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또에 당첨된 바람에 팔자 고친 예술가

 

 

근대 프랑스 繪畵(회화)라 하면 뭐니 해도 인상주의(impressionism), 피사로, 모네, 세잔, 고흐, 마네, 르누아르, 로트렉, 고야 등의 화가들 말이다. 하지만 그 중 인상파 화가 한 명을 꼽으라 하면 당연히 클로드 모네이다.

 

말년에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었어도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던 사람, 물 위에 뜬 수련 연못 그림들을 연작으로 그려낸 화가가 클로드 모네이다. 화가가 시력을 잃은 것은 마치 청력을 읽은 베토벤을 연상시킨다. 그 바람에 대중들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었으니 마케팅 효과 만점이다.

 

모네는 너무 가난해서 그림에 전념할 수 없었다고 한다. 뭐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에야 살아생전에 그림 한 장에 수십억을 받는 화가들도 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덕분이다. 자본과 화상들이 결합해서 그림 시장을 크게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림만 그려서 생활하는 이는 별로 많지 않다.

 

 

흥미로운 모네의 일생과 운명

 

 

그런데 모네란 사람의 일생을 보면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생활고에 시달린 탓에 자살까지 생각했던 사람이 어쩌다가 어느 날 로또에 당첨이 되는 바람에 한 방에 팔자를 고쳤기 때문이다.

 

나 호호당 역시 모네가 로또에 당첨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데 텔레비전에서 알려주었다. 그래서 아, 그래? 하고 호기심이 생겼다. 저 양반 무슨 운에 그런 행운이 따랐지 싶어서 알아보았다.

 

생년월일을 알아보니 1840년 11월 14일로 되어있다. 평민 출신인 탓에 생시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유럽의 경우 귀족이라면 거의 모두 출생시각까지 기록 보존되어 있다.)

 

干支(간지)로 바꾸어보니 庚子(경자)년 丁亥(정해)월 丁丑(정축)일이다. 생시가 없어도 이력을 살펴보면 보면 금방 입춘과 입추를 알아낼 수 있다.

 

1887년 丁亥(정해)년이 立秋(입추)였고 1857년과 1917년이 立春(입춘) 바닥이었다.

 

 

로또 역시도 운이 따라야 되는 법이니

 

 

모네가 로또에 당첨된 것은 1891년이었다. 1887년이 입추였으니 그 4년 뒤는 이른바 黃金財(황금재)의 운이었다. 60년 순환에 있어 먹고 살아갈 기초가 생기는 운이라 나는 이를 황금재의 운이라 부른다.

 

역쒸! 그렇구나, 아무리 로또를 열심히 사본 들 운이 좋아야 당첨이 되는 법이다. 그렇다. 지금 이 순간에도 로또를 꾸준히 사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운이 따르지 않으면 헛일이란 사실.

 

모네가 받은 돈은 당시 액수로 10만 프랑이었다. 지금의 우리 돈으로 치면 30억에서 50억 정도 되는 큰돈이었다. 이에 생활고에서 풀려난 모네는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대략 40Km 떨어진 센 강 근처에 연못이 딸린 전원주택을 구입했다. 서울로 치면 북한강 근처의 양평 정도라 보면 되겠다. 이리하여 훗날 모네의 대작인 수련 그림들이 바로 이 집 연못에서 탄생했다.

 

 

운이 바닥이다 보니 失明(실명)하게 된 모네

 

 

모네가 명성을 얻은 것에는 역시 실명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래서 그 점 또한 알아보았더니 역시 일생을 통해 가장 건강이 좋지 않은 시기였다.

 

모네의 운세 순환에 있어 입춘 바닥은 1917 丁巳(정사)년이었는데, 그가 두 번이나 수술을 했어도 시력을 거의 상실하게 된 시기는 1923 癸亥(계해)년이었다. 입춘 바닥으로부터 6년 뒤였다. 입춘으로부터 7.5년을 전후한 몇 년간은 모네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생의 가장 힘든 시기가 되는 법이다. 이 무렵에 심각한 병이 생기면 거의 사망한다.

 

모네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그림에 매달렸다. 사실 그것 말고 달리 할 일이 있었겠는가 싶다. 그리고 1926년 12월, 시력을 잃은 후 3년 뒤에 가서 결국 세상을 떴다. 폐암 때문이었다. 66년을 살았으니 당시로선 짧게 산 것은 아니다.

 

시력을 잃기 1년 전, 죽기 4년 전인 1922년 모네가 자신의 집 연못의 다리 위에서 포즈를 취한 사진이 남아있다. 시골 농부 모자를 쓰고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채 다리 난간에 팔을 걸친 모습이다. 연못엔 수련이 한창이고 다리 근처엔 덩굴이 드리워져있다. 흑백 사진이라 그런지 더 인상적이다.

 

모네의 수련 그림은 무려 250장 정도라고 한다. 나중엔 시력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그런지는 몰라도 거의 추상화에 가깝다. 물도 수련도 거기에 비친 하늘도 없고 그저 색과 빛만 존재한다. 모든 것이 뭉개지고 흐트러지고 있다.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어떤 경계에 있는 것 같다.

