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안 랩소디, 마마!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시청했다. 평소 극장에 가는 것을 성가셔 하는 탓에 그냥 흘려보냈는데 좋구나 싶었다.

 

보고 난 소감, 삶의 진지한 모습을 다루는 영화는 늘 애잔하고 애처롭다. 어쩌다가 게이가 된 바람에 에이즈로 죽은 프레디 머큐리, 하지만 대중 스타다운 죽음 같기도 하다. 게이나 양성애자, 골치 아픈 문제인데 아들에게 물었더니 유전적 소양보다 전립선 쾌감에 맛을 들이면 게이가 된다는 설이 최근 학설이라 한다.

 

프레디 머큐리의 생년월일을 검색해보았더니 1946년 9월 5일로 나온다. 태어난 시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는데 아침 5시 10분설이 가장 유력하다. 출생지가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앞바다 인도양에 위치한 잔지바르에서 태어났으니 표준시와 진태양시의 오차가 대략 24분 정도. 이에 아침 5시 10분에서 24분을 빼면 4시 46분 즉 寅(인)시라 볼 수 있다.

 

사주는 丙戌(병술)년 丙申(병신)월 壬午(임오)일 壬寅(임인)시가 되고 이에 60년 순환에 있어 입춘 바닥은 1932년과 1992년 壬申(임신)이 된다. 반대로 운기의 절정인 입추는 1962 壬寅(임인)년이다.

 

실제 그가 죽은 것이 입춘 바닥 직전 해인 1991년 11월 24일이니 앞의 사주 분석은 나름 신뢰가 간다.

 

그가 에이즈에 걸린 것은 1987년이라 하니 바닥 5년 전의 일이다. 운세가 한창 하강하고 있을 때였던 것이다.

 

그가 퀸이란 밴드를 결성한 때는 1970년이었으니 운세 상으로 秋分(추분)의 때였다. 이 무렵이면 사람의 재능이 빛을 발하는 때인데 마침 그 해 본격 활동을 시작했으니 시작하자마자 무난하게 성공 가도를 걸었다.

 

그가 남긴 대표작은 단연코 1975년에 발표한 싱글 음반인 “보헤미안 랩소디”였다. 이로서 세계적인 그룹, 요즘 시쳇말로 ‘월클’에 올랐다. 운세 상으로도 1975년은 한 해의 계절로 치면 10월 하순의 수확을 보는 때, 이를 나는 霜降(상강) 재운이라 부른다. 사실 그 노래가 프레디 머큐리 음악의 절정이었다.

 

노래는 그저 마마! 하는 소리만 귓전에 쟁쟁하다. 그저 애처롭다는 생각만 든다.

 

 

나 호호당은 스스로 사람이 아니라 오래된 정령이란 착각에 빠지곤 한다.  

 

 

오랜 세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팔자를 통해 운명을 추리하고 앞일에 대해 상담도 하고 자문도 해주다 보니 나 호호당 자신은 이제 보통의 사람과는 약간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이에 경험 또한 그 사람의 생에 일어난 일들을 기초로 한다. 남의 경험에 대해 들을 때도 있겠지만 그건 체험이 아니다.

 

그런데 나 호호당은 남의 경험이긴 하지만 수없이 많이 들었다. 게다가 속의 내밀한 얘기와 고뇌, 걱정, 털어놓기 힘든 경험들을 무수히 들었고 지금도 듣고 있다. 그러다 보면 감정이입도 될 때도 많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통해 그 사람의 운명이 전개되는 시간표를 알고 있기에 그런 요소들이 훗날 그 사람에게 있어 어떤 영향을 가져올 지에 대해서도 짐작이 간다.

 

그러다 보니 가끔씩 나 호호당은 그 많은 사람들의 생애가 마치 나 호호당이 윤회와 전생을 거쳐 오면서 과거생에 체험했던 나 호호당의 삶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나 호호당 스스로가 마치 수만 번의 생을 살아온 사람처럼 느껴진다. 내 스스로 너무나도 오래 살아온 精靈(정령)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현재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인간이면서도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착각, 또는 반지의 제왕 속에 나오는 나무정령인 ‘엔트’와도 같은 느낌,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숱한 일들과 사람들의 일을 지켜본 그 나무정령 말이다.

 

 

현실을 살아가기 보다 추억의 삶이 더 많아졌으니 

 

 

게다가 나이마저 이젠 예순 일곱이 되다 보니 개인적으로 체험한 세상일도 결코 만만치가 않다.

