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간에 생멸하는 세상

 

 

찰나란 말이 있다. 한자론 刹那이고 고대 인도의 ‘ksana’라고 하는 시간 단위를 한자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발음은 ‘크싸나’가 아니라 ‘싸나’라고 더 가깝다.)

 

찰나는 고대 인도에서 가장 짧은 시간 단위로서 지금의 시간으로 바꾸면 1초의 75분의 1일, 즉 0.013초가 된다.

 

刹那三世(찰나삼세)란 말도 있다. 현재의 찰나를 현세(現世)로 하고 그 앞뒤의 찰나를 각각 과거세(過去世)와 미래세(未來世)로 해서 삼세란 것이다. 다시 얘기하면 0.013초 전이 과거, 지금 0.013초가 흐르는 시간이 현재이며 그 다음 0.013초 뒤가 미래란 것이다.

 

가령 당신의 과거는 어떠했나요? 하고 물으면 0.013초 찰나 전의 과거 말인가요? 하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웃긴다.

 

힌두 철학에 바탕을 둔 불교 철학에선 刹那生滅(찰나생멸)이란 말도 한다. 매 찰나, 즉 0.013초마다 생겨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 역시 늘 그대로 있는 것 같지만 매 찰나마다 사라지고 생겨나고를 반복하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無常(무상)속에서 치열하게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닌 것이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들은 생각보다 빨리 죽고 태어나고를 반복하면서 교체된다. 간세포나 혈액 세포는 150일이면 싹 다 바뀌고 피부의 세포는 2-4주면 다 교체되며 허파를 이루는 세포들은 1년이면 모두 갱신된다고 한다. 심장이나 뇌의 세포들은 갱신되지 않지만 그를 이루는 단백질 단위에선 끊임없이 바뀌고 있다. 우리는 매 순간 바뀌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의 뇌는 부단히 변하는 우리 스스로를 동일한 개체로서 통합시켜 가고 있기에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동일한 존재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실은 모든 것이 늘 사라지고 늘 생겨나기에 일정하고 恒常(항상)된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 그를 불교에선 無常(무상)이라 한다.

 

 

시간은 상대적이어서 

 

 

시간, 즉 때의 간격은 대단히 상대적이다. 그렇기에 힌두 철학에서 말하는 대단히 긴 시간, 거의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永劫(영겁)이라 하지만 그 또한 보다 더 긴 시간에 비하면 찰나일 수도 있다.

 

1劫(겁)의 시간은 43억 2천만년인데 이건 우주의 창조신인 브라흐마에게 있어 하루라고 한다. 브라흐마가 하루를 보내면 43억 2천만 년이 흐르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재미있는 계산을 해볼 수 있다.

 

사람의 하루는 86,400 초이고 브라흐마의 하루 즉 1겁은 43억 2천만 년이다.

 

우리가 하루를 보내면서 느끼는 감각을 브라흐마가 하루인 43억 2천만년을 보내면서 느끼는 감각과 같다고 가정하면 창조신인 브라흐마에게 1초는 우리에게 무려 5만 년과 같다. 5만년을 1초로 느끼는 브라흐마에게 있어 1찰나는 우리에게 666년이 된다. 그러니 그 사이에 생겨나고 사라지고가 무수히 가능해진다.

 

 

우리를 좌절케 하는 힌두 철학

 

 

힌두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좌절케 한다. 본래 의도부터가 그런 것 같다. 우리가 살면서 중요시하는 그 어떤 것도 실은 아무 것도 아니고 찰나의 일도 아닌 그저 허망한 찰나 안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생멸의 일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해준다.

 

우리에겐 나름 길고 긴 인생, 그래서 인생길이라 우리들이 부르는 삶 전체가 창조신인 브라흐마에겐 1 찰나의 시간도 되지 않는다니 말이다. 기껏 100년도 살지 못하는 네가 잘 살든 못 살든 내겐 아무런 의미도 없단다, 라고 브라흐마가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고대 인디아의 사상과 철학, 즉 힌두 철학이 이처럼 엄청난 규모의 숫자와 시간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제로 즉 零(영)을 일찍부터 사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힌두 철학에 있어 劫(겁)이란 시간 단위 역시 가장 큰 수가 아니었다.

 

1겁이 43억2천만년인데 그래봐야 4.32 곱하기 10의 9 제곱에 불과하다. 힌두 철학의 가장 큰 수인 無量大數(무량대수)는 10 뒤에 제로를 무려 68개나 붙이는 수, 10의 68제곱수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1920년에 와서야 미국의 한 수학자, 정확히 말하면 그 수학자의 9살 난 조카에 의해 10의 백 제곱이 되는 수인 구골(googol)이 만들어졌다. 참고로 미국의 인터넷 검색엔진 업체 구글(Google)은 처음에 구골(Googol)로 등록하려던 것이 실수로 잘못 표기한 탓에 그렇게 되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 찰나의 연속이지만 어떤 존재에겐 영겁과도 같은 시간일 수 있으리라. 우주의 창조신인 브라흐마에게 하루가 우리에겐 43억 2천만년인 것처럼 말이다.

 

 

시간, 절대적이면서 상대적인 것

 

 

강아지들과 살다보니 때론 관찰하게 된다. 우리 막내 강아지 ‘바리’는 밤이 되면 형이 귀가하기를 기다리며 현관 앞을 마냥 지키고 있다. 저 놈에게 기다리는 그 시간이 꽤나 길게 느껴질 터인데 어쩜 저렇게 하염없이 꼼짝도 않고 기다리고 있을까나? 참 신기하기도 하다는 생각을 한다. 개는 수명이 사람보다 훨씬 짧기에 1시간의 느낌이 우리 인간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질 법도 한데 말이다. 개는 인내심이 강하다. 그만큼 멍청하기도 하다.

