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날의 즐거운 산책

 

 

싱그럽다는 말은 이맘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 같다. 하늘은 맑고 푸른데, 바람마저 시원하다. 새 잎사귀와 새 풀이 도처에 널렸고 걷다 보면 어디선가 흘러온 라일락 향기가 콧속으로 들어와 상큼하다.

 

오후 시간 상담 한 건을 마무리한 뒤 5시 무렵 작업실을 나섰다. 내게 있어 외출이란 결국 300미터 떨어진 인근의 교보문고를 찾는 일이다. 책 구경을 하려면 체력이 필요하니 우선은 길 건너편의 버거킹에 들러 와퍼 세트를 먹었다. 마침 제자가 선물한 교보문고 현금카드도 쓸 겸 일주일 사이에 새로 나온 책들도 만날 겸 해서였다.

 

햄버거를 먹고 나와서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옆의 젊은 처녀가 최대한의 미백 화장을 하고 진한 속눈썹을 붙인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최대한 鼻音(비음)을 섞어가며 귀여움을 부리고 있었다. 아이고, 저 귀여운 철딱서니.

 

 

서울 강남 거리의 특별한 즐거움

 

 

이처럼 서울 강남의 거리를 걷는 일은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젊은 여성들의 잘 차려입은 모습을 즐기는 일이 그것이다. 세련된 차림과 화장의 젊고 싱싱한 아가씨들 사이로 걸어가는 일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우리나라 젊은 여성들, 특히 서울 강남의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면 극도의 세련미를 느끼게 된다. 또 그럴 때면 내게도 저처럼 귀엽고 발랄한 딸이 하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도 느낀다.

 

나 호호당은 화가의 눈을 가졌다. 늘 사물을 관찰하고 또 종이 위에 묘사하는 훈련을 해왔기에 여성들의 치장한 모습도 즐기는 한편 그 밑에 가려진 몸매까지 고스란히 읽어낼 수 있다. 그러다 보면 가끔 피식- 웃곤 한다. 가령 어떤 아가씨가 약간 처진 엉덩이 라인을 제대로 카버하지 못했을 때 말이다.

 

때론 심한 노출 때문에 보는 내가 거북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매력을 최대한 뽐내려는 그 자신감에 대해 기꺼이 칭찬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어차피 삶은 순간의 연속, 그러니 좋아, 홧팅!

 

혹시나 해서 얘기인데, 나 호호당이 그녀들을 바라보는 시간은 지극히 짧다. 젊은 시절이라면 당연히 은밀한 욕망도 일었겠지만 이젠 그렇지가 않다. 그냥 그 싱싱한 젊음을 즐긴다.

 

그런 까닭에 상대가 거북스럽게 여길 눈빛으로 쳐다보는 법은 없다. 한 여성에 대한 내 눈길이 0.3초 이상 머무는 법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시간이면 얼굴은 물론이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의 전체 실루엣, 심지어는 때론 그녀들의 영혼마저 느낄 수 있다.

 

책을 몇 권 산 뒤 다시 작업실로 돌아오기까지 지나쳤던 젊은 여성들의 모습들이 글을 쓰다 보니 차례로 떠오른다. 쾌청한 하늘 밑 저녁노을 빛에 환하게 빛나는 모습들이 내 눈에 지금 담겨있다.

 

 

 

브레송의 결정적인 순간들!

 

 

이런 말을 하고 나니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생각난다. 일상의 모습과 이미지가 담고 있는 그 순간의 리얼리티를 포착해낸 자신의 사진에 대해 ‘결정적 순간’이란 표현을 했던 프랑스의 사진작가 말이다.

 

5월 초의 맑은 하늘 아래 저녁노을을 받아 빛나는 저 여성들의 모습, 내 눈에 포착된 저 눈부신 이미지들이야말로 과연 그렇지 않겠는가 싶다.

 

 

서점 매대에서의 흥정

 

 

교보문고 매장으로 말머리를 돌린다.

