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와 영희, 그 수수께끼



예전 초등학교 교과서엔 등장했던 이름이 철수와 영희이다. 그 바람에 여전히 철수는 남자 아이, 영희는 여자아이의 대표적인 이름으로 통한다. 이에 대해 인터넷 포탈에 당시 교과서 저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론이 실려 있어 나로 하여금 웃게 만들었다. 나름 귀여운 추측이다. 


철수란 이름의 한자는 哲洙(철수)이다. 유교의 성인인 孔子(공자)를 뜻하는 말이다. 哲(철)은 이치에 밝고 지혜롭다는 의미이고 洙(수)는 강 이름인 바, 공자가 태어난 고향 근처의 강 이름이다. 따라서 哲洙(철수)란 이름은 공자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서구화 이전의 우리 사회에 있어 남자의 이름을 철수라 한 것은 훗날 孔子(공자)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기원을 담은 이름이었다. 


그러면 영희는 어떤 유래인가 알아보자. 영희는 英姬이다. 이 이름은 고대 중국의 신화 전설이라 할 수 있는 堯舜(요순)시대에서 비롯된다. 요 임금은 임금의 자리를 순에게 물려주면서 두 딸을 순에게 시집보냈는데 그 중에 하나가 女英(여영)이었다. 


英(영)이란 한자는 꽃봉오리가 봉긋 솟은 형상을 딴 글자로서 꽃부리 영이라 한다. 姬(희)는 흔히 ‘여자’란 뜻도 있지만 원뜻은 왕비라든가 지체 높은 여성에 대한 존칭이다. 따라서 英姬(영희)는 요 임금의 딸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영희란 이름은 훗날 왕비처럼 높은 신분이 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사내아이에겐 유교의 대성인 孔子(공자)처럼 되어라 하는 것이고 여자아이에겐 존귀한 왕비가 되어라 하는 좋은 뜻이 담긴 이름이 바로 철수와 영희인 것이다. 


한글만을 써야 한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철수가 哲洙, 즉 공자님의 대명사인 줄 모르게 되었고 영희가 英姬인 줄도 모를 뿐 아니라 그 뜻은 더더욱 모르게 된 세상이다. 한자를 모르다 보니 철수와 영희란 이름이 이젠 수수께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인문 교육이란 그 기본이 읽고 쓰고 말하기인데, 우리말 대부분의 어휘가 한자어란 사실이다. 이에 기초한자를 배우지 못한 학생들은 어휘의 뜻을 억지로 외워야 하거나 아니면 어슴푸레 짐작 정도로 알고 있다. 딱한 일이다. 그냥 1천자 정도만 어린 시절에 익히면 그만인 것을 말이다. 



銜(함)이란 한자, 이미 그 뜻도 모르건만



사람을 처음 만나서 얘기하다 보면 상대방의 이름을 물어보게 될 때가 있다. 나보다 젊은 상대라면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지? 정도로 묻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성함 또는 존함이란 단어를 쓰게 된다. 가령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하는 식으로. 


성함, 존함, 사회생활에서 흔히 쓰는 단어이다. 그런데 단어의 뒷글자인 ‘함’이 무슨 의미냐 물어볼 것 같으면 알고 있는 사람을 거의 만나본 적이 없다. 그냥 뒤에 붙여서 쓰면 존칭이 되는 정도로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막연히 짐작하는 정도라면 이미 죽은 단어, 즉 死語(사어)인 셈이니 아예 쓰지 않아야 더 맞을 것 같은데, 쓰긴 흔히 쓰면서 뜻은 모르고 있으니 이 또한 딱하다. 


함은 銜(함)이다. 원뜻은 마차를 끄는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이란 뜻이지만 나중에 ‘받들다’는 뜻이 파생된 결과 관리의 계급을 뜻하는 글자가 되었다. 관리란 임금의 명을 받들어 공무를 수행하는 자이기에 그렇다. 


따라서 오늘날의 뜻으로 헤아리면 銜(함)은 ‘타이틀’이라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姓銜(성함)이란 함은 성씨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뜻하는 말이다. 왜 그런가 하면 예전엔 윗사람의 이름은 말하는 것이 일종의 사회적 금기였기 때문이다. 


흔히 쓰면서도 뜻은 대부분 모르는 이상한 글자가 ‘銜(함)’이다. 



희화화, 발음하기도 정말 어려운 단어



하나 더 얘기해본다. 


들을 때마다 속이 불편해지는 단어가 하나 있으니 ‘희화화’라고 하는 단어이다. 발음하기 정말 어렵다, 턱과 입술이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이 발음하기 어려운 단어는 나는 지식인,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주로 사용한다. 


