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달력아, 미안해!

 

한 장 남은 헌 달력을 훅-하고 내린 다음 새 달력을 정성스럽게 매달았다. 새 달력을 잠시 구경하다가 발밑에 놓인 헌 달력이 눈에 들었다. 앗, 미안!

 

열 두 장짜리 새 달력은 무게감도 있고 윤이 나건만 한 장만 초라하게 남은 헌 달력은 저렇게 휙 던져졌구나, 나란 사람이 이렇게 한심하구나 싶어서 미안해한다. 그런데 이 미안한 감정의 대상이 달력인지 2021년인지 아니면 흘려보낸 내 삶의 시간들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미안하다.

 

 

우리는 사실 늘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 아닐 未(미)에 편안할 安(안), 편하지가 않다는 말이다. 뜻을 새기다 보니 “나의 아저씨”란 드라마 속의 지안이란 이름이 생각난다. 이를 至(지) 편안할 安(안), 마지막 장면에서 “편안함에 이르렀는가?” 하는 대사가 인상적이었다.

 

“나의 아저씨”란 드라마, 대단한 환타지이다. 현실에서 있을 법도 하면서 실은 참 있기 어려운 얘기, 그저 작가의 역량에 탄복할 뿐이다. (평소 드라마를 잘 보지 않았는데 가을 들어 몸이 좀 아프면서 넷플릭스로 보았다.)

 

삶은 결코 편안하지 않다. 편안할 만하면 탈이 난다. 우리 몸의 세포들은 끊임없이 죽고 또 재생산되니 그 과정에서 당연히 고통이 따른다. 어디 몸만 그런가, 내가 편안한 가 싶으면 주변의 가까운 이가 아프거나 힘들고 또 먹고 살기 위해 얼굴도 모르는 그 누군가와 부단히 싸워야 하니 편안할 까닭이 있겠는가.

 

삶이란 그저 조였다 풀렸다, 그 연속이다. 누가 조이는지 또 풀어주는지 그건 모르겠기에 사람들은 한 때 그리고 여전히 그게 運(운)에 달렸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운이 좋아도 그렇고 운이 내리막이라도 그렇다. 삶은 편안하지 않다.

 

행복? 그거 참 사람 힘들게 하는 단어이다. 행복이란 것은 삶의 거친 압력 앞에서 우리로 하여금 버티고 견디도록 해주는 가상의 명분과도 같은 것, 정직하게 얘기하면 눈앞의 힘든 현실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우리 스스로 만들어내는 환상일 뿐이다.

 

행복은 그렇기에 언제나 미래에만 존재한다. 따라서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다. 그래서 행복할 사람이나 행복해야 할 사람만 있지 행복한 사람은 없다.

 

앞서의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 우리 행복하자! 하고 미래를 다짐할 뿐 행복한 현재는 없다. 편안함 역시 마찬가지, 잠시 편안할 순 있어도 줄곧 편안한 사람은 없다.

 

그러니 잘 산다, 잘 살아야지, 잘 사세요, 이런 말 또한 그렇다. 잘 산다는 말은 우리 눈에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남의 이야기이고 잘 살아야지 하는 말은 다짐일 뿐이며 잘 사세요 하는 말은 주변이나 타인에 대한 격려의 말이다.

 

이에 우리들은 이른바 ‘셀럽’을 만들어낸다. 잘 살고 행복하며 열심히 잘 해가는 偶像(우상)을 가져봄으로써 위안을 얻는다. 셀럽은 어쩌면 神(신)이나 초월의 세계를 믿지 않는 현대인들의 새로운 신이자 歸依處(귀의처)이다. 셀럽을 흠모하고 그 일부가 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되면 그로써 ‘우리’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되면 당연히 강해진다, 개인은 죽어도 우리는 죽지 않고 이어지니 말이다.

 

예를 들면 방탄소년단은 너와 함께 할 거야, with you 를 끊임없이 가사에 집어넣는다. 네가 힘들 때 내가 너의 곁에 있을 거란 메시지를 통해 전 세계 청소년들을 흡수해버리고 있다. 모든 ‘루저(loser)’들의 안식처이자 귀의처인 방탄소년단이다.

 

 

우리 모두 루저의 대기 리스트에 올라 있다. 

 

 

하지만 실은 모두가 루저인 세상이다. 돈이 많아도 권력이 있어도 언제든지 루저로 전락할 수 있고 또 그 이전엔 루저였기 때문이다. 부귀영화를 누릴지언정 언제 힘든 病苦(병고)로 고생하게 될지 모르고, 때론 불치의 병으로 죽을 수 있는 현실 아닌가. 모든 이가 루저의 대기 리스트에 올라있다.

 

나 호호당은 성취한 사람이라 자부한다. 과거 여러 천년에 걸쳐 사람들이 궁금해오던 운과 명의 비밀을 풀어내었기에 스스로 성취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저가 아닌 것도 아니고 사실 루저였으며 멀지 않아 세상을 떠날 것이니 루저가 될 것이 확실하다. 성취와 루저는 관련이 없다.

 

나아가서 성취는 행복과도 관련이 없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恒常(항상)된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잠시 편하고 즐겁다가 다시 힘들고 괴롭고, 이 과정이 반복될 뿐이다. 죽는 날까지 풀림과 조임의 무한 반복. 이에 나 호호당은 그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알고 보면 지나 내나, 그렇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 돌이켜보니 

 

 

이쯤에서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자.