 

어려서 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김영삼 대통령의 쇳소리, 김대중 대통령의 전라도 사투리가 섞인 특유의 빠른 어조, 김종필 총리의 어눌한 듯 느긋한 충청도 억양, 노무현 대통령의 열정적인 목소리, 이명박 대통령의 쉰 목소리, 박근혜 대통령의 부드러우면서도 결단이 가득한 음성, 구강 구조로 인해 공기가 빠지는 문재인 대통령의 음성,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정치인들의 개성에 가득한 저마다의 목소리 들이 일순에 귓전에 울려오고 그 모습들이 내 눈앞을 스쳐간다.

 

젊은 날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런저런 음성과 야단치는 목소리, 개인적으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와 얼굴 표정,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들의 정겨운 목소리와 표정의 다양한 뉘앙스, 극진히 사랑했던 먼저 간 강아지의 쾌활한 울음소리와 미소, 죽기 직전의 그 이별을 고하는 표정 등등 수많은 표정과 소리가 일순에 지나간다.

 

거기에 더하여 평생 즐겨 읽어온 많은 나라와 대륙들의 역사와 인물들의 스토리들이 더해져서 늦은 밤 시간 글을 쓰거나 사색에 빠지거나 책을 읽다가 문득 문득 과연 나는 사람인가 정령인가에 대해 헷갈리게 된다.

 

 

부러운 이도 없고 밑으로 보는 이도 없어졌으니 

 

 

그러다 보니 또 한 가지 생겨난 것이 있으니 이 세상에 그 어떤 이도 부러워하거나 밑으로 보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점도 있다. 사람 중에는 천재도 있고 부자도 있으며 능력이 뛰어난 이들도 많다. 물론 그 반대는 더 많다. 그런데 천재도 부럽지가 않고 부자도 부럽지가 않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그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동시에 나 호호당이 밑으로 내려보거나 한심하다 여기는 사람 또한 없다. 정확히 말하면 없어졌다. 예전에 있었는데 말이다.

 

그저 저마다의 삶이 있을 뿐이란 생각, 그리고 어떤 누구의 삶도 좀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노라면 그저 애처롭다는 생각만 든다. 혹시나 해서 얘기인데,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나 호호당의 인격이 세월 속에서 수양이 되고 도야가 되었다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란 점 알아주시기 바란다.

 

그냥 부러운 사람도 없어졌고 나보다 못하다 싶은 사람도 없어졌다.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나 호호당의 눈엔 모든 사람이 애처로울 뿐이다. 저 노래 기막히게 부르던 프레디 머큐리의 삶 또한 그저 애처로울 뿐이다.

 

이 세상 사람들을 보라, 잘 났건 못 났건 저마다 얼마나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가, 자신이 세상에 있어야 할 이유와 근거를 만들어보고자 얼마나 안간힘을 쓰는가 말이다. 그러니 애처롭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그렇다.

 

돈 많은 사람들의 삶도 잘난 사람의 삶도 알고 보면 다 거기에서 거기, 정말이지 오십 보 백 보, 그러니 특별할 것은 하나도 없다는 점, 저마다 갖고 있는 모자란 점으로 해서 열등감을 얼싸안고 몸부림친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기에 누구나 그렇다.

 

 

예로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삶을 들여다 볼 것 같으면 

 

 

연예인, 빛나는 영광만큼이나 힘들고 애처로운 사람들이다. 연예인의 길을 시작하면 마땅히 대중의 스타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게다가 스타로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마냥 행복한 것 또한 아니다.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애로와 장애가 있다는 점이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예를 들어본다.

 

미국만 아니라 전 세계를 매료시켰고 지금도 여전히 전설이다. 위대한 비틀스의 멤버인 존 레논이나 폴 메카트니 역시 그를 마음의 스승으로 받아들였을 정도였다. 그처럼 대단한 그가 세상을 떠난 나이는 겨우 42세였다. 거의 요절했다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11세부터 노래를 시작해서 30년간 노래하다가 1977년에 죽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마약이나 무분별한 술 담배 등과는 전혀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다시 말해서 대중 스타답게 마약 중독이나 에이즈 같은 것으로 죽지 않았다. 원인은 참으로 뜻밖이다. ‘똥독’에 중독이 되어 죽었다. 똥을 제대로 싸지 못해서 죽었다.

 

연예인의 문제는 인기가 없으면 갈 데가 없다는 점이고 인기가 생겨서 바빠지면 정말이지 대소변을 편히 볼 시간마저 없다. 투어 콘서트를 하다 보면 생체 리듬이 무너지고 무대에서의 긴장 때문에 또 그렇다. 며칠 변을 보지 못할 때도 많다. 그러다 보면 변비가 되고 이에 설사약을 먹어 강제로 해결하기도 한다.

