들어준다. 깨어있게 한다.

 

얼마 전 “살아있네!” 하는 말이 꽤나 유행한 적이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은 긴장감이 유지되고 있다는 얘기이고 느슨하거나 쳐져있지 않고 탄력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살아있다는 말은 에지(edge) 즉 날이 서 있다는 말과 같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탄력적이고 날이 서 있을 순 없다. 그건 과도한 스트레스 상태를 초래하니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풀어져 지내는 것 또한 좋지 않다. 그거야말로 어떤 면에서 더 나쁘다.

 

弛緩(이완)과 收縮(수축), 즉 조임과 풀림이 적당히 오가는 상태에서 지내야만 싱싱하게 살아갈 수 있다.

 

정말이지 우리 모두 돈 걱정에서 벗어나고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상태를 바란다. 그런데 완전히 돈 걱정, 달리 말하면 삶의 문제에서 해방될 것 같으면 그건 또 다른 문제, 어쩌면 더 심각한 상태를 초래하게 된다.

 

그런 상태를 독일의 어떤 철학자, 나 호호당이 존경해마지 않는 게오르그 짐멜은 “돈의 철학”이란 자신의 책을 통해 돈에서 해방되면 포만과 권태 나아가서 변태가 된다는 점을 대단히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근심 걱정 없는 상태는 죽음 이후에나 가능한 법이라서

 

 

근심 걱정 없는 세상 혹은 그런 삶, 無憂(무우)의 상태는 종교적으론 해탈이나 환희의 극치이기도 하지만 그런 만큼이나 그것은 현실의 삶에서 존재하지 않고 또 존재해서도 안 되는 상태라 하겠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어떤 문제가 해결되거나 바람이 이루어졌을 경우 그간의 근심 걱정이 싹 사라지고 이젠 원이 없다, 편안하다 하는 심정이 들 때도 있지만 그건 사실 일순의 감정에 불과하다.

 

우리의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에 無憂(무우)와 悅樂(열락)의 상태는 이어질 수가 없다.

 

사람들이 가끔은 너무나 기쁘고 편안해져서 이젠 죽어도 좋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죽지는 않는다. 이어지는 삶인 것이다. 그런데 그 말에 대해 집중해보자, 걱정이 없어지고 염려가 싹 사라진 상태가 이어질 순 없으니 그 다음엔 죽음이 찾아와야 실로 옳다는 얘기이다. 영화로 말하면 해피 엔딩 상태가 되는 것이니 그 다음에 다시 필름이 이어지면 아니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실이기에 사람들은 시늉이라도 그런 말을 내뱉게 된다.

 

마지막 즉 엔딩(ending)에서만 아무런 염려가 없어지고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수 있고 또 그래야만 옳다고도 할 수 있다.

 

 

삶이란 모순된 욕구를 안고 가는 것

 

 

그런 까닭에 삶에 대한 욕구는 그 바탕에 실로 대단한 모순을 안고 있는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살아가겠다는 것은 고통과 근심을 감내하겠다는 얘기와 같은 얘기, 즉 동의어이란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하는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응축하고 있는 것이 바로 돈이기에 돈과 돈 걱정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날이 서 있게 하고 나태와 포만 그리고 권태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고마운 존재란 점을 이제 알 게 된다.

 

돈을 많이 벌어서 해방되면 좋은 일에 쓰겠다는 선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건 환타지, 아름다운 환타지에 불과하다. 그냥 돈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엔 삶이 끝나야 온당하다. 즉 죽어야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살아있고 살아가겠다는 말 혹은 욕망은 현실과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따라서 부단히 근심하고 걱정하겠다는 말과 같은 의미란 사실.

 

살겠다는 말은 싸우겠다는 말이며 싸우려면 날이 서 있어야 한다. 날이 무뎌지면 그 싸움에서 당신이 베임을 당할 것이니 날은 수시로 날카롭게 세워야 한다. 그런 자가 늘 마음 풀어진 상태로 지낼 순 없는 노릇이란 것은 너무나도 타당한 얘기가 아니겠는가.

 

 

때론 환타지를 통해 카타르시스도 느끼면서

 

 

물론 늘 날을 세우고 살아가기엔 너무나 피곤하다. 그래서 우리들은 극장에 가서 영화도 보고 집에서 넷플릭스를 통해 이런저런 볼거리를 시청한다. 그런 효과를 달리 카타르시스라고 한다.

