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일직선으로 흐르는 것은 과학 때문이다.
과학적 사고와 지식이 현대 사회의 주된 흐름으로 자리를 잡은 뒤부터 시간은 늘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를 두고 과학자들은 “시간의 화살”이라 부른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되돌아갈 순 없듯이 말이다. 따라서 시간 속에선 그 어떤 일도 되돌릴 수 없다, 非可逆(비가역)적이다.
과학이 주된 사조가 된 것은 1800년대 후반의 일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과학적 사고방식과 지식이 있었지만 主流(주류)는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 라고 말했던 1600년 당시만 해도 로마 가톨릭의 압력에 그만 고개를 숙였다. 당시만 해도 지식에 대한 유권 해석과 인정은 로마가톨릭의 손안에 있었다.
과학이란 단어는 영어의 science 를 옮긴 것인데, science 란 단어는 1833년에 만들어졌다. 그 이전에 “자연철학”이라 했다, 여러 철학 중에서 자연과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와 철학이란 뜻이다.
자연철학은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과 운동의 법칙을 밝힌 1687년 이후로 서서히 인정을 받았고 그러다가 1800년대 중반 다윈의 “진화론”이 인정을 받으면서 급격히 주된 사조로 자리를 잡았다. 진화론이야말로 “시간의 화살”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한 방이었고 그 이후 열역학 제2법칙에서 엔트로피란 개념이 등장하면서 확고부동해졌다.
이에 오늘날 종교적 주장이나 지식, 특히 신이나 영혼 등에 관한 것은 당사자에게 있어 (근거가 애매해진) 믿음의 영역일 뿐 합리적 사고나 지식이란 관점에선 이미 변두리로 밀려났다. 지식의 대표주자는 과학과 기술이고 우리의 경우 종교와 같은 뿌리를 가진 순수인문계를 나와선 삼성전자에 들어갈 수 없다.
(물론 종교는 적지 않은 신자들이 있기에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여전히 상당하다. 우리의 경우 대통령에 당선이 되면 찾아가서 인사를 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그렇기에 과학이 주가 되기 이전 시절에는 시간에 대해 실로 다양한 생각과 사조들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시간이 꼭 과거에서 현재, 미래, 이렇게 한 방향으로 흐른다고 생각했던 것만은 아니었다는 얘기이다.
시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아직 없다는 사실
이제 다시 기본으로 돌아오자.
물리학자들은 時空間(시공간)이라 해서 하나의 물리량으로 인정하고는 있으나 사실 시간이란 결국 사물의 변화를 인식하기 위한 하나의 개념이다. 따라서 시간에 대한 명확한 정의 자체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시간에 대해 과거로부터 무수한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이 다양한 주장을 펼쳤을 뿐 아니라 그 이전, 즉 非(비)문명 시절에도 다양한 해석과 생각이 존재했다.
시간에 대한 두 가지 관념
이처럼 다양한 사고와 생각들을 살펴보노라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앞에서와 같이 시간을 돌이킬 수 없는 일직선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을 순환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아예 시간을 인지하면서도 애써 무시하려는 생각도 상당했다.)
직선적 시간관은 원래 유대교와 기독교를 통해 만들어졌다는 사실
흥미로운 점은 직선적인 시간관이 비록 오늘날 과학시대에 있어 기본이 되었지만 사실 그건 과학적 사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고 더해서 인류 보편의 사고라기보다는 오히려 소수파의 생각이었다는 점이다. 그에 반해 순환적 시간관이야말로 훨씬 더 보편적인 사고방식이었다는 사실이다.
직선적 시간관의 출발점은 다시 말하지만 과학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 뿌리는 모세로부터 출발한 唯一神(유일신) 사상인 유대교의 엘리트들과 선지자들이 발전시킨 독특한 역사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5세기경 기독교 신학을 정립한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정립이 되었다. 다만 이 점에 대해 설명하려면 상당한 분량의 글을 준비해야 하겠기에 생략한다.
직선적 시간의 관념,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흘러가서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근원적인 불안과 불행을 안겨준다. 이에 기독교는 그 불안을 위로하기 위해 두 가지 장치를 만들어 놓았다. 엄밀히 말하면 직선적 시간관과 기독교의 교의는 불가분의 한 세트라 하겠다.
하나는 하나님을 경건하게 믿고 따르다가 죽으면 하나님 또는 예수님이 계시는 지복의 하늘나라 궁전에 가서 永生(영생)을 누린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눈앞의 힘든 현실과 고통의 역사가 언젠가는 끝날 것이란 기대였으니 바로 종말론이 그것이다. 그러나 종말론은 이제 기독교 자체에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만 그 영향력이 남아서 여전히 서양에선 역사의 終焉(종언)에 대한 기대가 남아있다는 점만 지적해둔다.
기독교 신앙이 흔들리자 불안이 되살아났으니
그런데 과학이 주류로 자리 잡으면서 직선적 시간관은 더욱 더 확고해졌으나 그를 만들어낸 기독교의 교의와 신앙은 변두리로 밀려났다. 그러자 즉시 문제가 불거졌다. 불안과 불행이 또 다시 되살아난 것이다.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일직선으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선 모든 것이 변하고 磨耗(마모)된다, 죽어서 지복의 하늘나라에 간다는 믿음이 흔들린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단 一回(일회)의 삶은 너무나도 허망해진다.