 

(작년 미스터 트롯 프로그램 예선에서 어떤 가수는 목을 풀기 위해 계속 물을 마시다가 정작 노래할 시간이 되자 방광이 차서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탈락했던 일이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변비와 설사를 반복하다가 결국 대장기능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그가 죽은 뒤 부검을 했더니 똥이 대량으로 검출되었고 대장은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져 있었으며 똥독으로 인해 심하게 부어있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운세는 1974 甲寅(갑인)년이 입춘 바닥이었는데 그 직전인 1973년 하와이에서 자선공연을 했다. “알로하 프롬 하와이”가 그것이다. 나 호호당이 보기에 그건 팬들에 대한 그의 마지막 서비스였다.

 

그런 이후 1975년경부터는 대변을 거의 보지 못해 심하게 고통 받았고 1977년에 사망했다.

 

하지만 그는 대중 스타답게 죽은 뒤에도 사인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최고의 스타가 똥을 싸지 못해서 죽다니! 하는 말을 듣기 싫었던 모양이기도 하고 비즈니스에 연관된 사람들이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그가 사망한 것은 1977년이었지만 정확한 원인을 밝힌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모든 생명이 그저 애처롭다. 

 

 

태어난 자에게 세상은 한 번 살아보는 마당과도 같은 곳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하기에 삶은 즐거움과 아울러 고통으로 가득하다. 그러니 숨 쉬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 생명들이 내 눈엔 그저 애처롭다.

 

(한동안 생각에 빠져 글을 자주 올리지 못했는데 최근에 올리는 글들이 그런 사색의 편린들이라 하겠다.)

 

새 봄의 첫날이 꽤나 터프하구나! 

 

 

오늘은 雨水(우수),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봄의 첫날이다. 그런데 아침 기온이 무려 영하 10도나 된다고 봄의 첫 날이 꽤나 터프하다.

 

우수로서 하늘과 땅이 맹렬하게 움직이면서 새 해를 열어간다. 그런데 하늘과 땅이 움직인다는 것은 무슨 말이며 새 해를 열어 간다는 말은 또 무슨 의미일까?

 

 

하늘과 땅이 맹렬히 움직이다는 말의 의미

 

 

간략하게 설명 좀 해드린다.

 

날은 비록 춥지만 땅속은 이미 녹기 시작해서 물이 위로 오른다. 땅속 온도가 오르니 겨우내 얼었던 땅속의 물이 서서히 위로 올라온다, 이를 두고 地氣(지기)가 상승한다고 말한다. 우수는 해가 가장 짧은 12월 20일 경의 동지로부터 60일 정도 지난 때, 일조시간도 많이 길어졌다. 이를 일러 天氣(천기)가 下降(하강)한다는 표현을 한다.

 

天氣(천기)가 내려오고 地氣(지기)는 오르기 시작한다. 이를 현대 과학적인 용어로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동지로부터 해가 길어지지만 땅은 계속 식어간다. 해가 길어지면 땅도 따듯해져야 할 터인데 옛 사람들은 도무지 이런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해가 길어지는데 땅은 왜 더 식어가서 추워지지? 하는 궁금증이었다.

 

현대 과학은 이 현상을 대단히 쉽게 설명을 한다. 햇빛, 光子(광자)가 날아와 땅에 닿으면 그 즉시 땅이 데워지는 것이 아니라 時差(시차)가 존재한다. 이에 지속적으로 햇빛 알갱이 광자, 보다 정확하게는 전자파의 하나인 적외선이 날아들면 마침내 식어가던 땅의 온도가 상승하기 시작한다. 이를 輻射熱(복사열), 영어로 radiant heat 라고 한다.

 

그러면 땅속에서 얼음 알갱이로 있던 물이 녹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지표면의 건조한 공기는 지표 아래의 물을 흡수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이 연이어 지속되는 현상, 땅속에선 물이 녹아서 위로 올라오고 그러면 공기 중으로 다시 상승한다. 이게 본격화되면 봄날 아지랑이 현상이 생겨난다.

 

우수로서 물이 땅속에서 지표로 오르고 다시 대기 속으로 상승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천지의 준동은 모든 생명들의 준동을 유발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이 하늘과 땅의 순환에 맞춰 진화해왔기에 당연하다.

 

 

생명은 따뜻하고 윤기가 나고 말랑하다. 