 

영화나 드라마가 카라르시스란 대단한 美德(미덕)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게 끝이 있기 때문이다. 그 영화가 슬픈 이야기이든 즐거운 이야기이든 드라마틱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 모두 끝이 있고 결말을 짓기에 그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만끽할 수 있다. 끝이 있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환타지가 된다.

 

하지만 우리 눈앞의 삶은 일단 끝이 없다. 내일 당신이 차 사고가 나서 죽게 될 지라도 그를 모르는 이상 그렇다. 시한부 삶을 선고받지 않은 이상 우리 모두 삶은 이어진다는 기대나 예상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어지는 삶은 투쟁이고 힘든 국면이 지속적으로 찾아오기 마련이니 날이 서 있어야 하는 법이고 그러기 위해선 누구나 하는 돈 걱정 당신도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운명의 계절과 순환은 존재하지만 그 역시...

 

 

나 호호당은 60년에 걸친 삶의 순환이 있으며 그것의 변화해가는 모습은 우리가 해마다 겪는 봄 여름 가을 겨울과 동일하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이다.

 

봄은 다시 살아나기 위해 힘이 들고 여름은 싸우는 계절이며 가을은 풍요와 수확의 기간이며 겨울은 조용해지고 한가로운 때가 된다는 말도 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자신의 계절을 인지하기가 어렵다. 왜냐면 현실의 삶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투쟁이며 수시로 근심 걱정으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국운을 예로 들어 얘기해보자. 우리 국운의 가을은 1994년부터 2009년까지였다. 하지만 그 사이에 외환위기가 있었으며 2008년엔 글로벌 금융위기도 있었다. 물론 좋은 일도 실로 많았다. 2002년 월드컵 4강의 신화라든가 G 20 정상회담과 같이 그를 통해 국력을 자랑하고 과시하기도 했다.

 

그 사이에 새로 지어지는 아파트는 타워형으로 변했고 실내엔 붙박이장이라든가 여러 편리한 시설들이 기본으로 채워졌다. 주차장도 넓어졌으며 입구엔 안전을 위한 경비초소가 생겨났다. 이 모두 생활의 질을 높여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대신에 가계부채란 문제를 안게 되었지만 말이다.

 

1994년부터 2009년까지의 세월은 전체적으로 보면 분명 풍요의 세월이었던 것이 맞다. 하지만 부와 신분의 양극화는 더욱 심해졌으며 좋은 일자리는 갈수록 드물어졌다. 나름 힘든 일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어떤 이가 찾아와서 묻는다. 그러면 당신은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풍요로운 전성기였다고 얘기해주면 놀라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게 전성시절이었다니 때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 이들도 있다.

 

이에 이런저런 얘기를 통해 객관적으로 그 시절이 괜찮은 때가 아니였습니까? 하고 일러주면 수긍하면서도 수긍 못하는 모순된 표정을 짖는 상담객도 적지 않다.

 

가진 자는 더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싸운다. 그 사람의 욕심이 사나워서가 아니라 그게 삶인 까닭이다. 당연히 가지지 못한 자는 가져야 하기에 투쟁적일 수밖에 없고 그렇다.

 

그렇기에 만족이란 것, 걱정 없는 상태라든가 안식의 시간을 궁극적으로 맞이하려면 그건 죽음 뒤의 일이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한 걱정하는 것이어서

 

亡者(망자)에게 우리들은 영원히 평안한 잠에 들라고 기원해주기도 하고 때론 하늘나라에서 안식을 갖게 되기를 우리는 빌어준다. 이는 반대로 살아있는 자는 살아있는 한 영원히 평안한 잠에 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순 없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

 

나 호호당은 최근 돈 걱정을 좀 하면서 지낸다. 코로나19로 인해 타격이 제법 있다. 근심 걱정을 한다. 하지만 분명히 알고 있다. 돈 걱정 하면서 살고 있는 현 상태야말로 잘 살아가고 있는 상태란 것을 확신한다.

 

살다보면 구력이 좀 쌓이다 보면 원수가 실은 은인이나 귀인이란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그처럼 늘 걱정을 안겨주는 돈이 원수 같기도 하지만 실은 우리로 하여금 잘 살게 하는 존재란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살아보자, 싸워보자, 근심 걱정 돈 걱정하며 살아야겠다. 휴식은 죽고 난 다음에 충분히 주어질 것이니.

 

이제 호호당의 첫 전시회가 잘 마무리되고 있다. 좀 한가해질 것을 생각하니 그 또한 기분이 좋다. 어느덧 계절은 여름으로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