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객으로 북적대는 여수



어쩌다 좋은 인연이 생겨서 엑스포가 있었던 2012년부터 해마다 한 두 번씩 2박3일 일정으로 여수를 다녀오고 있다. 가게 되면 으레 그곳 지인의 돌산 평사리 별장에 머물곤 한다. 별장에서 내려다보이는 가막만은 섬과 반도로 둘러싸였기에 풍랑이 드물다. 밤이면 졸고 있거나 잠든 것 같은 가막만, 가막가막하고 가물가물한 그 모습이 그 이름과 잘도 어울린다. 


이번 여수행은 전과는 달리 약간의 변화가 있었으니 지인이 작년에 오픈한 ‘여수살롱’이란 복합문화공간에서 여수와 대한민국의 미래로 제목으로 2시간 여 동안 특별강연을 했다. 40여 분들이 오셨는데 다행스럽게도 모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주셨다. 


금요일 오후 여수 엑스포역에 내렸더니 기온이 서울보다 몇 도는 높아서 마치 4월 하순의 날씨 같았는데 둘러보니 수많은 관광객들이 카트를 끌고 바깥으로 나가고 있었다. 마중 나온 지인이 여수 시내가 북적대고 있다는 얘기와 함께 엑스포와 함께 고속철이 들어선 이래 해마다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여수로선 당연히 희소식, 하지만 나로선 여수 오는 것도 앞으론 성수기를 피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교통 정체로 해서 흥국사에 들렀으니



그 바람에 여수 돌산 별장은 심한 정체로 해서 늦은 밤 시각에 들어가야 했고, 다음 날에도 돌산 끄트머리의 향일암이나 바닷가 쪽은 피하기로 했다. 그래서 아예 시내로 들어가서 북쪽의 여수산업단지 방면에 있는 흥국사를 가보기로 했다. 


떠나기 전 혹시나 해서 흥국사에 관해 검색해보았다. 그간 여러 차례 다녀오는 과정에서 가볼만한 곳은 대충 훑은 터였기 때문이다. 그간 살아오면서 많은 국내 절을 가보았다. 여수 향일암도 몇 차례 갔었으나 여수 흥국사 얘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으레 아담한 절일 줄 알았다. 


그저 임진왜란 당시 흥국사 스님들이 수군이 되어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웠고 또 많은 분들이 전사했다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었기에 호국영령들이 잠들어있는 흥국사에 찾아가 절을 올리면 호국 귀신들께서 그래도 즐거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흥국사가 자리 잡은 영취산의 진달래가 대단하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있었기에 절 입구에 도착하자 나는 절보다는 영취산 산등성이를 먼저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흥국사는 묵은 古刹(고찰)일 뿐 아니라 巨刹(거찰)이었다. 



정갈한 호남지역의 사찰



전라도의 절은 느낌이 경상도 절과는 많이 다르다. 경상도나 강원도의 절은 신도가 많아서 재정이 풍부하고 그 바람에 경내 장식도 다소 과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물론 세월의 흔적은 그만큼 지워지기 마련이다. 반면 기독교 신자가 많은 전라도의 절은 재정이 시원치 않은 탓에 비유컨대 빈티지, 오랜 풍상의 흔적이 역력하다. 


낡았으나 깨끗하면 정갈한 인상을 주기 마련인데 전라도의 고찰들이 바로 그렇다. 금박이 번쩍번쩍한 것보다 금박이 벗겨진 모습이 더 좋다. 오랜 聖地(성지) 같아서 말이다. 



격식을 다 갖춘 고찰이자 거찰, 흥국사



흥국사 역시 고찰의 느낌을 물씬 풍겼다. 그리고 아주 큰 절, 뜻밖이었다. 뿐만 아니라 절이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를 고루 지니고 있었다. 


일주문을 지나니 영취산 양쪽 봉오리에서 내려오는 두 줄기 개천 위로 석교가 놓여 있었다. 다리 앞까진 사바세계이고 다리 위를 지나면 번뇌와 고통이 없는 저편, 즉 到彼岸(피안)이다. 큰 절 중에도 개천이 없는 절도 적지 않다. 그런 면에서 흥국사는 일단 격식을 갖춘 셈이다. 



늘 흥미로운 사천왕님들



개천을 건너 저편 세계로 들어서니 네 분의 天王(천왕)이 지키는 천왕문이 있었다. 제석천의 휘하에 속하는 네 명의 신들로서 수미산 중턱에 있다고 하니 나 역시 수미산 중턱까지 오른 셈이다. 만일 내가 魔鬼(마귀)라면 이 분들에게 즉각 들켜서 끝장일 것이다. 


사대천왕 중에서 나 호호당이 제일 좋아하는 분은 광목천왕이다. 廣目(광목), 아주 큰 눈이란 뜻이다. 엄청나게 크고 밝은 눈으로 서방세계의 모든 일들을 샅샅이 관찰하고 판단한다. 잘못된 일이 있으면 즉각 창을 날려서 퇴치를 한다. 


내가 광목천왕에 흥취를 느끼는 것은 광목천왕의 탐지능력이 마치 미국 이지스 구축함의 3차원 고정밀 레이다와 방어시스템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참고로 조금 더 애기하면 이지스는 그리스어로 아이기스(Aegis), 아테네 여신이 들고 다니는 방패를 말한다. 무엇이든 이 방패로 방어할 수 있고 또 방패를 흔들면 폭풍이 일어서 상대를 물리칠 수 있는 무기이다. 그 바람에 미국은 미사일 구축함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多聞天王(다문천왕)도 흥미롭다. 多聞(다문)은 많이 듣는다는 뜻이니 세상 속 모든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말, 따라서 미국의 국가안보국(NSA), 엄청난 양의 해외 통신과 해외 신호 정보, 물론 암호화된 통신까지도 해독 분석 종합하는 거대한 조직을 연상시키는 탓이다. 