 

 

바깥에 나가보면 나뭇가지도 메말라 있고 덤불의 이런저런 풀들도 말라있다. 거의 바싹 마른 미라(mirra) 상태이다. 하지만 우수가 지나면 겉으로 바싹 말라있는 것 같아도 정작 만져보면 확연히 다르다. 뻣뻣하지가 않고 낭창댄다.

 

왜 낭창댈까? 하면 뿌리로부터 물이 위로 올라와 가지 끝까지 도달했기에 유연해지는 것이다. 이미 생명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유연하다, 말랑하다, 뻣뻣하지가 않다. 반대로 죽어가는 것은 마르고 뻣뻣해진다.

 

물이 올라서 표면이 반짝거리는 것을 두고 우리는 潤氣(윤기)가 난다고 한다. 죽어가는 것은 윤기가 적어지고 빠진다, 죽고 나면 윤기가 없다. 여성들이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기름 성분이 포함된 보습제를 바르는 까닭?, 간단하다, 아직 젊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살아있는 것은 모두 熱氣(열기)가 있다. 따뜻하다. 손발이 차가워지면 죽어가는 것이다. 나 호호당 역시 중년의 나이까진 손발이 겨울에도 따끈따끈했다, 그런데 예순이 넘어가면서 이젠 그렇지가 않다, 겨울엔 손이 시리다.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열과 수분이 오르고 열과 수분이 속에서 남으면 바깥으로 나온다, 그런 자는 말랑하고 따뜻하고 윤기가 난다. 그게 생명이고 살아있음이다.

 

다시 돌아가서 얘기이다. 우수로서 해는 더 길어지고 땅도 녹는다. 그러니 지금은 북한 땅인 청천강 물도 해빙이 되어 흐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땅속에서 위로 물이 오른다. 물이 오르면 윤기가 생겨난다. 모든 생명들이 활기를 띈다. 풀과 나무는 땅속에서 잔뿌리를 내밀어 물을 빨아올리고 위로 올리니 잔가지 끝까지 말랑해진다. 겨울잠을 자던 동물들은 기지개를 켜고 사람 역시 심장 박동이 올라가면서 활동이 왕성해진다.

 

 

우수, 하늘과 땅 그리고 생명이 준동하는 날

 

 

이를 두고 모든 생명을 포함해서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이 준동하다고 하는 것이다. 얼마나 간결한 축약인가! 시적이고 상징적이며 아름답지 않은가! 또 이제 비로소 생명이 꿈틀대고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그들이 새 해를 열어젖힌다.

 

우수는 입춘과 경칩 사이에 놓인 中氣(중기)이다. 오늘은 우수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만 24 절기 모두가 저마다 나름의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한 해의 순환을 나타내는 24절기, 즉 12節氣(절기)와 12中氣(중기)로 나누어 표현하는 이 오래된 방법은 시적이자 상징적이며 그 속엔 물리적 순환만이 아니라 생명 순환의 심오함까지 담아내고 있다.

 

한 해가 순환하는 모습은 60년 순환에 있어서도 고스란히 적용이 된다. 더 길게는 360년 순환에 있어서도 그렇고 그 이상의 기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운세가 우수에 이르면 어떤 모습일까? 

 

 

60년 운세 순환에 있어 어떤 이의 현재 때가 우수라고 한다면 어떤 일이 그 사람에게 벌어지고 있을까? 한 번 얘기해보자.

 

그 사람의 현재 겉모습은 지금 우수의 마른 가지처럼 겉보기엔 바싹 말라있을 것이다. 거칠하고 건조한 외양일 것이다. 하지만 우수에 이르러 겉으론 마른 가지일 지라도 만져보면 말랑해지고 있듯이 그 사람 역시 겉으론 전혀 볼품이 없고 대다수 사람들이 외면한다. 즉 전혀 존재감이 없다. 망했으며 앞날이 없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우수로부터 땅 속에서 물이 오르듯 그 볼품없는 사람 역시 서서히 봄날을 준비해가고 있다. 땅속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 사람 속에선 뭔가 새로운 것이 준비되고 있지만 심지어 본인 스스로도 그런 줄 모르고 그저 절망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도 이미 포기하고 있다.

 

물이 오른다는 것, 사람에 있어선 신체적인 현상도 있지만 정신 즉 멘탈에 있어서도 물이 오른다. 멘탈에 있어 물이 오르는 현상은 사실 고통을 수반한다. 물이 오른다, 즉 생명력이 다시 주입되는 것이기에 고통스럽다.

 

고통이란 것은 사실 살아보자는 몸부림이다. 신체 어느 부위에 상처가 났을 때의 가장 첫 번째 현상이 痛覺(통각)이다. 아프다. 아파야만 우리 몸의 모든 시스템들이 그 상처 부위에 자원을 집중할 것이고 회복시키려 나설 것이기 때문에 통증이 오고 아프다. 아픈 것은 그 부위에 주의를 집중시키라는 우리 몸의 지상명령이다.

