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의 소설 "무진기행"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1964년에 무진기행이란 단편 소설이 세상에 나왔다. 그 소설을 1979년 군대 복무 시절 우연히 만나서 읽게 되었다. 24살 시절이니 그런 거 읽을 법도 하지 않은가. 무진기행에서 ‘무진’은 가상의 도시였는데 읽다 보니 알게 되었다. 안개 霧(무)에 나루 津(진), 즉 안개 나루였는데 소설의 주제가 바로 안개와 나루였다.
안개는 시야를 가린다. 지나온 곳을 덮어버리고 이제 갈 방향 또한 보여주지 않는다. 안개 속에서 사람은 고립된다, 움직임을 방해하진 않지만 눈을 가려서 머뭇거리고 지척이게 한다.
나루는 배틀 타고 떠나는 곳이다. 저편에서 건너오거나 이편에서 건너가는 곳이다. 어디에 안착하지 못하고 떠나거나 떠나오는 곳이다.
소설이 1964년에 나왔으니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6.25 전쟁이 끝나고 10년 뒤, 세상은 참혹했고 처절한 가운데 “미국 스타일”이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사람들은 몸부림을 쳤다, 우선은 당장 먹고 살기 위해 그리고 좀 더 잘 살고 좀 더 가져보기 위해. 물론 그 와중에도 누군가는 엄청나게 돈을 벌어대고 있었다.
소설의 문장 역시 그 이전과는 다른 서구 스타일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소설을 낼 때 23세였던 젊은 작가 김승옥 씨는 당시의 우리 사회에 대해 환멸과 허무를 보았던 것 같다. 금전만능과 이기주의에 대한 강한 반발.
그런데 돌이켜보면 어이가 없다, 1964년 전후의 우리가 참으로 못 살고 처절하긴 했으나 지금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금전만능이고 이기주의인가를 따져보면 오히려 그 때가 더 인간적이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단 하나, 생각과 가치관이 철저하게 바뀌었다는 점이다. 당시에도 돈이 최고였고 지금도 돈이 최고이지만 바뀐 것은 그게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바뀌었다. 그러니 김승옥 작가는 현재의 세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물론 물어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겠지만.)
2022년의 영화 "헤어질 결심"
얼마 전 “헤어질 결심”이란 영화를 넷플릭스로 봤다. 슬픈 결말의 영화는 가급적 피하려 하는데 박해일이란 배우에 낚여서 보게 되었다. 조금만 힘이 들면 즉각 ‘나가기’를 누를 생각이었는데 30분이 지나자 나올 수가 없었다. 짙은 안개 속에 빠져 버렸다.
영화 장면이 진행되는 게 아니라 내가 영화 속을 더듬거리며 출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이건 내 스스로 만든 안개, 또는 結界(결계)인데 빠져나올 수가 없구나, 그냥 가보자, 끝까지.
보면서 알게 되었다, 소설 무진기행을 소재로 해서 만든 박찬욱 감독의 영화였다. 이번엔 사회 풍토에 대한 허무와 환멸이 아니라 사랑이 주제였는데 그 사랑 또한 안개가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니 2022년 버전 무진기행이다. 그래서 정훈희와 송창식이란 두 가수가 옛날에 히트 친 노래 “안개”를 부르고 있었다. 감독이 공들여 만들어낸 엔딩이었고 두 가수는 絶唱(절창)을 남겼다. 노래가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려면 정말이지 결심, 毒(독)한 마음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려면 마음을 단속해서 단단히 묶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하는 이를 죽이거나 내가 죽어야 한다. 할 짓이 못 된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떨까 늘 궁금하다. 가벼운 연애나 사귐, 가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 스타일과 심리에 대해 물어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만나다 보면 정말 사랑하게 될 것 같아서 미리 헤어질 준비 또는 방어막을 치고 만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건 그냥 나의 지레짐작일 것이다, 인간이 그리 쉽게 변할 턱이 없으니 신세대라고 해서 구세대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것 같진 않다는 점에서.
60년 전과 지금의 차이
흥미로운 점 하나는 소설이 1964년에 나왔는데 영화는 2022년이란 점이다. 거의 60년 간격이다. 60년은 하나의 순환주기 아닌가.
소설이나 영화 모두 시대의 풍토를 반영하고 있을 것인데 무진기행의 안개와 헤어질 결심 속의 안개는 기본적으로 같다는 생각을 한다. 다만 오늘에 이르러 더 이상 금전만능이니 이기주의니 하는 그런 말 자체가 아예 들려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왜일까? 생각해보면 이젠 그게 너무나도 기본이 되어서 더 이상 그런 얘기 자체가 불필요해서 그런 게 아닐까.
1964년의 풍토는 힘든 현실 속에서 오히려 낭만주의가 꽃을 피웠다면 오늘날은 먹고는 살 수 있는 현실 속에서 냉소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차이 정도가 아닐까.
감정과 감상이 넘치는 낭만주의, 감정과 감상을 자제하는 냉소주의. 낭만과 냉소는 그러니 對極(대극)이다.
