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주인공이 나 자신일까 아니면 유전자일까?

 

 

‘이기적인 유전자’란 제목의 꽤나 널리 소개된 교양과학 책이 있다. 리처드 도킨스라고 하는 영국의 진화생물학자가 쓴 책인데 이 방면의 베스트셀러이다. 요지는 개체로서의 생명은 유전자가 지나가는 통로라는 주장이다.

 

이를테면 나 호호당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를 내 아내의 유전자와 섞어서 아들에게 넘겨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성공적으로 유전자를 넘겨주었으니 사실상 나 자신이나 내 아내의 역할은 다 한 셈이라는 것이다.

 

사실 틀린 말이 아니다. 다만 기분이 언짢아질 수 있겠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내가 겨우 유전자가 거쳐서 가는 통로 혹은 숙주에 불과하다는 얘기이고, 더 나아가서 너는 안 중요해, 중요한 것은 유전자일 뿐이야 하는 소리로 들리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주인공이 유전자냐 아니면 개체로서의 나 자신이냐의 문제라 하겠다.

 

 

우리 인간은 자기인식을 지닌 특별한 동물이라서

 

 

우리들은 누구나 ‘나 자신’ 즉 Self 를 인지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우리들은 그저 유전자의 통로나 운반체가 아니란 생각을 한다. 그런데 저 영국의 생물학자는 그게 그렇지가 않다고 불편한 소리를 하고 있다.

 

나 자신 또는 self 를 인지하는 것을 자기인식 또는 自意識(자의식)이라 한다. (영어로는 Self-consciousness.)

 

하지만 자연계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동식물들은 그렇지가 않다. 일부 고등동물의 경우 어느 정도 자기의 존재를 인지하고는 있지만 우리 인간처럼 고도로 통합된 자기의식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렇기에 우리 인간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일반 생명체들에 비해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라 하겠다.

 

인간 또는 인류가 과거 어느 시기에 자아를 확고하게 인지하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아를 인식하게 되자 일반의 다른 동물들과는 전혀 다른 골칫거리를 안게 되었다. 하나가 아니라 실로 많은 숙제를 말이다.

 

 

자기인식이 있기에 죽음이 존재한다.

 

 

그 많은 해결해야 할 숙제 중에서 가장 큰 숙제는 다름 아니라 ‘죽음’이다. 개체로서의 우리들은 조금만 철이 들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개체의 수명은 限定(한정)이 있기 때문이다. 有限(유한)하다.

 

통합된 자기의식을 지닌 우리 인간이기에 죽음이란 문제에 대해 고민한다. 흔히 생명은 유한한 삶을 산다고들 말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체로서의 생명일 뿐, 전체로서의 생명은 유전자를 이어가는 한 죽음은 없다.

 

생명은 영원하다, 단 유전자가 이어지는 한 그렇다. 하지만 나 호호당이란 개체만 놓고 본다면 올 해 예순 넷이니 30년 뒤가 되면 존재하지 않을 확률이 거의 절대적이다.

 

 

종교, 죽음이란 숙제를 해결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

 

 

자기인식을 지닌 인간, 개체임을 느끼는 우리 인간들이 필사적인 궁리를 한 끝에 만들어낸 생각의 집합이 있으니 그게 바로 ‘종교’이다.

 

모든 종교는 永生(영생) 즉 영원한 삶을 얘기한다. 몸이 죽으면 천국이나 극락에 가서 더 즐겁게 살게 된다는 주장을 하는 종교이다.

 

불교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불교의 바탕이 된 힌두 철학은 解脫(해탈)을 주장했다. 해탈이란 해방 또는 자유를 뜻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속박하는 모든 번뇌로부터 풀려나는 것을 말하는 바, 해탈은 결국 번뇌의 원인인 ‘자기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석가모니 싯다르타가 설파한 涅槃(열반) 역시 해탈을 위한 일종의 방법론이었다. 열반 혹은 열반적정이란 번뇌의 불길이 꺼진 상태 즉 번뇌에서 벗어난 ‘마음의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지만 그 가르침이 대중화의 길로 접어들자 결국 極樂(극락)이라고 하는 세계가 실재하며 그곳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식으로 변했다.

 

번뇌라 말해도 되겠고 삶의 속박이라 말해도 되겠지만 그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자기를 인식하기에 타인과 아귀다툼을 하게 되고 또 개체로서의 삶은 유한하다는 문제, 즉 죽음과 관련이 된다. 모든 번뇌의 뿌리에는 죽음이 놓여있다.

 

자기 자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당연히 유한한 시간 속의 존재임을 인식한다. 즉 생겨났다가 이윽고 사라지는 존재, 生滅(생멸)하는 우리들이다.

 

생겨나면 사라져야 하고 태어나면 죽어야 하니 숙명이라 하겠는데 정말 이 답답한 사슬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옛 종교는 천국과 극락에서 영생을 누린다는 식으로 얘기를 했지만 냉정히 말하면 그 역시 답답하고 근거가 약한 주장에 불과하다.

 

 

사랑과 자비는 죽음이란 숙제에 대한 해답이지만

 

 

이 문제에 대해 종교는 또 한 번의 돌파를 이룩했다. 그 해답은 바로 사랑 혹은 慈悲(자비)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고 했던 예수의 말이 바로 그것이고 보시를 강조하는 대승불교의 주장이 그것이다.

 

사랑은 내 소중한 것을 다른 이에게 주는 것이다. 사랑이 지극하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내 목숨마저도 때론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내어놓을 수 있다.