절에 들를 때마다 사천왕 목조상은 반드시 카메라로 찍어온다. 표정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린 시절 외할머니를 따라서 동래 범어사에 갔을 땐 사천왕님들이 정말 무섭게만 여겨졌었다. 아마도 외할머니가 어린 손자에게 만일 못된 짓을 하면 너 이분들에게 큰 벌을 받게 될 거라고 겁을 주었던 모양이다. 


개천 다리를 지나 피안에 도달했어도 사실 사천왕문이란 문을 무사히 통과해야만 제대로 극락세계로 들어선다는 점에서 사천왕문은 일종의 입국심사대인 셈이다. 뭐 신고할 것은 없습니까? 네, 없습니다.

 

천왕문을 지났으니 이제 나도 극락세계의 어엿한 방문객이 되었다. 


그 다음 나를 맞이한 것은 봉황루, 대개 저런 누각은 위의 다락방은 스님들이 공부하는 강원이고 밑으로는 신도나 방문객이 통과하는 문 역할을 하는 법인데 아쉽게도 아래가 막혀있었다. 할 수 없이 옆으로 돌아서 올라가야 했다. 


왜 막았을까? 궁금했다. 그러자 영주 부석사의 안양루가 생각났다. 문루에 올라서면 양쪽으로 태백과 소백의 산자락을 한눈에 볼 수 최고의 전망대이건만 말이다. 


그런데 대웅전 마당에 들어서기 직전에 또 하나의 문이 있었다. 제법 특이했다. 이름은 法王門(법왕문)이었는데 그로서 또 하나의 경계를 짓고 있었다. 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바닷가의 특징을 살린 흥국사 대웅전



그러고 나서 대웅전이었는데 정말 특이했다. 일반 사찰의 대웅전과는 많이 달랐다. 대웅전을 받치고 있는 기단석에 새겨진 동물들이 용과 거북은 물론이고 바다의 게도 있었으니 여수 바다의 해물 냄새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모양도 대단히 해학적이어서 한참을 살펴보며 웃음을 지었다. 뿐만 아니라 마당의 石燈(석등)도 국내 일반 사찰의 그것과는 모양이 많이 틀렸다. 따라서 흥국사는 대단히 이채로운 절이라 하겠다. 



의도와는 달리 많은 절과 거액의 시주



최근 허리가 불편해진 나는 당초 작은 절이라 여기고 절 몇 번 하는 정도는 큰 부담이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많은 전각들이 있어 가는 곳마다 세 번 씩만 절을 올려도 무려 수십 번에 걸쳐 절을 해야 했다. 


특히 어느 전각에선가 여수 순천 출신으로서 후백제 견훤이 거병할 때 오른팔 역할을 했던 김총 장군의 神位(신위)와도 만났다. 김총이 누군가, 여전히 여수 순천 일대의 성황신이 아닌가, 이 지역 귀신들 중에선 최고 실세 귀신일 것이니 절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복전함에 넣은 돈도 당초 예상을 넘었다. 천원 짜리 지폐 몇 장, 오천원 지폐 한 장, 만원권 몇 장이 있었는데 전각이 많아서 홀라당 다 넣고 나왔다. 4만원인가 했는데 나중에 따져보니 무려 6만3천원이나 시주했음을 알았다. 여태껏 복전함에 넣은 액수로는 최고 액수였다. 그날 흥국사 일반 시주 중에선 최고 VIP가 아니었을까 싶다. 스님을 모시고 밥 한 끼 대접한 셈 치기로 했다. 



확실하게 빽을 써놓았기에



우연히 들렀다가 절도 많이 올리고 돈도 넉넉히 넣어드렸다. 흥국사 부도밭에 계신 여러 큰 스님의 영령들, 전사한 호국승군의 영령들, 그리고 김총 장군 귀신께서 두루 기뻐하실 것은 당연한 노릇, 그러니 장차 여수에 올 때 나 호호당을 해코지할 어둠의 세력은 원천봉쇄당한 셈이다. 


뭐니 해도 신앙 중에 신앙은 기복신앙인 아닌가 싶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려운 신학이나 교리와 같이 철학 비스무리한 것은 괜한 것이 아닐까 여긴다. 


관세음 누님이 계시는 원통전 앞의 감로수 샘물을 마신 것을 끝으로 천천히 돌아서 나오다가 일주문을 지난 뒤 돌아서서 마지막으로 합장했다. 


그러면서 말씀을 올렸다. 그동안 제자 무지한 탓으로 향일암에만 들렀습니다, 이제 알았으니 다음엔 흥국사에도 반드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러니 여러 조사 영령들과 전사하신 승군 귀신님들, 또 김총 성황신께선 팍팍 살펴주시길 바라옵니다. 



사이비신자 호호당



고백하자면 나 호호당은 사이비 신자이다. 절에 가면 부처님 신도이고 성당에 가면 가톨릭 신자, 교회에 가면 개신교 신자, 그리고 전에 실크로드의 이슬람 모스크에 갔을 땐 무슬림이었다. 또 여러 명산대천에 가면 그곳의 산신과 河伯(하백)의 제자이며 唐木(당목) 앞에선 신령을 믿는다. 그런가 하면 평소엔 無敎(무교)란 점에서 참으로 사이비 신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