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래된 얘기이자 늘 새로운 이야기 

 

 

상담을 시작한 지 21년, 늘 같은 스토리와 같은 光景(광경)을 보게 된다. 자세하게 나누면 72개의 장면이고 줄이면 24개의 때이며 대범하게 줄이면 그냥 四季節(사계절)을 보내는 사람의 스토리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저마다의 환경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보라색이라 해도 연보라가 있고 진한 보라가 있으며, 남보라, 붉은보라, 여기에 조금 탁한 기가 들어간 그레이 보라가 있을 뿐이다. 색은 그저 삼원색이듯 그 어떤 삶도 사계절의 한 장면일 뿐이다.

 

그간 수많은 사연을 들었지만 실은 늘 같다. 같은 이야기가 끊임없이 되풀이될 뿐이다. 인간의 이야기인 것이고 더 큰 눈에서 보면 순환하는 자연의 이야기이다.

 

무언가 가지고자 애를 쓰는 모습, 그와 반대로 이미 가졌건만 더 가지려 안달하는 모습, 그리고 그러다가 더 많은 것을 잃게 되는 광경, 잃게 되는 것중엔 가장 소중한 것 즉 스스로의 목숨도 있으니 그럴 땐 肅然(숙연)해진다. 다 잃었구나,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터인데 하는 마음.

 

그런가 하면 잘 살고 있건만 스스로는 고생만 하고 있다는 푸념, 모든 것이 다 떠나갔으니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면서 내뱉는 격한 吐露(토로) 혹은 自嘲(자조), 또 그러던 사람이 어느새 푸르게 더 푸르게 살아나는 이야기, 싱싱하게 약동하면서 또 다시 넓은 바다로 나아가는 장면.

 

저마다의 모습과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끊이지 않고 다른 이와의 장면과 오버랩(overlap)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무수히 만난 장면이고 들어본 얘기이기에 지겨울 법도 한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는 점이다. 설령 같은 노래이고 곡조라 해도 가수의 음색, 즉 칼라와 표현방법에 따라 전혀 다르고 새롭게 들리듯이 삶의 이야기도 그렇다.

 

늘 같은 스토리와 장면이건만 한편으론 늘 다른 스토리이고 장면이다.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노랫말이 생각난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간다. 사실이다. 그런데 덕수궁 돌담길과 정동길엔 또 다시 늘 새로운 젊은 연인들이 데이트를 하고 있다. 오래 전 당신과 당신의 연인이 걸었던 그 길을 당신과 당신의 연인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새로운 연인들이 걷고 있을 것이다.

 

옛 연인들과 새로운 연인들 사이에 과연 무슨 차이점이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그 생각이 맞다. 차이가 없다. 그런데 다르다고 생각하면 그 역시 맞는 생각이다.

 

 

스스로 오래 묵은 유령같기도 하니 

 

 

가끔씩은 나 호호당 스스로가 ‘몸을 가진 유령’ 이란 생각마저 든다. 스스로 수백 번의 삶, 아니 數千(수천) 數萬(수만)의 생을 살아온 유령 같기도 하다. 듣고 본 이야기와 광경이 마치 내 스스로 겪은 이야기와 광경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그건 당신만의 스토리가 아니라오, 이 자리에 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얘기이자 이 자리가 아니더라도 참으로 오래된 얘기이고 무수히 있었을 광경이네요, 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자연순환운명학의 정신적 뿌리

 

 

나 호호당이 2014년에 정립한 새로운 운명의 이론 즉 “자연순환운명학”은 그저 우연히 번득이는 아이디어 하나에서 얻은 것이 아니다. 처음엔 잘 몰랐지만 나도 모르게 크게 영향을 받은 훌륭한 학자들의 통찰을 내 나름으로 받아들인 결과이다.

 

하이리히 침머(Heinrich Zimmer) 그리고 미르치아 엘리아데가 그들이다.

 

이론을 정립하고 검증함에 있어 도움을 받은 적지 않은 스승들이 있다. 처음 순환의 존재에 대한 아이디어를 준 이는 천동설의 프톨레마이오스였다. 그리고 중국 노장철학을 해설한 淮南子(회남자)의 구절들을 통해 가설을 더 다듬어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360년의 장기 순환이 존재한다는 힌트는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으로부터 얻었다. 운세의 변화가 결국 계절의 순환을 模寫(모사)한다는 것을 알려준 프리드리히 니체가 있고 “서양의 몰락”이란 책을 통해 인류 문명의 과정에도 자연순환이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해준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글은 이론의 깊이를 더해주었다.