이런 생각도 든다, “헤어질 결심”이란 영화 제목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의 풍토가 헤어지는 것이 예사 보통의 일이 되어서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추론 자체가 너무 드라이한 것 같다.)
사랑과 죽음은 등가교환
사랑이란 게 알고 보면 실로 두려운 것이다. 왜냐면 죽음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이기에. 죽을 만큼 사랑해! 너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아!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을 느낄 때 절로 가지게 되는 감정이다. 그러니 진짜 사랑은 죽음과 等價(등가)이고 같은 무게를 지닌다. 따라서 진짜 사랑은 두려운 것이 맞다.
이쯤에서 시니컬하게 가보자. 생명과학자의 관점으로.
자연계에서 유성생식, 즉 짝을 지어서 번식을 하는 모든 생명체를 보면 짝을 짓는 것과 죽음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벼는 8월 하순에 자신의 씨앗, 즉 쌀알을 매달고 그 이후 사력을 다해 그 알 속으로 자신의 모든 영양분을 쏟아 넣는다. 그러곤 말라서 죽는다. 거미 또한 늦가을에 짝짓기를 통해 알을 낳고 죽는다. 늦가을 나비 또한 마찬가지. 어떤 놈은 심지어 알이 부화해서 새끼가 나오면 자신의 몸을 먹잇감으로 내어주기도 한다.
수사슴은 암컷에게 멋있게 보이기 위해 불필요하게 커다란 장식물, 즉 장대한 뿔을 만들어 올린다. 그 바람에 행동이 불편해지고 때론 나뭇가지에 걸려 죽기도 한다.
異性(이성)을 만나야만 이어가는 모든 생명체들의 숙명이다. 자연계에서 사랑과 죽음은 분명하고 명확하게 등가교환인 것을 알 수 있다. 맞바꾼다는 말의 속말인 ‘다이다이’이고 한자로 對對(대대)이다.
종교로 가서 봐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요한 복음서에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하는 구절이 그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반대편에는 죽음이 있다는 말이다.
사실 저 구절이야말로 전통의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점프하는 엄청난 탈바꿈이다. 야훼는 원래 두렵고 경외해야 하는 절대자였지만 이 대목에 이르러 ‘사랑’ 그 자체라고 얘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종합하면 사랑은 짝짓는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엄청난 과업이고 죽음 또한 짝짓는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숙명이다. 이 단순한 걸 가지고 무진장 시니컬한 표현의 제목을 달아 일약 유명해진 생물학자가 바로 리처드 도킨스이고 그 책은 “이기적인 유전자”이다.
이기적인 유전자, 저 표현은 책을 파는 데 있어선 효과가 있었겠으나 별로 탐탁하지가 않다, 유전자가 그냥 이어질 뿐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유전자가 무슨 이기적인가? 그냥 생명이 이어져가는 수단일 뿐인데 말이다. 오히려 나 호호당은 도킨스 스스로 어지간히 죽음을 무서워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유전자 너만 이기적으로 살아남고 그 통로인 나 자신은 죽는구나! 하는 억울함.
지금까지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보고 며칠 동안 가지게 된 생각들을 글로 옮겨보았다.
이제 나 호호당의 경우 작년 내내 몸이 불편한 가운데 몸의 노쇠해감을 느끼다 보니 얻은 것이 하나 있다고 얼마 전 글에 썼다. 사랑과 죽음은 하나란 사실이고 둘 다 자연과 세상, 생명, 정확히 말하면 짝을 짓는 생명들의 지극히 자연스런 삶의 과정이란 것이 그것이다. 살면서 사랑했으니 죽음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란 깨달음.
새롭게 쓰여지기 시작한 "무진기행"
안개, 사실 매력도 많다.
안개는 경계를 허문다. 안개 속에선 경계가 허물어지다 보니 나와 내가 아닌 것과의 경계도 허물어진다. 우리가 안개 속에서 느끼는 불안은 바로 내가 너무 나에게만 집착하기 때문이 아닐까, 나와 다른 무엇이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지나친 강박감 같은 거.
2023년의 대한민국, 가히 안개 속이라 말할 수 있다. 五里霧中(오리무중)! 당분간 다가오는 모든 미래는 안개에 가려져 있다고 보면 된다. 겨울 안개.
하지만 놀랄 것 전혀 없다. 우리나라는 이미 2017년부터 안개 속으로 진입했으니 그렇다. 이 안개는 그로부터 15년이 지나 2032년 국운의 춘분을 맞이해야만 비로소 그 안개가 조금씩 걷힐 것이고 청명한 시야는 다시 세월을 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안개”의 노랫말처럼 2023년 초, 세월의 짙은 안개 속에서 무수히 많은 낮은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앞길을 가로 막아온다. 하지만 저 안개는 작가 김승옥 씨가 소설 속에 적고 있듯이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女鬼(여귀)가 품어 내놓은 입김”이 아니라 우리 속의 불안일 뿐이다.
우리 모두 무진기행을 또 다시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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