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이 막막하다면 그에 실은 다른 길의 시작일 수가 있다는 사실
사노라면 앞이 까맣고 그저 막막할 때가 있다. 그런 때가 반드시 있다. 이미 그 전에서부터 간신히 겨우겨우 버텨왔는데 이젠 더 이상 길이 없구나 싶은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실은 길이 없는 게 아니다. 내려놓으면 또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물론 그 길은 전혀 생각지도 않은 길, 가기 싫은 초라한 길이지만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가게 된다.
그러다가 또 다시 길이 막힌다. 이번엔 정말 더 이상 갈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망설이고 서성대지만 그 또한 더 내려 놓으면 또 다른 길이 보인다. 달리 길이라곤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걸어간다.
이런 상황이 몇 번이고 연출되기도 한다. 나는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이렇게까지 몰락할 줄 몰랐어, 정말 이럴 줄 몰랐어, 하는 탄식 때론 장탄식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주어진 길을 이어간다.
터벅터벅 걷다보면 과거 한 때 내가 생각했던 길은 모두 아련한 꿈속 같고 지금 내딛는 발길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길이다.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 후회도 해보지만 부질없는 짓, 눈앞에 주어진 길을 간다. 그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다 내려놓으면 길은 이어진다
다시 생각해보면 지금의 길은 예전에 죽어서나 갈 수 있는 길이라 여긴 적도 있다. 이제 나는 끝장이야, 어떻게 살아갈 수가 없어! 하고 주저하던 길, 바로 그 길을 걷고 있다. 그렇다, 당신은 이미 죽었다. 삼도천을 건너야만 밟을 수 있는 길을 당신은 걷고 있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길은 이어진다.
그러다가 도중에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서 속을 내비치기도 한다. 어쩌다가 내가 이 길을 가게 되었다오, 그러자 상대방은 건성의 웃음으로 답한다. 누군들 처음부터 이런 길을 걷고픈 이는 있었겠오? 하고.
길을 이어가다 보면 전혀 생각지도 않은 경치들과 사람들을 만난다. 하지만 없는 것과 같다. 모두 아무 말 없이 묵묵히 걸어가고 낯선 풍경들도 등을 돌린채 있다. 많은 이가 그 길을 걷고 있지만 실은 아무도 없고 아무 것과 같아서 결국 당신은 알게 된다, 그 길은 당신 혼자만의 길임을.
낮으론 당연히 해가 있지만 짙은 구름에 가려 어둑하기까지 하다. 발치 저 편의 구석을 바라봐도 밤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두컴컴하다. 하지만 당신도 이젠 말이 없다, 곁에 누군가 스쳐가도 말을 건네지도 않는다, 그냥 길을 간다. 끝이 없을 것 같은 길을 그냥.
힘이 든다는 생각도 이 무렵이면 들지 않는다. 엄살을 피울 필요도 없다, 들어줄 이도 없어서 아무 쓸 데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힘이 들든 말든 그건 의미가 없다. 먹어야 살기에 길을 가다가 먹을 수 있는 것을 보면 그저 주워 먹을 뿐이다.
왜 길을 가는지 자신에게 간혹 물어본다. 그 답은 살아있으니 길을 갈 뿐이란 걸 알게 된다. 그 자리에 머물고 싶은 마음 또한 없어서 길을 간다.
언제 이 길이 끝날지 알 수 없고 과연 이 음침한 길이 끝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그냥 길은 저 멀리 시야 바깥까지 이어져있다. 그러니 가늠하지 않는다. 숨이 붙어 있는 한 이 길을 갈 뿐이고 길을 가다가 스러지는 곳이 내 무덤이고 안식처가 되리라 여긴다.
희망이 아니라 절망에도 의지할 수가 있으니
그러면서 어느덧 알게 된다. 希望(희망)이 아니라 絶望(절망)에도 사람이 마음을 기대고 의지할 수 있다는 전혀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 어떤 희망이든 불안하고 헛될 때가 많지만 절망만큼은 바위처럼 단단하다는 사실을.
그러고는 다시 많은 날들이 지나간다. 침침한 햇빛 속에서 얼마나 많은 날들이 흘렀는지 가늠할 수 없고 할 필요도 없다. 당신은 이미 죽었기에 더 이상 삶을 기대하지 않는다. 확실한 절망을 믿을 뿐 어설프고 신기루와도 같은 희망 따윈 아예 바라지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그저 육체의 죽음이고 그것만이 안식에 대한 확실한 희망일 뿐이다. 때론 걸음을 멈추고 쉬다 보면 아주 오래 전에 명랑하고 즐겁던 시절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실재했던 일이었을까? 하고 의문이 들기도 한다. 과연 내가 그랬던 때가 있었단 말인가? 그건 꿈속의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말이다. 얼마나 많은 날들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이상한 일이 간혹 생겨나기 시작한다.
구름 속의 해는 여전히 어둡고 바람도 여전히 황량하고 거칠지만 때때로 예전보다 구름이 옅어져서 조금은 더 밝은 해가 비치기도 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기도 한다는 일이다. 길에서 주워서 먹는 것들도 때론 신선한 것들이 생기고 다리엔 어느새 힘이 붙어있다.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거 참! 신기하네, 별 일이야, 독백을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설렐 때도 있다. 이거 길이 끝이 나려나, 조근은 더 나은 길로 접어들려나! 하는 기대. 하지만 마음을 다잡는다, 이건 나를 흔들어보는 거야, 희망에 대한 기대를 보여주면서 나를 꼬드기는 거야! 하고.
