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순환운명학은 IT 덕분에 생겨났으니
세상에 태어나고 만들어진 모든 것들, 태어나고 만들어진 이상 죽고 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은 일정한 규율에 의해 興亡(흥망)과 盛衰(성쇠)를 거듭하는데 그걸 運(운)이라 한다.
나 호호당은 운에 따른 흥망성쇠의 이치와 규율의 큰 줄기 즉 大綱(대강)을 명백하게 알아내었으니 有史(유사) 이래 처음이지 아닐까 싶다. 그도 그럴 것이 특별한 신통력을 가지지 않은 이상 오늘날과 같은 웹(web)이 없던 과거엔 데이터의 충분한 標本(표본)이나 母集團(모집단)를 입수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자연순환의 규율을 검증해낼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 호호당이 밝혀내고 창시한 “자연순환운명학”은 인류의 거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공유하는 정보의 그물망 즉 웹이 만들어졌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결국 정보기술(IT)의 덕분인 셈이다.
이제 머뭇거릴 때가 아니기에
며칠 전 블로그에 상담을 쉰다는 공고를 올렸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그를 연구하느라 즐기는 성격인 나 호호당은 그간 연구 과정에서의 재미를 충분히 맛보고 즐겼긴 하지만 최근 2년 사이 여기저기 몸이 불편해지자 덜컥 겁이 났다. 이거 아차-하면 그간 말로만 떠들었고 블로그에 짧은 글만 썼을 뿐 전체의 원리와 이론을 모두 엮은 책을 아직 미처 만들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3-4년 전만 해도 건강에 자신이 있었던 터라 천천히 쓰면 되겠다 싶었는데 갑자기 어느 날 ‘야, 자슥아, 너도 천년만년 사는 거 아니야!’ 하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그러고 보니 태어난 지 어언 68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앗, 사실 다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든 불현 가도 전혀 이상할 게 없구나 싶었고 그래서 이러면 안 된다, 사람이 가기 전에 壽衣(수의)를 마련해놓듯이 나 호호당도 책을 하나 남겨놓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물론 아직 특별한 병에 걸린 것은 전혀 아니고 그런대로 건강하다. 나 호호당의 경우 이른바 성인병 증세가 없다. 혈압 당뇨 심혈관 증세 등등 내과의사들이 밥벌이로 삼고 있는 그런 증세는 아직 없다. 하지만 이석증이 가시질 않아서 걸을 때 중심을 잡기 어렵고 좌골신경통의 후유증으로 보행이 불편하며 신체형 자율신경장애라고 하는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증세로 피부에 이상한 통각을 느낀다. 이 모두 결국 老衰(노쇠)해진 탓이라 하겠다.
안드로이드나 사이보그 시대가 오긴 오겠지만
얼마 전부터 일본의 에니 “공각기동대”를 넷플릭스로 즐겁게 보고 있다. 거기에 사람의 두뇌 속에 칩을 집어넣어 두뇌 능력을 강화한 電腦(전뇌)라든가 신체기능을 기계적으로 강화시킨 사이보그가 등장한다.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이 창시한 사이버펑크의 미국식 변형 중에 하나가 영화 ‘매트릭스’라면 일본식 파생 중에 하나가 ‘공각기동대’인데 아무튼 그런 것은 아직 요원한 얘기이고 나 호호당의 경우 몸이 불편해지자 벌써 이 구차해진 내 몸에서 벗어나고픈 충동이 자주 든다.
몸이 구차해지니 슬슬 준비를 해야겠네
이상한 피부 통각 때문에 정신신경과를 처음 갔을 때 수 백 개 문항의 설문지를 주는 것이었다. 집에 가서 문항에 다 마킹을 한 후 우편으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일종의 정신분석이었다.
통밥을 굴려보니 두 가지였다. 일단 비용이 십 몇 만원 하는 걸로 봐서 그게 바로 정신과에서 처음 방문한 환자에 대한 일종의 입회비였고, 물론 그 용도는 제대로 된 치료와 상담을 위한 기초 자료였다.