 

어린 초등학교 시절 매일 아침마다의 조회 시간, 교장 선생님의 말씀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가을 학기 개학하는 날, 학교로 향하면서 겨울 방학은 영겁 저편에 있는 것 같은 암울함 또는 절망감을 느낀 기억도 선명하다. 주말의 토요일과 일요일은 너무나도 짧고 주중의 날들은 왜 그리도 길기만 하던지.

 

시간이란 그렇기에 실로 묘한 놈이다.

 

간절하게 소식을 기다리는 자에게 一刻(일각), 15분의 시간이 三秋(삼추), 3년이란 말도 맞는 말이고 보고픈 연인을 저녁에 만나 사랑을 나누며 새벽을 맞이한 커플에게 그 하룻밤의 시간은 一刻(일각)일 것이다.

 

살다가 힘든 고비를 만나 힘들 땐 1년이 천년 같아서 이 세월 어서 가라 하는 말과 생각을 무수히 되뇐다. 사실이다. 반대로 영화의 세월은 10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래서 시간은 절대적이면서 상대적이다. 시간의 길이와 간격은 대단히 정확하게 측정될 수 있는 물리학의 단위이지만 우리의 시간에 대한 감각은 지극히 상대적이기에 그렇다.

 

 

나 호호당은 시간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나 호호당은 운명을 연구해온 사람이고 따라서 시간을 연구해온 사람이기도 하다. 그 사람이 처한 자연순환의 週期(주기)에 따라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내가 중요하게 살피고 내다보는 주기는 60년 간격이다. 왜냐면 우리의 삶이 대략 85년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론 며칠이 중요할 때도 있기에 60일 간격의 주기를 살피기도 하고 때론 60개월의 주기에 따라 일을 살피기도 한다. 나라의 경우 60년보다 때론 360년의 주기가 더 중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週期(주기)라든가 시간의 길이는 그다지 중요하지가 않다. 시간은 절대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현재 극심한 고생을 겪고 있는 이에게 장차 15년만 지나면 많이 편안해 지리라고 답변해줄 때도 있다. 이에 상대방은 15년이라고요? 그땐 다 살았을 터인데 그 때가서 편안해지면 뭘 해요! 하고 어이가 없다는 식으로 되묻는 이도 있다.

 

그런 상대를 보면서 난 속으로 그래봐야 한 계절 지나가는 것에 불과한데요, 하는 생각을 한다. 60년 순환을 사계절로 하면 15년은 한 계절이 된다. 또 그 15년은 666년을 1 찰나로 느끼는 절대자 브라흐마에게 있어 시간이라 할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여름날 저녁 하루살이를 바라보면서 때로 측은함을 느끼기도 한다. 정말 이슬과도 같은 삶이니. 그런데 우리의 삶, 길어야 100년의 삶은 브라흐마에게 있어 하루는커녕 1찰나의 1/6도 채 되지 않는다, 우리를 보면서 브라흐마가 측은함을 느끼기라도 할까?

 

눈앞의 시간이 너무나 힘들어서 암울할 때도 있다.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힘든 시간의 暴壓(폭압)으로부터 견디게 해주고 또 맞설 수 있게 하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

 

 

망각, 시간에 맞설 수 있게 하는 강력한 무기

 

 

그 무기는 바로 忘却(망각)이다.

 

망각이란 개인의 장기 기억에 저축한 지식이나 정보를 상실하는 것이다. 오래 전의 일일수록 기억을 더 급속도로 많이 상실한다고 한다. 망각은 사실 우리를 편안하게 해준다. 삶에서의 마찰과 실패, 갈등과 같은 스트레스들을 지워주기 때문이다. “세월이 약”이란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실연한 후 오래 되면 그 상처도 잊히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런 까닭에 제 아무리 힘든 시간도 삶도 살다보면 살아진다.

 

올 해로서 만 65세가 된 나 호호당이 살아온 모든 생을 뒤돌아볼 것 같으면 순간에 지나쳐간다. 65년의 세월이 순간처럼 느껴진다. 물리적인 시간은 분명 65년이었을 것이고 그 사이에 힘든 시간과 괴로운 세월들도 많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 모두가 한 순간의 일처럼 느껴진다. 이 역시 우리 뇌가 가진 능력인 忘却(망각)의 효과 때문이다.

 

장수한 사람이 임종을 앞두고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돌이켜보니 잘 살아온 것 같다는 말. 하지만 그 역시 망각의 덕분이다. 긴 인생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스트레스와 좌절 또한 적지 않았을 터인데 그게 다 잊히고 망각되었기에 그런 회고를 한다고 본다.

 

이처럼 우리에겐 시간을 견디게 해주는 망각이란 무기가 있다. 생각해보면 , 참으로 고맙고 또 근사한 우리 뇌의 능력이 아니겠는가! 절대적인 시간을 시간의 경과와 함께 나중에 가서는 상대적으로 짧게 만들고 나아가서 결국 無(무)로 되돌려놓는 우리 뇌의 功能(공능)인 것이다.

 

 

찰나와 영겁 사이를 오가는 우리 

 

 

우리 모두 찰나와 영겁을 오가면서 살아가고 또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