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내 마음 속에 있는 거대한 물고기
북쪽 깊고 깊은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이름을 鯤(곤)이라 한다. 곤의 크기? 무지막지하게 커서 몇 천리나 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것이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새의 이름은 鵬(붕)이라 하고 그 등판의 넓이 또한 몇 천리나 되는지 알 길이 없다. 그냥 무진장 크다!
붕이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마치 온 하늘을 다 덮는 구름처럼 넓고 크다. 날개 그림자에 가려서 푸른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
이 새는 너무 크고 무거워서 그냥 뜰 수는 없고 바다 위에 태풍이 불어야만 그 세찬 바람을 타고 날아오를 수 있는데 어쨌거나 한 번 날아오르면 멀고 먼 저 남쪽 바다로 간다. 남쪽 바다란 天池(천지), 즉 하늘 아래 가장 큰 연못이다.
신기한 일들을 모아서 엮은 어떤 기록물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붕이 남쪽 바다로 옮겨가기 위해 날아오를 적에는 날개로 물을 치는데 그 물이 무려 삼천리 바깥까지 튄다, 또 빙빙 돌며 회오리바람을 타고 오르면 구만 리 상공으로 올라가서 무려 6개월을 날아가고서야 내려와 쉰다.”
莊子(장자)에 나오는 가장 앞의 글 “北冥有魚(북명유어), 其名爲鯤(기명위곤)”으로 시작되는 단락을 풀어서 옮겼다.
나 호호당의 마음속에는 저 물고기, 변해서 커다란 鵬(붕)새가 되는 저 물고기가 늘 있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무술도장을 하시는 華僑(화교) 사부님으로부터 배운 뒤 평생을 가슴에 담고 있다.
상상은 자유롭고 제약이 없다. 동짓날 동해 홍련암, 돌난간에 기대어 거세게 일렁이며 흰 포말을 연신 날리는 바다 앞에 서면 그 물고기가 내 눈에 보였다. 이름을 鯤(곤)이라 했고 새가 되어 날아오르면 鵬(붕)이라고 하는 놈. 거친 바다 위로 끼룩끼룩대며 저공 비행을 하는 갈매기를 붕새로 둔갑시켜놓곤 했다, 내 상상의 눈으로.
선불교, 莊子(장자)와 불교의 결합
莊子(장자)는 삶이란 게 영원한 것도 아니고 게다가 胡蝶夢(호접몽)의 우화처럼 꿈속의 일인지도 모르니 작은 일에 구애받거나 연연하지 말고 대범하고 통 크게 그리고 삶 전체를 하나의 놀이마당으로 즐기다 가면 어떻겠느냐, 하고 권하고 있다.
이런 장자의 생각은 훗날 중국에 들어온 佛敎(불교)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으니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바로 중국의 禪宗(선종)이다. 달마대사로부터 시작해서 육조혜능에 와서 본격화된 선불교는 호방하고 기지에 넘치는 마조도일에 의해 祖師禪(조사선)으로 확립되었고 그 이후 임제선사의 과격하리만큼 호쾌한 가르침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임제선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도 죽여라, 하면서 기존의 모든 가르침을 다 없는 것으로 돌려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했으니 殺佛殺祖 (살불살조)가 그것이다. 나아가서 깨달음이란 다른 곳에서 찾을 게 아니라 隨處作主(수처작주) 立處皆眞(입처개진), 즉 네가 처한 곳에서 스스로 주인이 될 것이고 네가 선 곳이 모두 참되다고 가르쳤다.
이처럼 마조도일과 임제 선사를 통해 전해진 임제종은 통일신라 말에 禪宗九山(선종구산), 즉 구산선문으로 이어져서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한 번 더 정리하면 이렇다.
영원한 삶은 없고 삶 자체가 꿈같기도 하며 또 사느라 고생도 많다, 그러니 차라리 호방하고 대범하게 살다 가는 게 더 좋지 않겠니? 하는 莊子(장자)의 생각은 인도에서 들어온 불교의 가르침, 나라고 하는 존재가 무수히 많은 인연으로 해서 만들어진 임시 가설의 존재 즉 假名(가명)이란 생각과 연결되는 바가 있기에 禪(선)의 철학이 만들어졌다.
살아보니 한바탕 꿈속의 일만 같아서
나 호호당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산다는 게 꿈속의 일과 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前生(전생)이 있었는지 後生(후생)이 있을 것인지, 영계의 세상이 있는지, 하느님 나라가 있는지 그건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풀섶에 내려앉았다가 그대로 고꾸라져서 삶을 마치는 늦가을 나비의 삶이나 몇 십 년을 사는 사람의 삶이나 거대한 시간의 스케일에서 보면 그 또한 그다지 차이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 그저 마음 편히 살기로 했다. 이런저런 일이야 끊임없이 생기고 성가시게 하겠으나 그건 그것대로 처리해가면서 최대한 마음 편히 먹고 살아갈 생각이다. 죽을 때가 가깝다 싶으면 모든 것을 다 내려놓자, 그러면 편히 삶을 마칠 수 있으리란 기대도 한다.
살았던 흔적이나 자취야 얼마 동안 남아있겠으나 그 또한 긴 시간 속에서 磨滅(마멸)될 것이니 그 역시 신경 쓸 일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있다, 태어나서 살아본 게 손해나는 장사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괴로움도 많았으나 즐거운 일 또한 많았다. 뭘 좀 잘 해보려고 애쓴 시간들 그러다가 맛본 좌절들 역시 돌이켜보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모든 세월이 새록새록 그리울 때도 많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으니 세상에 한 번 태어난 존재는 예외 없이 운명의 수레바퀴를 타고 浮沈(부침)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선 나 호호당 스스로 수 십 년의 연구를 통해 철저하게, 조금의 의문도 없이 깨달았고 입증했다.
나 호호당은 一生(일생)을 72년으로 계산한다, 그 이후의 삶은 문자 그대로 餘生(여생)이라 본다. 이에 곧 68세가 되는 나 호호당이기에 얼마 전 글에도 썼지만 큰 국면에서 서서히 마무리해가고 있다.
해는 이미 서산을 넘었으니
나이가 드니 나름 좋은 것도 있다. 젊은 날엔 禪師(선사)의 가르침이나 동서양 철학자와 현자들의 글과 말에 눈을 부릅뜨거나 귀를 쫑긋했는데 이젠 더 이상 깨달음 등등을 얻을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다 잘 살아보자고 공부도 하고 수련도 하고 사업도 차리는 법인데 이젠 그럴 이유가 없으니 마음이 편하다.
해는 이미 西山(서산)을 넘었고 놀빛만 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하지만 북쪽 바다 깊은 물속의 거대한 물고기는 여전히 내 속에 있다. 저 놈의 물고기는 늙지도 않는 것 같다, 원체 수명이 길어서 그런가 보다.
얼마 전 어떤 드라마에서 고래가 주인공 앞으로 둥실-하고 허공에 나타나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보면서 웃었다, 고래가 아니라 꼭 그 물고기를 보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죽는 날까지 저 물고기와 놀면서 지낼 생각이다. 이름을 鯤(곤)이라 한다는데, 그 놈이 내 속에서 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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