그래서 성실히 문항에 마킹을 해서 보낸 뒤 찾아갔더니 의사는 뜻밖의 질문을 했다. “다 좋으신데 이상하게도 자살충동이 있어 보입니다, 왜 그러시죠?” 하는 것이었다.
“아니요, 그런 마음 전혀 없는데요” 하고 답했지만 속으론 ‘이 양반아, 이 불편한 몸에서 벗어나고픈 욕구가 있어서 그런 거야’, 하면서 슬쩍 미소를 지었다. 사이보그나 컴퓨터 칩을 박는 것이 아직은 오지 않은 이상 이 불편한 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죽는 것밖에 더 있겠냐고, 이 답답한 양반아.
의사란 사람들, 내가 보기엔 환자는 무조건 최선을 다해서 살려놓고 봐야 한다는 약간 터무니없는 도그마를 가진 집단들이다. 소생 가능하지 않고 곧 죽을 사람일지언정 목숨을 부지할 수만 있다면 당사자가 제 아무리 고통을 받아도 그건 강력한 진통제로 땜빵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 중에 “환자가 요청하더라도 극약을 주지 않겠다”는 조항이 들어가 있긴 하지만 의사들이 진심으로 그게 옳다고 여기고 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믿음이 가지 않는다.
내 몸을 내 의지대로 처분할 수 있는 권리는 人權(인권) 조항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파렴치한 범죄 또는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후 법정에서 내가 심신이 미약한 상태에서 그런 짓을 했다고 구차한 변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지극히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 난 이제 그만 살겠오, 하면 그건 인정해줘야 할 게 아닌가.
우리의 영혼이 육체라는 결함 있는 하드웨어 즉 육체의 감옥에 갇혀있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Gnosticism)가 옳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법적으로 행위능력이 있는 성인이고 심신미약도 아닌데 왜 안락사를 막는가 말이다.
물론 현실에선 그게 일반화되긴 역시 쉬지 않을 것이다. 자살을 금하는 종교라든가 중환자실의 환자로부터 뽕을 뽑는 대형병원들이 있으며 또 대중에 영합해서 막강한 권력을 누리는 정치인들이 있는 세상이란 점 잘 알고 있다.
합법적인 루트(route)가 없다는 생각에서 친하게 지내는 후배이자 의사에게 야, 언젠가 나중에 필요할 것 같은데 펜타닐 같은 약 좀 구해줄 수 없겠니? 하고 물었더니 그 친구는 싫은 표정이었다. 그래서 야, 이 친구도 결국 의사라는 틀에 갇혀 있구나 싶었다.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이해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에 다시 곰곰이 생각했다. 요원하긴 하지만 언젠가는 척추 교체 3백만원, 눈알 교체 2백만원하면서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사이보그 시대가 오긴 오겠으나 그게 내 살아생전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그냥 열심히 살다가 때가 되어 이젠 아니다 싶으면 정신이 흐려지기 전에 소위 穀氣(곡기)를 끊고 가야지 하는 마음을 굳혔다. 몸의 기능이 다했으면 몸을 버려야지 하는 마음일 뿐이고, 삶에서 죽음으로의 과정은 非(비)가역적이란 단순한 사실만 염두에 두면 된다.
수행을 많이 한 스님들이 어느 날 앉은 채로 열반한다고 하는 것이 달리 대단한 일이겠는가? 때가 되었다 싶어서 먹지 않고 가는 것이라 여긴다. 다만 앉은 채로 가는 게 뽀대나 가오가 있긴 하다, 하지만 나 호호당이야 禪僧(선승)도 아닌 이상 굳이 그럴 것 까진 없다고 본다.
"자연순환운명학" 책은 호호당의 저승수의
다시 돌아가서 얘기이다. 그래서 상담을 잠정 기간 쉬면서 책을 쓰기로 했다. 책이 완성되면 좋은 번역가를 통해 영역본을 만들어서 전 세계 유명대학 도서관에 수 천 부 정도 보낼 생각도 한다. 늦어도 수십 년 뒤가 되면 전 세계가 깜짝 놀라서 야, 호호당이 누구지? 한국 같은 후진국(?)에서 어떻게 이런 과학을? 하면서 찾게 되리라 생각하면 즐겁다. 저 세상이 있다면 그곳에서 낄낄 거릴 것이다. 그러니 책을 일단 남겨놓아야 할 게 아닌가. 호호당의 저승 수의.
