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행복감을 느꼈으니
최근 몸이 좀 불편하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좀 있다 보니 생각도 많아지고 그러다 보니 더 늦게 잠에 든다. 좀 푹 자야 하건만 그건 생각이고 간밤엔 새벽 5시 40분을 확인한 뒤에야 겨우 잠에 들었다. 일어나보니 11시, 작년 말에 생긴 이석증의 후유증까지 더해서 어질어질했다. 하지만 이 또한 그냥 받아들인다.
샤워를 마치고 강아지들 산책을 나갔다. 고개를 숙였다가 들면 순간 휘-하고 어지럽지만 그저 조심한다. 단지 내 산책길 주변에 그림자가 제법 짙어지고 있었다. 풀이 자란 것이다. 늙은 강아지 봉이는 내가 맡고 팔팔한 강아지 바리는 아내가 데리고 간다. 두 놈의 취향이 달라서 보조를 맞출 수가 없다.
철쭉 만개하고 날은 더 없이 좋다. 비만 조금 내려주면 아주 그만인데...
냄새 맡고 오줌 지리는 것을 취미로 하는 늙은 봉이는 유기견 출신이라 나이를 모른다. 다만 데려온 지 12년이 넘었으니 노견이다. 작년부터 치매가 와서 인지기능이 떨어지고 시력도 떨어지고 때론 정말 멍을 때린다. 후각도 떨어졌는데 그 바람에 산책길에서 냄새 맡는 시간도 훨씬 길어졌다.
느릿느릿 걸으면서 냄새가 특이하다 싶으면 코를 들이박고 숨을 깊게 들이시며 냄새를 맡는다. 한참을 망설인다, 쌀까 말까. 옆에 서 있는 나는 은근히 부아가 난다. 좀 가자, 짜샤!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고 때론 줄을 잡아채기도 한다. 그러면 늙은 강아지 놈은 네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틴다. 싫어! 하고 항변한다. 더 기다려주기도 하지만 세게 잡아채기도 한다. 매일 늦은 아침 늙은 강아지와 나는 밀당을 해야 하니 이 또한 은근히 스트레스.
그런데 오늘은 기분이 정말 상쾌했다. 행복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유는 아파트 엘리베이터가 정상 작동되었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가 병을 주더니 약도 주네
지난 주 목요일 엘리베이터 정기점검 중에 문제가 생겼고 그 바람에 토요일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정상이 되었다. 고쳤다고 했는데 멈추곤 하는 바람에 한 번은 엘리베이터에 갇히기도 했다. 공포가 확 밀려왔다. 갇히는 공포, 갑갑증, 겁이 난다.
그런데 강아지들은 으레 점심 무렵이면 산책 나가는 줄로 알고 사정을 봐주지 않고 보챈다. 특히 늙은 봉이 놈은 왜 안 나가냐 하면서 왁왁 짖어댄다. 강아지가 계속해서 째려보고 따지면 그 또한 상당한 압박감을 느낀다. 어쩔 수 없이 뚱뚱 묵직한 놈을 안고 11층에서 내려가고 또 올라오길 목, 금, 토까지 몇 번을 해야 했다. 물론 작업실에 나갔다 귀가할 때에도 걸어서 올랐다. 지랄! 절로 말이 험해진다.
심폐 운동, 다리 운동 확실히 된다. 도중에 숨이 차서 두 번 쉬었다가 올르곤 했다. (점심엔 이렇게 했지만 저녁엔 아들과 엄마가 산책 때문에 데리고 내려갔다 올라온다. 나는 일부러 늦게 귀가한다.)
엘리베이터가 작동되지 않는 11층 아파트, 오르내리자니 힘들고 가만히 집에 있으려니 답답하다. 몇 년 전 부산 해운대 주변의 초고층 아파트가 태풍으로 해서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나름 낄낄 거렸는데 내가 당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 남의 불행이 나의 즐거움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그러니 반성!
토요일 저녁 밖에 있는데 아내로부터 엘리베이터 정상 작동이란 카톡이 왔다. 너무 좋았다, 이제 살았구나! 그런 까닭으로 해서 오늘 일요일 점심 무렵의 산책은 정말 즐거웠다. 엘리베이터 타고 편히 내려가고 또 올라올 수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좋을 줄이야. 그래서 늙은 강아지 ‘짜식’이 느릿느릿 걷든 말든 그래 실컷 냄새 맡아라, 나도 뭐 좋다, 엘리베이터가 슝-하고 올라가줄 터이니 말이다.
힘들어야만 행복할 수 있으니 거 참!
