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때에 씨 뿌린 대한민국, 그렇지 못한 북한



봄에 때에 맞추어 볍씨를 뿌려야만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볼 수 있다. 물론 그 도중인 여름에는 부지런히 잡초를 뽑아야만 하고 日氣(일기)도 순조로워야 한다. 


우리 國運(국운)의 순환에 있어 씨를 뿌려야할 시기는 1976년 무렵이었다. 그 때가 우리와 북한 모두에게 있어 穀雨(곡우), 즉 씨를 뿌려야 할 때였던 것이다. 


비록 독재자란 평가를 받고는 있으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모든 가용한 자원을 총동원해서 씨를 뿌렸다. 중화학 공업의 육성이 그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제조업 강국으로 성장했고 2006년, 즉 국운의 霜降(상강)인 수확기에 풍성한 결실을 볼 수 있었다. 당시 전자와 자동차, 조선, 화학 등등 우리의 모든 주력산업들이 엄청난 실적을 보여주었던 것이 그것이다. 


이 모두 결국은 1976년 국운의 씨 뿌릴 시기에 야무지고 독하게 씨를 뿌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2006년 우리의 반쪽인 북한은 핵실험을 강행했다. 


남쪽은 경제발전에 성공해서 부강한 나라가 된 반면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른 북한은 핵개발에 성공했으니 그 대조가 참으로 심하다. 



북한이 핵개발에 매달린 이유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복잡하게 따질 것도 없다. 그 이유는 북한의 경우 씨를 뿌려야 했던 1976년에 씨를 제대로 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랬던 까닭이 사회주의 체제 자체의 문제인지 아니면 김일성과 그 집단의 잘못인지 그건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북한은 그 중요한 시기를 그냥 흘려보내고 말았다. 


1976년과 2006년, 30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시차가 존재한다. 그러니 그 도중에 북한 역시 잘해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던 것일까?

이를 벼농사로 비유해서 설명해본다. 


볍씨를 뿌렸다 해도 가뭄이 들면 농사가 되질 않는다. 그렇기에 6월 23일 경의 夏至(하지)까지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낸다. 기우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하지 무렵까진 늦어도 비가 내려야만 농사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 국운에 있어 夏至(하지)는 1986년경이었다. 북한이 오늘날처럼 핵이라고 하는 협박 수단을 통해 생존의 길을 모색해보려는 생떼를 부리게 된 것은 결국 국운의 하지인 1986년까지 제대로 된 경제발전의 길을 찾아내지 못했거나 아니면 공산체제의 모순으로 인해 손을 놓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마지막 때를 놓친 북한이었던 것이다. 


북한의 경우 제 때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으니 그냥 무사하게 흘러가는 법은 없다.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때를 놓친 북한의 고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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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6년으로부터 15년이 흐른 1991년 무렵이 되자 북한으로선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일들이 발생했다. 


1991년 말 그간 철석같이 믿고 의지하던 소련이 붕괴했을 뿐 아니라 또 하나의 뒷배였던 중국이 우리 남한과 수상한 거래를 하더니 졸지에 1992년에는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텄다. (그 바람에 아버지에 이어 북한의 통치자가 된 김정일은 죽을 때까지 중국을 저 배신자들! 하면서 미워했고 경계했다.) 


엄청난 고립감을 느낀 김일성이가 핵개발을 염두에 두기 시작한 것 역시 1991년이었을 것으로 추산한다. (그 결과가 바로 1993년 초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인 NPT 탈퇴였고 그로서 제1차 북핵 위기가 발생했다.) 


다시 말하지만 북한으로선 1986년 무렵, 국운의 하지 무렵이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북한은 그냥 세월을 보냈고 그 바람에 그 10년 뒤인 1996년이 되자 식량 고갈과 부족으로 인해 엄청난 사람들이 굶어주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절을 보내야 했다. 


북한은 양면 전략을 썼다. 비밀리에 핵을 개발해가되 우리 측에겐 경제원조를 요청했다. 때마침 김대중 대통령의 햇볓 정책과 맞물려서 2000년엔 최초로 남북한 정상회담이 열렸다. 하지만 2002년 핵개발 사실이 미국 정보 당국에 의해 발각되면서 우리로선 더 이상 북한을 원조할 근거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자 김정일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오로지 핵 개발에 매진했다. 이제 죽으나 사나 핵을 완성한 다음 그것으로서 우리는 물론이고 미국과 담판을 지어보겠다는 장기에 걸친 어려운 전략을 택했다. (그 사이에 북한 김정일은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게 집요하게 경제 원조를 요청했으나 미국이 동의하지 않는 한 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결과 2006년 마침내 북한은 핵 실험을 단행했다. 본격 협박을 시작한 북한인 것이다. 



김정일과 김정은 부자의 생존전략



김정일은 파탄에 빠진 경제를 살리지 못한 가운데 심한 압박 속에서 2008년 뇌졸중과 뇌일혈로 쓰려졌고 결국 2011년 말 사망하고 말았다.

김정일은 대단히 머리가 뛰어나고 치밀했던 사람이었던 것으로 판단이 된다. 권력을 김정은에게 넘겨주면서 자신의 사후에 있을 상황에 대해 대단히 치밀한 전략을 수립해놓았던 것 같기 때문이다. 