한자로 바꿔보자, 희화화는 戱畵化이다. 戱畵(희화)는 어떤 대상을 풍자하거나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그림을 말한다. 그러니 희화화는 어떤 대상을 조롱거리 그림처럼 만든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발음하기도 정말 까다롭고 성가신 ‘희화화’란 단어를 쓰지 않고 그냥 쉽게 ‘조롱거리 그림으로 만든다’고 하면 될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런 단어를 들을 때마다 정말 거슬린다. 정말이지 그 어려운 단어, 한자로 쓰실 수 있느냐 물어보고 싶을 정도이다. 십중팔구 쓰지도 못할 거면서 발음하기도 까다로운 그런 표현은 왜 하는지 모르겠다. 희롱할 戱(희)자, 사실 어지간히 한자 좀 익힌 사람이 아니라면 어려운 글자란 사실이다. 



傍點(방점)이란 단어



소위 텔레비전에 자주 얼굴을 비치는 정치 평론가란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서 ‘방점’이란 단어가 있다. 


방점, 한자로 傍點(방점)이다. 이 경우 傍(방)은 곁, 즉 사이드란 뜻이 되고 點(점)은 물론 점, 작고 둥글게 찍은 표시를 뜻한다. 그러니 옆에 찍어놓은 점이란 의미이다. 


최근 우리말로 하면 ‘밑줄’이 된다. 책을 보다가 중요한 대목에서 밑줄 쳐놓는 것을 뜻한다. 한문은 원래 위에서 아래로 縱(종)으로 썼기에 중요한 글자나 대목에 먹으로 점을 찍었던 것이고 횡으로 글을 쓰는 요즘엔 밑줄을 치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부분을 표시해 놓았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정치 평론한다는 후배에게 “너, 방점이 무슨 뜻인지 알고는 있니?” 하고 물었더니 후배 답하길 “중요해서 점을 찍는 것 아닙니까? 하고 답하는 것이었다. 이에 다시 그러면 왜 傍(방)이란 한자를 쓰는 까닭을 아느냐 하고 물었더니 ‘글쎄요’ 였다.

 

그러면서 나름 한다는 변명이 “저만 모르는 게 아니예요,”였다. 그래서 웃었다. 그리고 앞에서 한 설명을 해주었다. 



사자성어 유행



최근에 보면 기관장이나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높으신 양반들이 신문에 기고한 글을 볼 것 같으면 남들 잘 모르는 네 글자로 된 한문표현, 이른바 사자성어 하나 정도는 쓰는 것이 유행이란 사실이다. 


나 호호당이 보기에 그런 사람들의 이력을 볼 때 그다지 한문이나 인문 교양에 밝을 것 같지도 않건만 희한하게도 사자성어 하나씩은 거의 들먹이고 있으니 우습다는 것이다. 


한글만 사용하자면서 모든 학생들 국민들, 한자 文盲(문맹) 만들어놓은 판국에 자신들은 어느 사이에 어려운 한자나 성어를 익혔을까 싶다. 홀로 남달리 짬을 내어 독학을 했나? 


남들과 구분되고 차별되는 자신의 높은 교양을 뽐내고 싶은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문제는 그 사자성어가 본인이 평소 알고 있던 게 아니라 아랫사람 시킨 것 같은 냄새가 난다는 점이다. 


올해 예순 넷, 1955년생인 나 호호당 역시도 학교에서 한자를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내가 한자와 한문을 익힌 것은 어려서 우연한 계기에 좋은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나 호호당보다 더 뒤의 세대들은 더더욱 한자를 배우지 않았다.


그런데 기관장 등등의 높은 양반들을 보면 이젠 나이가 대부분 나 호호당보다 아래란 사실, 그러니 그들이 한자나 한문을 익혔을 가능성은 지극히 적다. 그런데 왜 글을 기고할 때면 그냥 평이한 글로 자신의 생각을 나타낼 일이지 왜 굳이 어설픈 사자성어를 인용하고 있는 것일까. 


사회 지도층이란 사람들이 저처럼 假飾(가식)으로 가득 차 있으니 슬프고 한심하다. 



언어가 타락한 사회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소설가 김훈 선생의 말, 우리 사회는 언어가 점점 타락해가고 있다는 말이 생각난다. 


선생의 말을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다시 찾았다. 


“언어가 타락하면 소통이 불가능하게 되거든요. 언어를 소통의 도구로 쓰지 않고 무기로 쓰기 시작하니까 언어가 결국 무장을 하잖아요. 언어가 총을 쏴대는 거죠.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죠. 전혀 소통이 안 되고 서로 딴소리를 하는 거죠.”


철수와 영희란 이름이 그저 수수께끼가 되고 성함의 銜(함)이란 글자 뜻을 모르면서도 너무나도 흔히 사용하고 있고, 쉬운 우리말 표현이 가능함에도 굳이 발음하기도 어려운 ‘희화화’란 표현을 써야 유식해보이고, 어쩌면 전부 앵무새처럼 ‘방점’이란 단어를 쓰면서도 정작 그 뜻은 어설프게 알고 있고, 한자라곤 거의 배우지도 않은 사람들이 졸지에 어려운 사자성어를 통해 뽐을 내고 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언어를 소통이 아니라 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모습들이 아니겠는가. 김훈 선생의 표현처럼 언어로 총질을 해대고 있는 2018년의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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