삶 전체만이 아니라 모든 순간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우리는 모든 순간과 매 순간마다 이별을 하고 있다. 굳은 言約(언약)을 했다 하더라도 시간 속에서 그 언약은 마모되고 부스러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일직선의 시간과 삶 속에선 그 어떤 期約(기약), 즉 날을 정하는 것 또한 불확실성으로 가득해진다. 흘러가면 그만인 시간인 까닭에.
당초 유대교의 선지자들과 엘리트들이 직선적인 시간관을 발전시킨 것은 눈앞의 시간과 역사가 당장은 의미가 없고 때론 고통스러울지언정 그 속엔 절대자인 神(신)의 의지가 담겨있다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런 관념은 중세 이후의 서구에서 과학적 정신과 인간의 理性(이성)에 점차 고개를 들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헤겔은 역사철학강의를 통해 역사를 主宰(주재)하는 이는 (신이 아니라) 절대이성이라고 말했다.
헤겔은 역사를 절대이성이 이끌고 있기에 늘 진보하지 않고 때론 퇴행하기도 하지만, 즉 正反合(정반합)의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 크게 보면 결국 앞으로 끊임없이 나아가서 마침내 지복의 세상이 구현될 것이라 위로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중요한 점은 절대자인 神(신)이 제2선으로 물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프리드리히 니체는 1882년 자신의 저서 “즐거운 학문”을 통해 신의 죽음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원문 번역을 보면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안식을 얻을 것인가?” 라고 묻고 있다.
신을 죽인 것은 물론 니체가 아니다,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과학 정신이 신을 죽였다. 그러자 불안이 서구 사람들을 엄습했다. 이에 프랑스 화가 폴 고갱은 1898년에 그림의 제목을 통해 다음과 같이 절규했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뿐만 아니라 도스토옙스키는 1879년에 초판이 나온 “카라마조프의 형제” 속에서 철저한 무신론자이자 합리주의자인 차남 이반의 입을 빌려 “신만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고 토로하고 있다.
기독교 신앙의 상실은 근대 서구인들에게 삶의 근원적인 불안과 불행을 유발했던 것이다.
직선적인 시간 속에선 모든 것이 허무해진다
정말로 그렇다. 직선적인 시간 속에선 그 무엇도 되돌릴 수 없다. 그리고 눈앞의 현실은 예측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고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 구체적으로 실례를 들면 중년이 되어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아, 그때 공부 좀 열심히 할 것을 하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는 諦念(체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一回(일회)성의 삶이라 여길 것 같으면 모든 善(선)과 도덕률의 바탕이 무너진다. 어차피 한 번 살 거, 즐기고 누리면 그만 아닌가 말이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짓밟는다 해도 무슨 상관! 쾌락주의와 물질주의가 만연할 수밖에.
19세기 중반부터 과학의 발전과 그를 바탕으로 생겨난 기술의 엄청난 진보는 분명 인류에게 엄청난 물질적 풍요와 함께 긴 수명을 가져다주었다,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은 신을 대체했고 극적으로 말하면 신을 죽였다.
원래 하나의 세트였던 생각, 직선적 시간관과 그로부터 야기되는 근원적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기독교적 신앙이 분리되자 서구인들 그리고 그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모든 현대인들에게 또 다시 원초적인 불안이 엄습해온 것이다.
모든 것이 一回(일회)성이고 되풀이되지 않으며 머물지 않고 흐르고 또 흘러서 어디로 갈 것인지, 어디에 가 닿을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 이게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근원적인 불행이라 나 호호당은 여긴다.
이미 현대 사회는 기독교적 신앙으로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는 것이 나 호호당의 생각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교회와 성당이 많지만 그 출처인 서구사회, 특히 개신교권의 나라들에선 이미 무력해지고 말았다. 다만 글로벌 강자 미국이 아직 개신교적 전통이 강한 탓에 착시효과를 낳고 있을 뿐이다.
다음 글에선 시간에 대한 또 다른 관념인 순환적 시간관에 대해 얘기함으로써 오늘날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순환적 시간관이야말로 나 호호당이 발견해낸 자연순환운명학의 바탕이자 초석인 까닭이다.
최근 들어선 적절한 분량에 딱 떨어지는 흥미 위주의 글보다 자꾸만 생각 좀 해야 하는 주제들에 관심이 가니 혹시나 독자들 머리 아프게 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양해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의 월드컵은 끝이 났으니
어제로서 우리의 월드컵은 끝이 났다. 16강에 올랐으니 성공했다고 여긴다. 새벽에 8강전을 보노라니 체력 다 빠진 우리 팀에게서 전반에 무려 4점이나 뽑은 브라질 선수들이 비즈니스 접대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잠도 자면서 제3자적인 시각에서 강호들의 플레이를 감상해야 하겠다. 그냥 즐거운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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