 

진정으로 이런 마음을 가진다면 그건 바로 우리 누구나가 지닌 강렬한 자기인식, Self-consciousness를 내려놓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것이다. 자기인식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개체의 유한한 삶에 대한 강박감도 내려놓을 수 있다. 자기, self 가 사라지면 죽게 될 자기도 없어지고 따라서 죽음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죽음의 반대말은 삶이 아니라 사랑이고 자비가 된다. 이게 바로 오늘날 기독교와 불교와 같은 종교가 설파하고 있는 근원적인 가르침이다. 이를 다시 풀이하면 자기인식을 내려놓아야 세상 속박과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다지 성공적이라 하기 어려운 종교의 가르침

 

 

리들은 매 순간 자기를 인식한다. 그렇기에 사랑과 자비를 설파한 종교의 가르침은 설령 그 말이 옳다고 긍정하더라도 순식간에 부정하는 우리들이다.

 

교회나 성당, 절에 가서 설교나 설법을 들을 땐 고개를 끄덕이지만 그곳을 떠나오는 그 즉시 자기를 인식하게 되고 자신의 이익과 처지를 생각하게 된다.

 

교회 주차장에서 시동을 거는 그 순간 바로 자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사고가 날 수도 있다.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은 우리 인간들에게 자연계의 동물처럼 살 것을 주문하는 얘기이다. 하지만 ‘내일의 먹을 것’을 부단히 걱정해아 하는 것은 우리들이 강렬한 자기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기에 현실에 있어 기독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다. 信者(신자) 수는 많아도 진정으로 자기인식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인식을 환상이라고 했던 러스트 형사의 말

 

 

이제 앞의 글에서 얘기한 바, 트루 디텍티브의 러스트 형사가 한 말, 결국 작가인 닉 피졸라토가 한 말, 인간의 자기인식은 생명체의 진화 과정에 있어 비극적인 실수였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셨을 것이라 본다.

 

자기인식을 두고 환상(illusion)이라고 한 말 역시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자기를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런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하는 문제가 새롭게 대두된다.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처럼 유전자를 이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다.

 

트루 디텍티브의 결말 부분에 가서 러스트 형사의 마지막 대사는 하나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결국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 개개인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 속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 해답 역시 크게 보면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와 같은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러스트 형사의 말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것 같으면 나라는 존재도 있고 우리도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나와 우리가 공존하는 것이고 나와 우리가 하나라는 얘기이다.

 

하지만 현실 사회 속에서 나와 우리는 부단히 충돌하고 있다. 우리도 중요하지만 역시 내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優先(우선)하는 때가 더 많으니 그렇다. 우리의 크기나 규모가 커지면 그 ‘우리’란 생각은 더욱 애매하고 추상적으로 변하는 것 역시 현실이다.

 

나를 인정할 것 같으면 삶은 유한하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당연히 永生(영생)같은 것은 바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를 인정할 것 같으면 삶은 유한하지가 않다, 죽음도 넘어설 수 있다, 어쩌면 제한적이긴 하지만 永生(영생)에 근접해갈 수가 있다.

 

永生(영생)은 永遠(영원)을 전제로 한다. 그러면 유한성을 의미하는 시간의 개념도 사라진다. 하지만 우리는 ‘나’라는 인식, 러스트 형사의 말로는 환각이라 하지만 그 환각을 내려놓을 수가 없는 우리들은 매 시간 바쁘게 살아간다. 내가 존재하는 한 삶이라고 하는 게임의 끝 즉 죽음이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호호당이 제시하는 또 다른 대안의 가능성

 

 

이에 대해 나 호호당이 제시하고자 하는 대안은 조금 다르다. 물론 감히 정답이라 주장하지는 않겠다.

 

운명이란 것에 대해 호기심이 생긴 결과 운명을 연구해왔고 그러다보니 우리의 삶은 시간의 순환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순환이란 미르체아 엘리아데가 언급한 바의 영원히 되돌아오는 시간, 즉 Eternal Return이다. 사실 이는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한 말이다. 우리말로는 ‘영겁회귀’라고 번역된 바로 그 말이다.

 

‘영원히 되돌아오는 시간’은 한 번 스쳐 지나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화살’, 오늘날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그 개념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그리고 그 순환을 가장 잘 이해하는 방식은 그것을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 호호당이 이룩한 것은 그 순환의 공식(formulae)를 밝혀내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우리 모두 저마다 순환하는 ‘삶의 수레바퀴’ 또는 ‘운명의 수레바퀴’ 위에 올라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레바퀴 위에선 모든 지점이 중심인 것이니

 

 

이에 우리의 삶이 수레바퀴를 타고 도는 삶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알게 되면 수레바퀴 위의 모든 지점 혹은 時點(시점)이 중심점이란 것을 알게 되고 그로서 매 순간이 영원한 과거와 미래를 응축(凝縮)시킨 영원이란 것을 알게 된다는 니체의 주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본다.

 

이를 더 쉽게 말하면 우리 삶의 매 순간 모든 순간이 절정의 때이자 그 자체로서 永遠(영원)이란 얘기이다. 좀 더 풀어서 얘기하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은 그 자체로서 한 세트(set)이기에 거기에 좋고 나쁨, 선악이 어디 있는가 하는 얘기이다.

 

자연순환운명학의 사상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것과 너무나도 닮아있다. 다만 그 순환을 계량화해서 公式化(공식화)시켰다는 점이 다르다.

 

폭염 속에서의 사색이었다, 긴 글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