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생각하는 아침이슬)

 

삶의 짧고 덧없음을 노래하는 글들, 정말이지 무수히 많다. 그 중에서 나 호호당이 깊이 새기고 있는 두 개의 표현이 있다.

 

 

성경 시편의 표현

 

 

하나는 성경 시편 103편 15-16절이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 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마흔 중반을 넘기면서 성경 시편의 글들을 자주 접하곤 하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산다는 게 한 철 피었다가 시드는 잡풀과 같고 좋은 영화의 세월이란 게 며칠 피었다가 지는 들꽃과 같다고 한다. 시편의 무대는 사막, 불어오는 건조하고 뜨거운 바람에 풀과 꽃은 순식간에 말라버린다. 삶의 시간과 영화가 저처럼 짧고 덧없다는 말이다.

 

이에 살면서 문득문득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하는 구절이 떠오르곤 한다. 시편에선 그 허망함을 극복하는 방법을 바로 다음의 17절에서 제시하고 있다. 인자하신 여호와를 경외하면 영원의 삶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 호호당은 여호와나 주 예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 그냥 덧없는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채 살아간다.

 

 

이태백의 강개한 표현

 

 

또 하나 삶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그야말로 멋지게 노래한 이는 중국 당나라 시절의 천재시인 이백, 흔히 이태백이라 하는 양반이 남긴 구절이다.

 

시인의 노래는 이렇다.

 

봐라, 이 天地(천지)란 곳은 만물이 잠시 쉬었다 가는 여관이요 光陰(광음), 즉 시간은 百代(백대)를 지나가는 길손 아니겠니? 이에 浮生(부생) 즉 뿌리내리지 않고 물위에 떠서 흘러 다니는 부평초 같은 삶은 마치 꿈속 일과 같아서 즐겁다 한들 그게 얼마나 되겠니! 옛 사람들이 촛불을 밝히고 밤이 늦도록 놀았던 것은 다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음이야.

 

이 시는 이태백이 무르익은 늦봄에 친지들과 함께 ‘나이트 가든파티’를 열면서 지은 시다, 인생 뭐 없어, 짧아, 그러니 우리도 즐길 때 한껏 흥껏 즐겨보자면서 바람 잡았던 시이다. 시의 제목이 “봄밤에 桃花(도화)와 梨花(이화) 만발한 정원에서 파티를 열면서”, 春夜宴桃李園序(춘야연도리원서)이다.

 

성경 시편의 내용은 삶이란 게 정말 짧고 허망한 것이기에 인자한 여호와를 경외하고 따르면 영원을 얻을 것이란 구원의 메시지이다.

 

반면 이태백의 얘기는 인생 정말 짧은 것이고 한 때 잘 나간다 해도 그게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마침 이렇게 좋은 사람들끼리 늦은 봄 좋은 때에 복숭아꽃 배꽃 만발한 정원에 어렵사리 모여서 나이트 가든파티를 열었으니 밤을 새워서라도 정담을 나누고 흥겹게 술잔을 기울여보자는 얘기, 인생 뭐 없다, 그저 놀 때 놀아야 한다는 얘기이다. 다시 말해서 歡樂頌(환락송)이다.

 

시편의 메시지는 진지하기 그지없다. 이백의 메시지 또한 그렇다. 둘 다 아무런 꾸밈이 없고 진솔하다.

 

나 호호당이 저 두 개의 메시지를 모두 좋아한다는 것은 반은 종교적이고 반은 현세적이어서 그런 모양이다.

 

 

'덧없다'는 말에 대해서 

 

 

아무튼 흔히들 덧없는 삶, 덧없는 영광, 덧없는 세월, 덧없는 마음 등등 어느새 지나가버리는 삶의 일들에 대해 우리들은 이런 표현을 쓴다.