 

 

또 다른 예술가, 보헤미안의 삶과 운명

 

 

예술가의 생애를 얘기했으니 한 명 더 알아보자.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은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모더니스트 시인이자 보헤미안의 얘기이다.

 

이름은 피터 알텐베르크(Peter Altenberg)이고 주로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에서 제1차 대전 직후까지 살다간 사람이다. 생애는 1859-1919년이었다.

 

피터 알텐베르크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먼저 오스트리아란 나라에 대해 잠깐 얘기해본다.

 

 

한 때 대단했던 오스트리아, 비엔나

 

 

오늘날 오스트리아는 아주 작은 나라이고 조용한 나라이지만 제1차 대전에서 패망하기 전까지 거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유럽의 중부와 동남부를 아우르는 제국. 수도 비엔나는 따라서 20세기 초까지 유럽의 정치 사상 문화 예술의 중심지였다.

 

근대경제학의 창시자이자 한계효용이론의 제창자인 칼 멩거라든가 자유주의 경제학의 대가인 프리드리히 하이예크,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드, 언어철학의 천재 비트겐슈타인, 금빛으로 여성의 몸을 그려낸 구스타프 클림트 등등이 모두 20세기 초반 비엔나에서 활동했다.

 

 

카페 센트랄과 피터 알텐베르크

 

 

그렇기에 비엔나는 토론의 도시였고 그러다보니 카페가 유명하다. 카페에 모여 앉아 갑론을박하던 세기 말적 도시였던 비엔나이다. 따라서 비엔나엔 무수한 카페들이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가게 문을 열고 있다. 그중에서 특히 유명한 카페 중에 하나가 바로 카페 센트랄(Cafe Central)이다.

 

프로이드나 히틀러, 트로츠키 등등의 역사적 인물들이 이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얘기를 나눴던 장소로 유명하다. 최근엔 우리나라 관광객들, 특히 여성들이 비엔나에 가면 거의 빼놓지 않고 들렀다 오는 것으로 보인다. 블로그에 사진과 글이 많이 올라온다. (나 호호당의 경우 1990년 비엔나에 들렀을 때 그 가게 앞에서 구경만 하고 왔다.)

 

카페 센트랄 가게에 들어가면 실물과도 같은 정교한 밀랍인형의 노신사가 앉아있는데 그가 바로 피터 알텐베르크이다. 거의 평생을 이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돈벌이엔 전혀 관심이 없었으나 비엔나 사람들이 절대 잊지 않고 추억하는 시인이자 작가였던 그는 우편물 주소도 아예 이 카페로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보헤미안,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사람이었고 괴짜였다. 책을 낸 적도 있지만 그것으로 돈을 벌진 못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그의 호텔 방값도 내주고 숙식도 제공했다고 한다.

 

 

천상병 시인에 대한 기억 단편

 

 

우리 역시 이와 비슷한 분이 있었으니 작고한 천상병 시인이다. 종로 인사동 근처, 또 이제는 이전한 종로 관철동 한국기원에서 구걸을 했던 시인이다. 나 호호당이 옛날 은행 다니던 시절 근처의 한국기원에 가서 바둑을 두곤 했는데 어느 날 내게 다가와 이상한 미소를 지으면서 50원만 하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던 기억이 있다.

 

저 사람 좀 이상하네 했더니 바둑 두던 내 친구가 웃으면서 ‘아니야, 저 사람 미친 사람이 아니야, 시인인데 기원에 오면 동냥을 하고 그 돈으로 막거리 마신다고 하던데, 한국기원 단골 손님들은 다 알아, 저 분 이상하지만 좋은 분이라 하면서 대우해주는 눈치이던 걸’ 하는 것이었다.

그 분이 바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 하리라” 라는 시, 즉 귀천을 남기신 천상병 시인이었다. 그 묘한 미소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예술가의 사주

 

 

다시 돌아가서 피터 알텐베르크, 생일을 알아보니 1859년 3월 9일이고 생시는 불명이다. 간지로 바꾸니 己未(기미)년 丁卯(정묘)월 丙午(병오)일이다. 그냥 척 봐도 예술가임을 짐작케 한다. 사실 예술가나 시인들은 금전에 대한 욕망이나 감각이 둔한 편이다. 그렇기에 예술 하면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일, 세상에 가장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력을 보니 처음 책을 낸 1896년 丙申(병신)년이 입추였고 그 30년 전인 1866 丙寅(병인)년이 입춘 바닥이었다. 1859년에 태어났으니 어린 시절 정확히 몰라도 심각한 좌절을 겪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카페 센트랄에 죽치면서 비엔나 거리를 오가는 여성들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했고 또 글을 썼는데 그게 당시로선 화제를 모았다. 일종의 페미니스트였던 셈이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머물던 카페를 소재로 시를 남기는 바람에 카페 측에서 밀랍인형을 만들어 추념하고 있기도 하다.

 

그가 남긴 글 중에 이런 위트 있는 글귀가 있다. 소개해본다.

 

“신은 천재들 안에서 생각하고 시인들 안에서 꿈을 꾸지만 잠은 나머지 평범한 우리들 안에서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