 

입맛을 부추기는 책이 오늘 역시도 열댓 권 가량이었다. 책갈피를 들추면서 잠시 본문을 읽어보다가 일단은 자리에 그냥 놓고 다시 자리를 옮긴다. 두어 달 전부터 망설이던 책 중에 하나인 “팩트풀니스”를 오늘은 사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무역의 세계사”란 책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살펴보니 예전에 참으로 즐겁게 읽었던 “부의 탄생”이란 책을 쓴 그 사람, 바로 윌리엄 번스타인이었다.

 

부의 탄생을 읽은 뒤의 소감은 지극히 단순하고 명백하다, 이유를 모를지라도 돈이 지속적으로 밀려드는 곳이면 그곳에 성장이 생겨나고 부가 창출된다는 얘기. 도덕이나 윤리, 정당성 같은 것을 떠나 부는 그렇게 창출된다는 얘기였다. 감명 깊게 읽은 책이다.

 

그러니 무역의 세계사도 사야 하겠네 하는 생각을 했다. 이에 영문 제목을 보니 ‘A Splendid Exchange’, 이에 아, 이 책이구나, 국내 번역되면 좋을 터인데 하는 생각을 했던 바로 그 책.

 

그런데 가격을 보니 31,500원, 더 문제는 하드카버 책이니 들고 가려면 무겁겠다는 생각에 일단은 나중에 사기로 결정을 했다. (나 호호당은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는 일이 거의 없다. 매장에서 마음에 들면 사서 들고 온다.)

 

다시 옆을 보니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란 묵직한 그러나 매력적인 주제의 책이 놓여있었다. 이 방면에 관해 적지 않은 책을 읽긴 했으나 새로운 시각과 연구를 담고 있는 것 같아서 구미가 당겼지만 역시 책의 부피와 무게 때문에 다음 기회로 넘겼다.

 

다시 눈을 돌리니 순간 나를 의아하게 만든 책이 있었다. “당신도 피카소 그림을 살 수 있다”, 이런 제목. 저게 뭐지? 싶어 제목 밑에 달린 부제를 보니 ‘4차산업 혁명시대, 블록체인과 인문경영’이었다. 순간 이해가 갔다, 피카소 그림의 지분을 살 수도 있는 공유경제, 뭐 이런 얘기이구나 싶었다. 책을 내려놓으면서 그래 많이들 사시구려, 했다.

 

한 시간 여 매장을 돌아다닌 끝에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 한 권, 교고쿠 나쓰히코의 “후 항설백물어(하)”, 일본 경제에 관한 책 한 권, 앞서 말한 “팩트풀니스”, 이렇게 네 권의 책을 산 뒤 돌아 나왔다.

 

 

분수 물방울 속에서 빛나고 있는 여름

 

 

좌골신경통이 있는 몸인지라 계단을 오를 때 살금살금 올라야 했다. 서쪽 하늘의 눈부신 역광이 내 눈 속으로 파고 들었고 또 옆으로 흘러내리는 계단식 분수의 물과 부딪쳐 빛났다. 교보문고 입구 계단에 분수물이 소리 내어 활기차게 흐르면 계절은 여름이다.

 

오늘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초여름이 왔고 얼마 후면 더위가 닥쳐오겠지. 그러다가 선선한 가을이 올 것이고 겨울이 오면 어느덧 한 해를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하리라.

 

이런 식의 되풀이, 즉 해의 순환을 이젠 어언 예순 네 번째 겪고 있으니 시간과 세월은 잘도 흐른다. 탄력 넘치던 몸뚱이도 어느덧 허리 디스크가 파열되고 신경섬유에 염증이 생겨서 다리를 절뚝거릴 지경에 이르렀으니 거 참! 그저 어서 나아야지 하는 마음뿐이다.

 

 

삶의 결정적인 하루를 보내면서

 

 

오늘은 늦은 오후 무렵의 햇빛과 푸른 하늘을 즐겼고 그를 기억 속에 담았으니 하루의 수확은 풍성하다. 게다가 서울 강남의 초여름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 처녀들의 모습, 내겐 그들이 마치 바닷속을 힘차게 헤엄쳐가는 등푸른 생선들과도 같았다, 그 역시 듬뿍 눈에 담았으니 더더욱 좋은 날이다. 더불어 늦은 밤 잠자리에 누워 새 책들과 대화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다. 다시 말하면 오늘은 삶에 있어 또 하나의 ‘결정적인 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