그러면서 생각이 들었다. 행복하려면 그에 앞서 힘든 일이 있어야 하는구나, 매일 행복하려면 매일 힘들어야 하는구나, 그렇다면 어쩐다? 힘들게 살기 싫으면 행복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래 좋다, 행복 그런 거 바라지 않을게, 그러니 힘든 일도 생기지 말게 해주시오, 하고 상대도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협상을 시도했다. 운명?, 하느님, 신 등등이 아마도 그 누군가일 것이다. 결국 내가 나에게 수작을 걸어보고 있었다.
어렵고 힘들지 않으면 행복도 재미도 없다. 대단히 이성적인 판단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건 또 좋니? 하고 스스로 물어보니 그건 또 아니지! 하는 말이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그럼 뭐 어쩌자는 거니? 하고 다시 물어보니 그런 생각 하지도 마, 그런 질문 원래 답이 없다는 거 너도 진작에 알고 있잖아! 하는 말이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오후 시각 글을 쓰고 있는데 창밖 너머 숲속에서 새가 요상한 소리를 내고 있다. 저 소린 쟤들끼린 뭔가 신호를 주고받는 모양인데 난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처럼 우리 모두 타인의 고통에 대해선 그런가 보다 여긴다. 내 일이 아니면 새소리나 사람의 소리나 거기서 거기. 참 못 됐지만 어떤 면에서 그게 더 정상이다. “내 코가 석자”란 말이 그것이다.
최근의 상담들을 다시 생각해보면서
최근에 있었던 상담들을 한 번 되돌아보게 된다.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운이 다 갔음에도 돈을 더 벌어야 해서 병원을 개업했다가 진짜 어려워진 의사 선생님, 남이 보기엔 가질 것 다 가졌건만 뭘 하나 재미있는 게 없다고 불만에 가득 차서 찾아온 젊은 엄마, 사업이 잘 되는 바람에 식당을 두 개나 더 열었다가 코로나로 인해 은행 빛에 쪼들리고 있는 사장님, 어렵사리 공무원 시험에 붙어서 발령을 받고 근무하다가 이건 도저히 할 짓이 아니다 싶어 그만 두고 로스쿨을 마쳤는데 현재로선 수입이 거의 없는 암울한 젊은 변호사. 시댁에서 집을 해준다고 해서 결혼을 했는데 그렇게 되질 않자 이혼해버린 젊은 돌싱.
運(운)을 떠나서 산다는 게 이리도 찌질 궁상이다.
하지만 알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힘든 때를 보내고 나면 맑은 정신이 들고 그러면 또 다시 힘차게 살아갈 것이란 것을 말이다.
영문도 모르고 학교에 들어왔으니
세상과 삶의 현장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커다란 학교란 생각이 든다. 영문도 모르고 태어나서 생명의 타고난 질긴 본능, 잘 살아보고자 하는 욕망 하나 달랑 들고 갖은 노력을 해가는 우리들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최근엔 대학원까지 포함해서 거기까지가 학교인 것이 아니란 사실.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세상 학교의 커리큘럼”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 맹목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아닌가 싶다.
일찍 돈 벌어서 중년 이후엔 즐기며 살아야지 하는 달콤한 기대, 최근엔 경제적 자유란 말도 등장하긴 했다만 그런 얘기를 들으면 늙은 나 호호당은 그저 웃을 뿐이다.
욕망이 있고 유혹이 있는 한 이 세상은 온통 도처에 함정과 덫이 놓여 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다. 재미난 점은 가령 당신이 어떤 함정에 빠졌다면 그로서 인생 학교의 수업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그 과정을 마치면 또 다른 수업으로 이어진다. 죽을 때까지.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얻게 되는 엉뚱한 생각이 하나 든다. 어쩌면 이 세상에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예비 학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그다지 하고 싶진 않다. 죽어서 다른 세상으로 나아갔더니 거기에 또 한 단계 높은 차원의 학교에 들어갈 것 같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서 그렇다. 내가 숨 쉬고 살고 있는 이 세상만 해도 욕망을 심어놓고 그걸 미끼로 빡-세게 공부를 시키는 학교와도 같다는 생각이 드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싶다.
그저 새삼 확인하는 것은 일상은 스트레스의 연속이란 점이다. 운이 좋아도 그렇고 운이 떨어져도 그렇다.
며칠 몸이 힘들어서 글을 제대로 못 쓰고 있다. 독자님들께서 이 양반 혹시? 하는 생각을 할 것도 같아서 오늘 이런 이상한 글을 올린다. 생각해보니 글을 올리지 못한 진짜 이유는 몸도 그렇긴 하지만 최근의 생각들이 일반 독자들의 현실적인 삶과는 다소 동떨어진 주제들이 아닌가 싶은 망설임이 큰 탓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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