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스님과의 문답
어제는 맑은 하늘에 봄빛이 참으로 고왔다. 벚꽃도 보름이나 앞당겨 피어나건만 오늘은 바람이 시샘을 한다. 가뭄이 이어지니 비를 기다려본다.
어제 오후 아내가 다녀오곤 하는 절을 찾아갔다. 종로구 성북동에 있는 허름한 암자인데 나 역시 그곳 스님을 좋아하는 까닭에 간만에 찾아갔다. 세 번째 방문이었다. 일요일 오후라 가는 길은 좀 막혔으나 절은 한적했다. 미리 연락을 드렸던 터라 스님이 시간에 맞춰 차를 우려내고 있었다.
두 가지 질문을 가지고 갔다.
스님과 마주 앉자 먼저 돈 봉투를 건넸다. 스님은 이거 뭐! 하면서 시늉을 했고 나 또한 “돈에 이유가 있습니까?”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스님, 아무리 여러 불경의 여기저기를 읽고 되새김을 해도 저는 답을 찾지 못합니다” 했고 스님은 즉각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게 그렇습니다” 하고 답을 했다.
그래서 다음 질문을 했다. 스님은 그냥 스님으로 계실 것입니까 아니면 勝負(승부)를 보실 생각이십니까? 하고.
곧 土窟(토굴)로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답을 찾으면 나오고 아니면 그 안에서 그냥 죽을 생각입니다, 한 살이라도 기력이 있을 때 해볼 생각입니다. 스님의 망설임 없는 답변이었다.
재작년 처음 뵙을 때 이 스님은 아주머니 신도들 앞에 앉혀놓고 불경의 구절들이나 늘어놓고 있을 분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종단이란 것 또한 조직이고 조직에서 잘 풀리려면 뒷배도 있어야 하는 법인데 스님은 그런 일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禪師(선사)들의 길을 따라서 가시겠다는 기색이 비쳤다.
그러다가 이제 드디어 결심을 한 것이다. 가진 것이라곤 고작 “나는 무엇인가?” 하는 話頭(화두) 하나, 그것만 가슴에 품고 토굴에 들어가서 끝을 보겠다고 하시니 어찌 응원하지 않을 수 있으랴, 진검승부!
가슴이 뜨거워졌다. 처음 뵈올 때부터 그랬는데 역시 승부를 보시고자 하는구나. 어쩐지 며칠 전 문득 스님을 한 번 찾아뵙고픈 마음이 들었는데 그게 까닭이 있었구나 싶었다.
이에 나는 찻잔을 비우고 “그럼 이만” 하고 인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고 스님은 “혹시라도 消息(소식)의 절반이라도 얻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하고 기약을 하셨다.
부디 한 소식 얻으시길...
절이라고 하기엔 참으로 허름하고 민망하다. 원래 성북동의 스러져가는 가옥이었는데 어느 신도가 희사하는 바람에 절이 되었다. 법당엔 원래 회칠을 한 약사보살님만 계셨는데 그간 스님 혼자서 열심히 포교해서 생긴 돈으로 삼존불 형식으로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돈을 얼마 들이지 못한 탓에 부처님도 초라하고 법당도 초라하다. 그저 스님의 정성만 갸륵하다.
절의 문을 나와 시멘트 계단을 내려오면서 잠시 생각을 했다. 절반의 소식이라도 얻으면 연락하겠다는 저 말씀이 10년 뒤일까 아니면 영영 듣지 못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이르자 절로 아! 하고 감탄이 튀어나왔다. 다시 한 번 스님 계신 곳을 향해 뒤돌아서서 가볍게 목례를 하고 성원을 보냈다. 스님, 파이팅!
스님은 나 호호당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시지만 나는 스님의 팔자를 알고 있다. 처음 봤을 때 지나치는 어조로 천연덕스럽게 스님의 생년월일시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스님은 거사님도 사주 좀 보십니까? 하고 물었고 나는 아닙니다, 하고 답했다.
그래서 분명 '한 소식' 할 것이라 믿고 있다. 다만 그게 언제냐의 문제일 뿐.
佛家(불가)에선 깨침을 얻으면 “한 소식 했다”는 표현을 쓴다는 점 참고로 알려드린다.
도둑이나 사기꾼은 ‘한 탕’을 노리는 법이고 사업하는 이라면 한 건 터뜨려보자고 나선다. 그러니 절밥을 먹은 禪僧(선승)이라면 당연히 ‘한 소식’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죽기 아니면 살기, 나를 매혹시키는 사람
죽기 살기. 나 호호당은 이런 마음가짐을 참으로 좋아해서 간혹 그런 사람을 만나면 실로 매료된다.
