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 가까운 늦은 아침 나절, 느즈막이 일어나 잠자리에서 기지캐를 켜는데 비껴드는 햇살이 좋았다. 무릅으로 엉금 기어서 안쪽 문을 였었더니 말끔히 세수를 한 가을요정이 창밖에서 환하게 희죽대고 있었다. 투명한 빛과 맑은 공기, 그래 늦가을엔 이 시각이 딱 좋아, 가을해는 짧으니까. 다시 요에 누운 채로 가을과 잠깐 희희닥거렸다. 음! 좋은 시간이야, 하다가 문득 마르셀 푸르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번째 책속에 나오는 장면이 생각났다. 이제 곧 예쁜 가을요정과 작별하리란 생각이 났나 보다. 그러자 찍어야지 하면서 폰카메라로 두어 장 찰칵했다. 시간은 지나가도 시간의 자취만큼은 붙들어보자는 생각에.
밤이 되어 어둠 속 가로등 불빛 아래 안개서린 늦가을 공기가 조금 침중하다. 가을이 어깨에 짐을 이고 떠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네, 이제 떠나는거야? 그런 거야? 하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폰카메라를 눌렀다. 집에 돌아와 헤르만 헤세의 시집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저 장면을 잘 설명하는 헤세의 구절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저 생각나는 것은 한 구절, "마지막 한 걸음은 혼자서 걸어야 한다"는 구절이다. 죽음으로의 길은 혼자 걸어가야 한다는 얘기 같은데 걱정이다. 죽는 것은 전혀 무섭지 않다, 죽고 나면 빛이 만들어내는 저런 광경들을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하지만 기대해본다, 죽고 나서 더 휘황한 빛의 세계를 만날 수도 있을 거란 기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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