이에 김정은은 권좌에 오른 후 부친의 사전 지침에 따라 상당수의 권력자들을 처단했고 특히 대표적 친중파이자 피붙이인 장성택을 처행했는데 이는 결국 중국을 극도로 경계했던 김정일의 사전 안배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작년 3월 그간에 도발을 거듭해오던 김정은이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미국에게 비핵화 담판을 짓자고 나섰던 것 역시 김정일의 사전 전략이 아니었나 싶다. 



좌초된 북한의 담판 전략과 그 한계



하지만 북한 김정일과 김정은 부자의 답판 전략은 올 초 하노이 회담의 협상 실패로 인해 사실상 무너지고 말았다. 


영변 핵시설만 포기하는 대가로 먼저 경제제재를 푼 다음 그간에 만들어놓은 핵 무력을 하나씩 협상의 카드로 써가면서 최대한 경제를 살려보겠다는 김정은의 구상은 이른바 빅딜이 아닐 것 같으면 아예 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책을 만나 좌초되고 말았다. 미국은 여야를 막론하고 북한에 대한 不信(불신)심리가 엄청나게 강한 까닭이다. 


이에 김정은은 전략을 수정해가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를 끌어 들여서 협상력을 높여보려는 쪽으로 방법을 바꾸고 있다. 물론 문재인 정부의 역할도 대단히 어려워지고 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를 조건으로 북한이 좀 더 양보하는 방안을 도출해내려는 것이 정부의 기본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교착상태에 빠진 비핵화 담판에 대한 전망



이제 장차 이 일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애기해보자, 일종의 전망이다. 


전망을 함에 있어 두 가지 방법이 가능하다. 


먼저 단기 흐름에 입각한 전망부터 얘기해본다. 


작년 3월 김정은의 제안으로 시작된 북핵 담판이다. 이에 6월 미국 백악관에서 제1차 정상회담이 있었으나 알맹이는 전혀 없었다. 아쉽지만 일단 인사를 나눈 셈이라 치자. 


그런 이후 올 2월 하노이에서 제2차 정상회담이 개최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 호호당은 갸우뚱했다. 2월에 열린다면 잘 될 까닭이 없는데 싶었기 때문이다. 이에 미리 얘기는 하지 않았으나 아마도 실패할 것으로 짐작했고 실제 결과 역시 그러했다. 이번 회담의 성과가 있다면 양자 간의 입장 차이가 엄청나게 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 전부였다.


일은 시작으로부터 24, 즉 이번 경우 24개월이 흘렀을 때 성패가 드러나도록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자연순환의 법칙에서 하는 얘기이다.


 

금년 9월에서 11월 사이에 숨은 고비가 있으니



그렇기에 내년 2020년 3월이 최종적인 고비가 될 것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그 도중에 보이지 않는 진짜 고비가 숨어있다는 점이니 그건 18개월에서 20개월 사이에 존재한다. 


따라서 작년 3월에서 계산해보면 올 9월에서 11월 사이에 아마도 뉴스 보도가 되진 않을 것으로 보지만 양자 간에 마지막 절충이 그 무렵에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니 그 비밀 접촉과 협상에서 사실상 윤곽이 드러나게 될 것이란 얘기이다. 


정리하면 올 9-11월 사이에 있을 비밀 협상이야말로 이번 핵 담판에 있어 성패를 좌우하는 기로가 될 것이다. 보도는 되지 않겠지만 양쪽에서 흘러나오는 내용들을 잘 분석해보면 어느 정도 가늠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이제 장기 흐름에 입각한 더 큰 시야에서의 전망에 대해 얘기해보자. 15년 간격으로 살펴보면 충분하다. 


1976년 국운의 穀雨(곡우)인 파종 시기에 남한은 발전과 번영의 씨를 뿌렸고 북한은 그냥 놀았다. 


1991년 국운의 大暑(대서)에 남한은 왕성하게 발전의 경로를 밟고 있었으나 북한은 소련이 무너지고 중국이 우리와 수교하면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이에 핵 개발을 시작하게 된 북한이다.

 

2006년, 국운의 霜降(상강) 수확기에 남한은 풍성한 수확을 보았으나 알거지가 된 북한은 결국 핵실험을 강행했다. 


이처럼 15년 간격으로 살펴보면 남북한의 차이가 명료해진다. 따라서 다시 15년이 흐른 시점은 2021년 국운의 大寒(대한) 시점이다. 나 호호당은 2021년이야말로 북핵 문제만이 아니라 사실상 모든 것이 총 정리되는 최종 시점이란 판단을 한다. 



종합 전망



이 점을 앞서의 얘기와 연결해서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은 전망이 가능해진다. 


올 9월에서 11월에 진행되는 북미간의 실무협상이 비핵화 협상에 있어 사실상의 고비이자 機樞(기추)가 될 거란 점이다. 이에 그 일이 잘 진행된다면 내년 3월 이후 전체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 제3차 정상회담이 열릴 것이고 또 좋은 결실을 얻게 될 것이라 본다. 


그러나 반대로 그렇지 않을 경우 내년엔 보다 더 엄중하고 경색된 국면이 찾아들 가능성이 크다는 점, 그리고 마침내 2021년까지 이어질 경우 현재로선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는 엄청난 변화가 발생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예컨대 북한 체제의 급격한 붕괴라든가 여타 현재로선 생각하기 어려운 변고가 발생할 가능성 등이 그것이다. 


씨를 뿌려야 할 때 씨를 뿌리지 못하더니 오늘날 저토록 생억지를 쓰고 있는 북한이다, 우리의 반쪽이 저렇다니 그저 딱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