내 힘은 반석과도 같이 확고한 절망에 있지 애매하고 모호한 희망이 아니란 말씀, 그러니 조심하고 경계할 것은 희망이야, 그러니 나를 흔들어 대지마, 그냥 이어온 발걸음만 다시 이어갈 뿐 어설픈 기대는 절대 품지 않을 거야!
그런데 어느 날에선가부터 확고하던 절망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마침내. 맑고 시원한 샘을 만나 목을 축이기도 신선한 열매를 만나서 상큼한 맛을 즐기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일이 제법 자주 나타난다. 어거 뭐야? 이건 또 무슨 장난질이야? 하고 경계심도 든다. 그러면서 바위와도 같은 절망의 힘도 조금씩 약해져간다.
어느덧 풀밭 길을 밟고 있다. 예전에 밟아왔던 마른 흙길이나 자갈길이 아니다. 굳은 살 잔뜩 박힌 거친 발바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길이다. 이건 또 뭐야? 하고 의심하고 경계해보지만 이미 눈앞의 현실은 바뀌고 있다.
어느 사이 죽음에서 다시 삶의 경계로 넘어선 것이다. 믿기 어려운 현실이 다시 펼쳐진다, 당황스럽다, 무엇보다 희망의 그림자가 넘실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희망아, 난 너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러다가 휙-하고 떠날 수 있는 너에게 끌려 다니긴 싫어! 하고 경계의 마음을 다시 가져본다.
그리고 또 다시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에 많은 것이 변했고 많은 것이 좋아졌다. 그리고 연분홍의 희고 맑았던 紅顔(홍안)이 핏기 빠지고 蒼老(창노)한 얼굴로 변했다. 몸 여기저기 낡아서 고장도 났다.
지나온 길을 돌이켜보니
이제 더 이상 길이 없네, 하고 탄식하기 시작하던 때로부터 어언 30년이 넘었다.
기억이 난다, 젊은 시절 한 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긴 세월 지루해서 어떻게 살아가지? 언제 늙어서 죽냐고, 에이 시시한 삶이여! 하고 혼잣말로 흰 소리를 했던 기억이 난다. 1989년의 일이었던 것 같다.
정말이다, 젊은 한 때 산다는 게 참으로 시시껄렁한 세월 보내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진정으로 했다. Life is nothing but killing time!
복에 겨워서 저런 생각을 했다. 그랬으니 죽을 짓을 하기 마련이고 그러자 운명이 나를 죽여주었다. 그래 어디 한 번 죽어봐라, 진짜 죽으면 편할 것이니 살려놓은 채로 죽여주마, 길게.
힘들어서 죽는 게 차라리 더 좋겠다 싶은 맛을 願(원)도 없이 보았다. 버티게 해 준건 아내와 아들을 지켜야겠다는 마음, 그리고 언젠가 이 목숨 끝나리란 불변의 확고한 사실이었다. 아무리 괴롭혀도 언젠간 이 몸은 죽는다, 그러니 겁 안 난다.
우리의 삶은 어리석고 허약하고 불안해서 언제든 다시 어려움이 닥칠 수도 있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잘 지냈으면 그것으로 고마울 따름이다.
모든 길이 영화롭고 고생이었다는 사실
되돌아보니 험한 자갈길도 풀밭 길도 모두 그게 ‘길’이란 점에선 다 같았다. 그냥 인생길.
세월이 지난 탓에 그런지 모든 길과 모든 세월이 오롯이 내 삶의 전성기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난의 길에서 내 정신은 더 없이 맑고 투명했고 편한 길로 변하자 이 또한 그저 고맙다.
젊은 시절 꿈꾸었던 榮華(영화)는 실로 顚倒(전도)된 妄想(망상)이자 그저 虛榮(허영)에 대한 갈구였다. 그걸 부수어버렸으니 고맙다.
삶이란 사계절을 보내는 것이란 것도 알았다. 칼로 무 자르듯 정확한 삶의 길이란 것도 알았다. 이에 8년 전 2014년 어느 봄날 거창하게 이름 붙이길 “자연순환운명학”이라고 했다.
모든 계절이 아름답다, 삶의 시간이 아름다운 건 우리가 가진 전부가 그것이기에 그렇다. 그 어떤 계절도 그늘이 있고 고통이 있다. 삶 자체가 고통이기에 어쩔 수가 없다.
누군가 찾아와서 힘들어 죽겠다고 하소연하면 그거 다 한 때입니다, 지나갑니다, 이렇게 얘기해준다. 누군가 득의양양하게 설쳐대면 섣불리 말을 건네지 않고 속으로 읊조린다, 그래 지금을 즐겨, 그거 다 한 때야.
여왕께서 패스(pass)하셨다
방금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 세상을 지나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패스(pass)하신 것이다. 日辰(일진)을 체크해보니 수긍이 간다.
나 호호당이 태어났을 때 그녀는 여왕이었고 지금껏 여왕이셨다. 올 해 여왕의 운세가 60년 순환에서 冬至(동지)였으니 때에 맞추어 잘 가셨다.
지나갔다고 하고 떠났다고도 하지만 다른 세상이 있는지 그건 모른다, 그러니 그들 식으로 말해야 하겠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갔다고. 이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수고로움을 벗어나 진정한 安息(안식)을 찾았을 것이다.
달라이 라마도 얼마 전에 생년월일을 확인해보니 이제 가실 때가 되었다, 그 생각이 다시 난다. 그 분은 환생하시겠지!
이 글은 어젯밤에 썼다. 나 호호당의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의 얘기이기도 할 것 같아서 이런 글을 썼다. 추석 연휴 잘 쉬고 재충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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