 

2019년은 가히 ‘조국’의 해였다. 그러나 그 누가 알았으랴! 바로 이어서 코로나19란 놈이 세상을 덮쳐올 줄이야. 2020년과 2021년이 이런 해가 되리란 걸 어떻게 알 수 있었을 것이며 알았다 한들 달리 어떻게 했겠는가. 바이러스는 우리 속에 항상 존재하는 變數(변수), 따라서 언제든 이런 날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바이러스 때문에 미국과 유럽인들은 중국을 엄청 미워한다, 안 그래도 미운 털이 많이 박히던 차에 그야말로 잘 되었다 싶어서 많이 미워한다.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 공동체의 대상이나 표적이 되면 그야말로 힘이 된다. 미움과 증오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하나의 힘인 까닭이다.

 

우리 역시 중국을 많이 미워한다, 다만 수출입이 많다 보니 공개적으로 그런 감정을 표출하지 못할 뿐이다. 정부는 한사코 코로나19라고 하지만 우한 바이러스란 말은 좀처럼 잊히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19, 언젠간 사라지거나 또는 약해지겠지만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앞으로 여행업 같은 것을 해보겠다고 나서는 이가 있을까? 여차하면 밥 굶게 생긴 업종이니 말이다. 항공사야 그런대로 물류가 있으니 그것으로 생존한다 해도 여행업은 당분간 오랫동안 신규 등록이 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

 

여기에 현 정부의 부동산 공급 제약 정책과 코로나19로 인한 돈의 거침없는 무한 공급이 엇박자를 내면서 생겨난 부동산 폭등 사태는 특히 수도권에 사는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다. 죽으나 사나 서울과 수도권으로 몰려든 젊은이들은 영혼까지 끌어다가 아파트를 마련했으니 이제 그들의 영혼은 아파트와 일체가 되어버렸다.

 

서울에 사는 것이 젊은 층과 증년의 목표인 오늘이다. 예전엔 서울과 거리가 좀 되어도 새로 지어진 깨끗한 아파트에 사는 것이 유행이었으나 3시간이나 되는 출퇴근에 지친 나머지 이젠 오로지 서울로 몰려든다. 이른바 엘리트 젊은이들은 판교에 근무하면서 근처 대장동에 사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화천대유 천화동인, 정곡을 찔렀다. 서울이나 수도권에 거주하지 않으면 장가도 가지 못 한다.

 

시달리다 보니 이제 새 해가 어떤 해가 될 것인지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저 2022 壬寅(임인)년은 우리 국운의 에너지가 최저에 도달하는 때, 한 해로 치면 양력 1월 20일 경의 大寒(대한)에 해당된다는 점만 알려드린다.

 

 

늘 편안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 편하지 않다, 즉 未安(미안)하다. 미안하기에 未生(미생)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줄곧 미안하지도 않고 미생인 것도 아니다. 때론 좋은 날도 있고 편안한 날도 있으며 심지어는 잠시이지만 산다는 게 행복하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돌이켜보면 나 호호당은 올 해 그다지 편안한 해가 아니었다. 3년 전 생긴 좌골신경통이 여전히 조금씩 느껴지고 초여름엔 위장병을 얻어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다. 게다가 11월 초엔 이석증이 와서 온 세상이 뱅뱅 돌기도 했으며 균형 감각이 미처 원활하지가 않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단 말이 역시 뻥이었음을 확인했다. 자연순환운명학 강좌 역시 코로나로 인해 영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나쁜 해였다고 말하긴 또 그렇다. 작년 5월에 처음 수채화 전시를 연 이래 18 개월 만에 다시 전시회를 했으니 이제 화가로서의 길에 들어선 셈이다. 올 겨울 새롭게 그림을 변모시켜볼 생각이다.

 

그러니 올 한 해 나 호호당은 奮鬪(분투)한 셈이다. 나의 아저씨에서 이지은의 대사처럼 ‘파이팅’하고 있다. F 발음이 아니라 P 발음이라 참으로 촌스러웠고 그 바람에 실감이 확-났다.

 

얼굴을 모르는 독자님들은 어떠신지 물론 알지 못한다, 하지만 다 나름으로 분투하면서 파이팅을 하셨을 것으로 여긴다.

 

오늘 글은 연말이 되어 묵은 해를 보내면서 독자들에게 보내는 인사이자 감사의 말씀이다.

 

한 해를 그런대로 보내셨다면 스스로에게 감사하자, 올 해도 잘 살았다고, 잘 살아서 그런 게 아니라 잘 살려고 애를 썼기에 간신히 잘 살았다고 스스로에게 고마워하자. 손을 들어 눈 아래 가슴을 가볍게 쓸어내리면서 고마워하자. 너, 수고했어! 하고 한 마디 위로를 건네자.

 

그리고 알진 못해도 이 세상엔 나를 도와주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람 아닌 것들이 있다는 것을 잠시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들에게 고마워하자. (미울 땐 미워하더라도 그런 거 오래 하면 몸만 축난다.)

 

 

미지의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인사 드립니다. 

 

 

새 해엔 새 희망을 품어봄 직도 하겠으나 연말엔 일단 스스로에게 또 세상 많은 사람들과 모르는 존재들에 대해 고마워하자. 이에 나 호호당 역시 얼굴을 모르는 많은 독자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고맙습니다, 고마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