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저녁 상담을 한 건 했다. 사무실을 접은 뒤 아직 상담을 본격 재개한 것은 아니지만 예전의 고객들이 요청해오면 대부분 응하고 있다. 또 나름 사정이 급한 분이면 기꺼이 상담에 응하기도 한다. 나로선 전화상담이 편하지만 요청에 따라 양재역 주변의 카페에서 보기도 한다.

 

가장 좋은 케이스는 오시는 분이 차를 가지고 있는 경우이다. 그럴 경우 호호당의 우면동 집 근처로 오시게 해서 만난 뒤 인근의 조용한 곳에 차를 정차해놓고 차 안에서 상담을 한다. (우면동엔 조용한 장소가 많고 또 삼성연구소 인근에는 카페도 여럿 있어서 커피나 차를 사와서 차안에서 상담을 하면 분위기도 편하다.)

 

그 분은 운세 흐름의 전성기를 넘기고 지금은 서서히 침체로 가고 있었다. 운세가 동지를 지나 내년이면 小寒(소한)을 앞두고 있었다. (개인의 사생활이니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다만 그 분의 쓸쓸한 표정을 옆에서 지켜보다 보니 문득 “초원의 빛”이란 문구가 스쳐갔다. 월리엄 워즈워드가 남긴 유명한 시 구절,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이런 식으로 번역되어 있는 구절 말이다.

 

Of splendo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

 

6월 초순의 화창한 여름날 풀밭을 거닐다 보면 싱싱하고 윤기 나는 풀과 또 풀꽃들이 햇빛 아래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풀꽃들이 정말이지 세월을 구가하고 있다.

 

상담오신 그 분 또한 예전에 싱그럽게 빛나던 광휘의 시절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에 만나본 그 분의 얼굴에선 자취가 없었다. 상담해주면서 은근히 슬퍼졌다.

 

누구나 한 때 찬연한 빛을 뿜어낸다, 또 누구나 때가 되면 시들어 건조해지고 결국 사라져간다. 그러나 워즈워스는 시에서 그 찬란했던 빛을 다시 돌이킬 수 없다 해도 슬퍼하지 않고 뒤에 남은 것으로부터 힘을 찾아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걸 보면 워즈워스는 어떤 “불멸”에 대한 진지한 믿음을 가졌던 것 같다.

 

하지만 나 호호당에겐 그런 믿음과 신념이 없다, 그래서 생명, 인간을 포함해서 그 어떤 생명들, 불교식 표현으론 有情(유정), 즉 정을 가진 모든 유기체들이 그저 딱하고 가엾다. 

 

얼마 전 늦은 밤 울적해서 지인과 함께 근처의 맥도널드 가게에 갔던 적이 있다. 젊은 남녀 두 사람이 한창 뜨거웠다. 서로의 손을 깍지 끼고 두 눈을 가까이 마주한 채 연신 웃으면서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눈에서 꿀이 쏟아지고 있었다.

 

보기에 정말 좋았다. 부러운 게 아니라 싱그러운 젊음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약동하는 생명, 나 호호당에겐 저런 젊음의 약동과 찬연한 빛이 없지만 그래도 좋았다.

 

내가 아니면 어떠리, 저렇게 생명들은 낳고 약동하다가 때가 되면 시들어 사라져가지만 또 이어서 등장하잖아, 반드시 내가 무대 위의 주연일 필요는 없잖아. 내가 없어진 뒤에도 계속해서 약동하는 생명들이 무대를 장식할 것이니 그럼 된 거지, 뭐!

 

상담이 끝날 무렵 운세가 이제 많이 기울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그렇지만 그런 일에 너무 마음 쓰지 말고 한 세월 살다보면 또 다시 초여름 풀밭의 찬연한 광휘까지는 아니더라도 봄날의 꽃향기를 맡는 날은 있을 거라고 힘주어 얘기해주었다.

 

다시 집 근처로 돌아와 나는 차에서 내렸고 그 분은 떠나갔다.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면서 잠시 祝願(축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