 

하지만 침머와 엘리아데 저 두 분이야말로 나 호호당의 진정한 스승이다. 따라서 “자연순환운명학”은 그분들의 생각, 그 연장선이자 파생물이다.

 

하이린히 침머는 국내에 널리 알려진 학자가 아니다. 그의 원고는 제자인 미국의 비교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을 통해 책으로 엮어졌는데 그중에서 국내에 번역된 책은 “인도의 신화와 예술”이란 책이다.

 

1995년 가을 처음 이 책을 접한 나는 엄청난 감동으로 戰慄(전율)했다. 초고압의 전류가 내 심장을 찌리릿- 하고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나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출간한 “Myths and Symbols in Indian Art and Civilization” 영문판을 사서 읽었다. 번역과 대조해가면서 확인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남긴 천문학책인 “알마게스트” 역시 그 대학 출판부 것을 읽었다. 그런 면에서 나 호호당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은 셈이다.

 

하인리히 침머는 시간 자체가 순환이란 점을 내게 알려주었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오로지 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화살이 아니란 점을 알려주었다. 그는 대표적인 인도학자, 즉 고대 인도의 철학과 종교 언어 미술을 연구했던 학자로서 힌두철학의 시간 개념은 근본적으로 영겁의 순환, 줄이면 순환이란 것을 나 호호당의 영혼 속에 영원히 각인시켜주었다.

 

비교종교학자인 엘리아데 역시 우리의 삶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순환적 삶의 반복이자 再生(재생)에 있다는 것을 내게 너무나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사람들은 내가 사주명리를 한다고 하니 아, 易術(역술)을 하시는 군요, 하고 말하기도 하고 그렇게 여긴다. 그러면 그냥 웃고 넘긴다.

 

 

나 호호당은 역술가가 아니란 사실

 

 

나 호호당은 동양학자도 아니고 역술가도 아니다. 중국의 고전들을 두루 읽었긴 하지만 말이다. 나 호호당의 스승은 독일 출신의 하인리히 침머와 루마니아 출신의 미르치아 엘리아데, 이렇게 두 분이고 자연순환운명학의 바탕은 힌두철학인 까닭이다. 다만 한자로 된 十干十二支(십간십이지)의 조합인 60갑자, 즉 60진법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60진법은 중국 고유의 것도 아니다. 뿐만 아니라 연구 방법론은 철저하게 그리스 철학에서 시작된 귀납과 연역,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서구 과학의 정신이다.

 

하지만 스쳐가는 자리에서 내가 그렇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냥 아, 네 하고 넘길 뿐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님들께선 하인리히 침머가 누군지 모를 것이고 엘리아데도 잘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회남자 속에 무슨 구절이 실렸는지, 오스발트 슈펭글러는 또 무슨 난해한 얘기를 펼쳤는지 잘 모를 것 같다. 다만 니체라 하면 그런대로 접한 경험이 있을 것 같다.

 

(물론 독자님들의 지적 수준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다. 양해해주시길.)

 

 

반가운 봄비에 꽃소식이 찾아들듯이 

 

 

그러니 평소 글을 통해 자연순환운명학이 앞에서 얘기한 저 분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해 얘기하기란 절대 쉬운 노릇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선 저 양반들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부터 알려드려야 할 것이니 말이다.

 

어제 밤부터 비가 내렸다. 반가운 봄비였다. 갑자기 아파트 경내의 산수유들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비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제 곧 개나리가 샛노란 꽃들을 펼쳐낼 것이다.

 

오늘 이 글 또한 그런 심정에서 쓰게 된 것 같다. 사실 전혀 이런 글을 쓸 생각은 없었는데 봄비가 그렇게 시킨 것 같으니 말이다. 단비를 기다려오던 나무들이 꽃망울을 펼치듯이 나 호호당의 속내를 어쩌다가 참지 못하고 이렇게 토로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오늘의 이 글은 67년과 7개월을 살아온 늙은 호호당의 넋두리일 수도 있겠다. 남들이 보지 못한 기막힌 絶景(절경)을 구경한 이는 그 ‘좋음을 공유’할 수 없다는 점에서 외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지만 보았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더없는 행운인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남은 삶의 시간들도 제법 될 것이니 내가 본 그 경치를 천천히 느린 어조로, 다시 말해서 생경하지 않은 말투로 조금씩 얘기해드려도 되지 않겠는가 싶다. 물론 본 것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이 여간 답답한 일이 아니란 거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