사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죽음은 관념이었을 뿐 구체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未久(미구)에 다가올 현실이다. 건강할 때 건강만 챙길 일이 아니라 좋은 죽음도 준비해둘 일이다.
高僧(고승)들 역시 운에 따라 부침할 뿐
그러다 보니 최근엔 종교 계통의 알려진 인물들의 사주도 많이 점검해본다. 예로서 나옹화상 즉 혜근스님을 들어보자.
고려시대의 명승이자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하는 시를 남긴 것으로 전해지는 이 분의 생년월일은 양력으로 1330년 3월 3일이다. 庚申(경신)년 戊寅(무인)월 乙未(을미)일이 된다. 입적하신 것은 1376년 6월 10일, 즉 丙辰(병진)년 甲午(갑오)월 戊辰(무진)일이다.
운기의 절정인 立秋(입추)는 1345 乙酉(을유)년이고 입춘 바닥은 1375 乙卯(을묘)이다. 입적하신 것이 그 다음 해 1376년이니 입춘 다음 해였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경기도 회암사에서 4년 동안 밤낮으로 홀로 앉아 정진하던 중에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다고 적혀있는데 그 다음 해인 1345년이 을묘, 즉 입추였다.
당시 중국의 몽골제국인 元(원)나라로 가서 더 많은 공부를 한 뒤 1358 戊戌(무술)년에 고려로 돌아왔으니 이때는 60년 순환에서 霜降(상강)의 운이었다. 10월 상강은 추수가 시작되는 때이니 다 성취한 것이다.
1371년 辛亥(신해)년 운세가 한창 기울 무렵 공민왕으로부터 왕사(王師)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등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데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으면 결국 사회적으로 모욕을 받는 법이다. 시기질투의 인간 세상 아닌가! 이에 입춘 다음 해인 1376년 탄핵을 받아 멀리 귀양을 가던 도중 병이 나서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오늘날 우리 불교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성철 스님 또한 운세 그대로 살다 갔다. 1912년 4월 6일에 태어나 1993년 11월 4일에 입적하셨는데 보면 壬子(임자)년 甲辰(갑진)월 壬子(임자)일이다. 따라서 1952 壬辰(임진)년이 입추였고 1982 壬戌(임술)년이 입춘 바닥이었다.
이 분이 우리 불교에 크게 기여한 시기는 입추 얼마 후 즉 處暑(처서)운인 1954년 帶妻(대처)불교를 지양하는 불교정화운동이었다. 그리고 8년에서 10년간 長座不臥(장좌불와), 즉 눕지 않고 앉아서 수행했기에 크게 禪風(선풍)을 떨쳤다, 물론 골병도 들었겠지만.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와서 面壁九年(면벽구년)한 것과 같은 일이니 이 정도면 가오가 요즘 말로 ‘개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1982년 입춘으로부터 11년 뒤 몸 고생 많이 하시다 입적하셨다.
깨쳤다고 해서 운세를 벗어나진 않는다. 다만 마음의 경지가 일반과는 다를 뿐이다.
깨우침이란 게 뭔지 알지만
깨우침이란 뭘까? 하면 답을 드리겠다. 絶對抛棄(절대포기)를 통해 絶對自由(절대자유)를 얻는 것이다. 싹 다 버리고 나면 거치적거리는 게 없어진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心無罣礙(심무가애)가 그것이다.
당초 생각하기로 젊은 제자가 한 명 있어 상담안내란을 통해 그 친구에게 상담을 해도 부족하지 않다고 권유할 생각이었는데 때마침 그 친구 역시 최근 몸이 좋지 않아서 고민하다가 그냥 쉬기로 했다.
블로그는 이어질 것이니
상담은 하지 않지만 글은 여전히 올릴 생각이다. 당초 2039년까지 쓰기로 마음을 정했으니 그렇다. 그리고 또 책을 마치고 나면 다시 상담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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