 

덧이란 어떤 시간적인 틈이나 사이를 뜻한다. (틈새란 말은 틈과 새가 같은 의미이니 같은 뜻의 반복이다.) 따라서 덧없다, 덧이 없다는 말은 어떤 일이나 사물이 존속하는 시간이 짧다는 말이다. 가령 인생은 짧고 덧없다고 표현할 경우 그건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짧으니 덧이 없는 것이다.

 

시간의 길이, 절대적 길이나 물리적 길이가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길이는 대단히 상대적이다. 때론 1분 60초가 엄청나게 길게 느껴지기도 하고 반대로 사랑하는 이와의 하룻밤은 순식간이기도 하다. 그러니 황진이는 동짓달 긴긴 밤의 한 허리를 베어서 좋은 님 오시날 밤에 쫙-하고 펼쳐놓고 사랑놀이 길게 펼쳐보리라 하고 잔뜩 벼르는 시를 남겼다.

 

나 호호당은 며칠 전 7월 25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 69년을 살았다. 나름 긴 세월이었다, 분명. 그런데 돌이켜보면 살아온 날들이 그다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 또한 지울 수 없다. 심리적 시간의 길이라는 것이 이렇게 상대적이다.

 

 

삶의 의미를 찾아서 

 

 

때론 부질없는 삶이란 표현도 자주 쓴다. 부질없다는 말은 의미가 없다, 가치가 없다는 뜻의 말인데 그게 살아볼수록 실감하게 되는 말이기도 하다.

 

젊은이들이나 청년들은 잘 살기 위해서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 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나름의 철학자들이나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이 해주는 얘기나 강연에 참가해서 뭔가 얻으려 한다.

 

그래서 너무 주변의 눈치 보지 말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만 삶에 의미가 부여된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제법 그럴 듯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꼭 그렇지만도 않다. 원하는 것 자체가 살아가면서 또 겪어가면서 변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A 라는 장소에 가고 싶어서 갔더니 그곳에서 B 라는 다른 장소가 더 좋아 보인다, 이에 힘을 내어 B 라는 장소에 가봤더니 또 다른 것이 보이더라,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그게 바로 방황하는 삶이다. 이에 진리를 찾는 한 방황하리라 하는 유명한 말도 있다. 독일의 괴테였나, 파우스트?

 

돌아가서 얘기이다.

 

 

어떻게 살아도 다 좋은 삶인 것을 

 

 

사실 어떻게 살아도 되는 인생이란 생각을 한다. 다만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고 자신과 남을 괴롭히는 삶만 아니라면 된다고 본다. 삶의 의미? 그건 젊었을 때의 생각이고 나이 들어보니 산다는 게 아무 것도 아니란 생각이 더 앞선다.

 

나 호호당이 살아온 69년, 긴 것 같기도 하고 순식간의 일인 것도 같다.

 

생각하는 아침이슬이 있다고 하자. 새벽녘에 응결되었다가 해가 뜨면 증발하거나 또는 풀잎에서 도르르 굴러서 땅으로 스민다. 길어야 서너 시간일 터인데 그 시간을 두고 아침 이슬은 길었다 여길까 너무 짧았다고 여길까?

 

찰나에 비하면 너무나도 긴 시간이요 영겁에 비하면 그야말로 덧없다. 그러니 나 호호당 또한 아무래도 생각하는 아침이슬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산다는 것은 정말 좋은 것

 

 

덧없는 삶,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삶의 의미? 그런 거 잘 모르겠다. 그런데 말이다. 산다는 게 정말로 좋다는 생각은 나이가 들수록 더 강해져간다. 삶에는 무수히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있고 또 소중한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번 글은 사실 다음 글을 풀어나가기 위한 자락깔기였다. 삶은 멋진 것이다. 다음 글에서 왜 그런가에 대해 얘기하겠다.

 

(8월 18일에 증시 스팟 강좌를 하기로 공지를 올렸다. 기존 수강생들은 하반기 흐름 점검을 겸해서 그간 배운 기법을 다듬는 기회가 될 것이고 그간 나 호호당의 기법이 궁금했던 분이라면 직접 확인함으로써 증시 투자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서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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