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 바쁜 일이 생겼으니
최근 두 가지 바쁜 일이 생겼다. 그 바람에 글 쓰는 작업이 다소 소홀한 감이 있다. 그림도 그리지 못한다.
하나는 동영상 프로그램을 만드는 작업이고 또 하나는 고려 말 조선 왕조 초기부터의 왕들을 포함해서 주요 인물들의 기록과 사주를 교차 분석해가면서 당시의 상황을 음미해보는 일이 그것이다.
동영상 만드는 일, 꽤나 까다로운데
동영상을 좀 괜찮은 퀄리티로 만들려고 하니 이게 생각보다 어렵다. 작업실 안에 환경을 갖추는 일부터 카메라와 녹음 등등을 세팅하는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반복하다 보니 한 달이 넘게 걸렸고 이에 영상편집, 물론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친구에게 맡겨서 하지만 그 또한 가령 13분 분량의 동영상을 편집하고 자막을 붙이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장난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작은 마이크를 턱밑 옷깃에 매달고 녹음을 하니 소리가 좋지 않다, 그래서 자막을 달고 있는데 이게 또한 시간이 여간 걸리는 게 아니다, 칠판 또한 처음엔 화이트보드를 썼는데 난반사가 너무 심해서 흑판으로 바꿔 달고 등등 작은 거 하나만 바뀌어도 전체 세팅을 다시 조정해야 한다. 오디오 비디오가 이렇게 힘들다니.
3월 말에 시작한 작업이 이번에 처음 영상을 올리기까지 40일 정도가 걸렸다. 촬영 자체는 사실 아무런 일도 아니지만 편집해서 올리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은근히 질린다. 장차 해가면서 좀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해볼 생각이다.
역사의 일을 인물들의 사주를 통해 교차 분석해보고 있으니
그래도 스스로 재미나 하는 일은 두 번째. 고려의 공민왕이나 이성계, 정몽주, 이방원 등의 초기 인물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선조와 이순신 류성룡 등의 群像(군상)들, 후기의 영조와 정조, 사도세자, 이어서 대원군 이하응과 고종 또 민비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근 천 여명의 인물들을 마트릭스(matrix)로 펼쳐놓고 그들의 사주를 기록과 대조해가면서 분석하노라면 기존의 역사 기록이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주장이나 학설과는 또 다른 모습들 그리고 감춰진 裏面(이면)들이 나타난다.
수많은 인물들이 여러 백년에 걸쳐 빚어낸 역사를 위키백과나 포털이나 서적 등에 실린 자료들을 통해 그들의 일을 정리하고 그를 각자의 운명 순환에 대입시켜 연구해보는 일이다. 사실 엄청나게 방대한 작업인데 그만 여기에 빠져버렸다.
약간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저 많은 내용들을 독자님들을 대상으로 이해하기 쉽게 글로 쓰는 일? 이건 또 다른 문제이자 엄청난 작업일 것이다. 과연 저 무지막지하게 방대한 내용을 通史(통사) 또는 기사본말체의 형식으로 쓴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싶다.
10년만 젊었어도 힘차게 글을 쓸 수 있을 터인데, 이젠 선뜻 내키지가 않는다. 67세의 나이는 역시 체력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생각을 좀 해보고 있다. 재미난 대목들을 추려서 써볼까? 하는 것도 한 방편이 되겠지 싶다.
두 가지 일 모두 벅차다. 그러니 최근 들어 그림은 한 장도 그리지 못하고 있다. 가장 재미가 있고 쉽게 몰입할 수 있는 놀이는 수채화 작업인데 말이다.
동영상 작업을 시작한 까닭, 외로워서
사실 동영상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이제 나이도 있고 해서 자연순환운명학 강의도 인터넷 강의로 만들고 주식 강의도 그렇게 해보려는 의도이다. (자연순환운명학의 전체 이론을 책으로 저술하는 작업 또한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나 호호당이 연구해낸 자연순환운명학은 뻥이 심한 중국인들이 만들어놓은 기존의 사주명리학과는 정확도라든가 이해의 깊이에 있어 차원이 다른 과학이다. 주식 기법 또한 여태껏 그 누구도 포착해내지 못한 기법이다. 그런데 사람이란 남달리 뭘 알고 나면 외로워지는 법이다.
이 흥미진진한 내용을 알게 되었으니 그를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음미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좋은 경치를 만나면 혼자 보고 즐기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듯이 그렇다.
자연순환의 이치, 그리고 주식을 포함해서 모든 금융자산의 움직이는 다이나믹(dynamic)을 종전과는 차원이 다른 경지에서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게 처음에 아주 즐거웠는데 그 결과 오늘날에 이르러 스스로 孤獨(고독)함에 빠지고 있다.
40대 시절엔 곤궁함 속에서도 스스로는 아직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 이른바 前人未踏(전인미답)의 경지에 가보겠다는 覇氣(패기)가 있었다. 그 결과 오늘에 이르러 당초의 소망은 분명 이루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이 바로 이곳, 누구도 와보지 않은 이 외딴 곳에서 홀로 우두커니 서성대고 있는 것 같으니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이란 말인가 싶다. 너무 멀리 와버렸나?
물론 이런 얘긴 푸념에 불과하다. 누가 너더러 그렇게까지 멀리 가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너의 발로 알아서 갔지? 그러니 사실 별로 할 말도 없다.
그래서 동영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건 또 다른 고생의 시작인 것 같으니 약간은 당황스럽다.
스스로 위안해보는 말
이럴 땐 스스로 위안이 필요하다. 잠시 머리를 굴려보니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 떠오른다. 시의 내용은 이렇다.
단풍 든 숲에 두 갈래 아름다운 길이 있었는데 몸은 하나, 그래서 한 쪽 길을 택했다는 얘기, 어차피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지면서 끝이 없을 것이니 되돌아 올 순 없을 거란 점을 잘 알고 있는 시인이다. 이에 한 쪽 길을 밟기 시작하는 시인은 이런 생각을 한다. 훗날 세월이 흘러 나는 아마도 탄식하게 될 거야, 사람들이 잘 들어서지 않을 것 같은 길로 들어섰던 것이 결국 내 모든 것을 다 바꾸어 놓았다고.
그러니 지금의 상황 또한 나 호호당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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