백 척의 깃대 꼭대기까지 올랐다면 당연히 허공으로 크게 한 발을 내딛어야 한다. 그럴 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오르질 말아야 하고.
그렇다고 해서 승부를 보지 않는 삶을 시시하게 본다는 말은 아니다. 시시한 삶 역시 나름의 묘미가 있는 법이니 그렇다. 다시 말해서 모든 길은 다 공평하다.
미국의 계관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가보지 않은 길”이란 시를 통해 노란 가을 숲에서 두 길을 만났는데 자신은 발자취가 더 적어보이는 길을 택했다, 하지만 나머지 길 역시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였다고 노래하고 있다. 그처럼 길은 동등하다, 공평하다. 어느 길을 가든 그렇다.
하지만 누구나 생겨먹은 게 있어서 발자취가 적은 길을 택하기도 할 것이고 또 조금은 더 익숙해 보이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는 얘기이다. 그저 어떤 길을 택하느냐는 타고난 운명의 문제이기도 하고 취향의 문제 또는 天性(천성)의 문제이기도 할 뿐이다.
다만 가보지 않은 길을 택한 자를 만나면 그게 조금은 더 멋있어 보인다는 점이다. 나 호호당은 행복한 삶보다는 멋진 삶이 더 좋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절로된 自然(자연)이지만 그게 또 힘든 일이라서
해에 따라 비가 부족하기도 하고 기온이 달라서 들쑥날쑥이지만, 올 해에도 어김없이 개나리 목련 피어나고 이어서 벚꽃 몽글몽글 피어나고 있다. 무심히 보면 저 모두 절로 되는 일이기도 하고 들여다보면 모두 피 터지게 애쓰고 있다.
그렇다, 수유꽃도 피어났다. 아파트 단지 경내엔 수유 나무가 제법 된다. 연한 황록의 꽃이 피고 있다. 한자로는 茱萸(수유)이다. 하지만 나는 여리고 쪼그만 수유꽃을 볼 때면 ‘잠깐’을 뜻하는 須臾(수유)란 말이 생각난다. 그래 수유꽃은 잠깐 피었다 지지, 한다.
꽃이란 게 사실 번식을 위한 식물의 기관일 뿐이다. 그렇지만 워낙 인상이 강하고 때론 우리를 魅惑(매혹)시키는 까닭에 그 자체로서 하나의 생명이고 개체처럼 느껴진다. 꽃이 지면 괜히 슬프듯이 말이다.
장미는 원래 찔레와 같이 가시나무여서 침입을 막는 울타리 역할을 하던 나무였는데 사람들은 그 꽃이 예뻐서 관상용으로 기르기 시작했다. 그러니 꽃은 영문을 모를 것이다, 사람들이 왜 우리를 정성을 들여 재배하고 가꿀까? 암튼 좋은 일이야, 할 것 같다.
호호당의 출구전략
나 호호당도 시들어가고 있다. 젊은 시절엔 건강은 그냥 기본이고 영원히 주어진 것으로 여기고 그저 즐거운 일에 몰두했다. 그런데 이제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서 갈등이다. 즐거운 일도 좋지만 즐거운 일을 받쳐줄 몸뚱이가 시원치 않으니 그렇다.
그런 탓에 올 해 들어선 장차의 일을 조금씩 수정해가고 있다. 죽기 전에 자연순환운명학에 관한 개론서와 각론을 어서 마무리해야 하겠다는 생각, 체력이 필요한 강의도 조금씩 빈도를 줄이고 증시강좌는 가급적 하지 않을 생각이다. 상담도 서서히 제자에게 넘겨줄 생각을 한다. (나 호호당이 진짜 제자 또는 전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직 한 명밖에 없다.) 일종의 마무리 작업에 착수했다.
사실 가진 것이라곤 눈앞의 이 현실밖에 없다. 과거는 추억 속의 관념이고 미래 또한 그렇다. 그저 눈앞의 현실이 전부이다. 그러다가 언제 때가 되면 눈앞의 현실을 내려놓게 될 것이다.
물론 세상에 태어난 자나 만들어진 자는 자연순환의 이치에 따라 변천해간다. 하지만 결국 가진 것은 눈앞의 이 찰나와 다음 찰나로 이어지는 현실이 전부이다. 그렇기에 존재에 관한 생각 그리고 存在論(존재론)적 생각은 어차피 幻影(환영)일 수도 있겠다.
찰나와 찰나를 이어가면서 잘 살아봐야지, 스님을 뵙고 온 호호당의 이 순간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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