 

그렇기에 운세가 우수에 이른 자가 깨어나기 위해 겪어야 하는 대표적인 증세가 통증이다. 신체의 통증도 있겠으나 정신 즉 멘탈의 통증은 스스로 느끼는 비참함, 한심함, 자괴감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난 왜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하고 自問(자문)하게 된다. 사람은 영리해서 엄살을 부린다, 그 바람에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확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살라고, 문제점을 고쳐서 한 번 다시 잘 살아보라고 통증이 오는 것인데 죽겠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를 기만하는 것이다. 자기기만!

 

 

이생망의 젊은이들에게 

 

 

우리 젊은이들 사이에서 꽤 오래 전부터 ‘N포세대’란 말이 유행하더니 몇 년 전부터는 ‘이생망’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냉정히 말하면 그게 바로 자기 기만이다. 살고 싶으면 살고 싶다고 해야 하고 잘 살아보고 싶다고 아우성을 쳐야지 왜 이번 생은 망했으니 포기한다고 엄살을 부리는가.

 

엄살은 봐주는 사람이 있을 때 어느 정도 통하는 법이지 계속 하면 통하지 않는다. 적당히 해야 효과가 있다. 장기엄살전략은 상책이 아니다.

 

기득권 기성세대를 무찌르고 쳐부수고 우리들이 새로운 대한민국의 주인이 되어야 겠소 하고 눈을 시퍼렇게 뜨고 부라리며 덤벼들어도 어려운 판국에 ‘이생망’이 무엇이란 말인가.

 

안타깝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하지만 정말 속내를 말하자면 엄살 그만 부리고 정신 바짝 차려서 당신들이 숨 쉴 수 있는 세상을 스스로 셀프로 만들어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가진 자와 기득권자들은 절대 그냥 물러가지 않는다. 가진 것을 알아서 내려놓는 자는 소설 속에서나 있지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게다가 오랜 세월에 걸쳐 겪은 경험과 노하우도 풍부하다. 눈치도 빠르고 비위도 잘 맞추며 거짓말도 잘 한다. 실전에 강하다.

 

그러니 그냥 싸움에 나설 경우 젊은이들은 판판이 깨지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깨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덤벼들어야 한다.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이란 말이 공연한 말이겠는가.

 

속아도 보고 깨져도 보고 나뒹굴기도 하면서 단련이 된다. 그렇게 하면서도 다시 일어나 도전하는 힘이 젊은이들에게 있기에 後生可畏(후생가외), 즉 부지런히 기량을 갈고닦은 후배는 선배를 능가할 수 있으니 두려운 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국운은 내년 2022년이 大寒(대한)이다. 온 나라 사람들이 줄어드는 파이를 놓고 저마다 차지해 보겠다고 난리통이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그저 맥 빠지고 김빠진 넋두리를 한다, ‘이생망’이라고.

 

 

우리 국운의 우수를 기다리고 지켜볼 터이니 

 

 

하지만 5년 뒤 2027년이 되면 국운의 雨水(우수)를 맞이한다. 나 호호당은 그 때를 기다리고 있다, 과연 그 때 가서도 젊은이들이 그런 자기기만을 일삼고 있을 것인지 아니면 정말 정신 차리게 될 지.

 

나 호호당의 나이 올 해로서 예순하고도 일곱이다. 갖은 세상의 맛을 두루 씹어도 보고 핥아도 본 묵은 생강이다. 하지만 속내를 한 번 털어놓는다, 정권과 정치인들이 젊은 당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그저 그렇게 해 줄 것 같은 ‘척’을 하고 시늉을 낼 뿐이라고.

 

그러니 그냥 넋 놓고 있을 일이 아니란 얘기이다. 또 그렇다고 해서 무슨 혁명을 하라는 것 또한 아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이미 자유민주주의 나라로서의 경험을 제법 오래 해왔으니 조용하고 힘차게 또 지속적으로 당신들의 세상을 만들어 가면 될 일이라 본다. 힘차게 장강의 앞 물결을 밀어내는 뒷 물결이 되라는 얘기이다. 

 

오늘은 雨水(우수), 천지가 준동하는 첫날이다. 그렇기에 우수는 새 생명과 젊음의 첫 날이다. 우리 국운의 우수인 2027년이 되면 당연히 그런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蛇足(사족)으로 한 마디, 우수가 되었으니 집안부터 청소해보자. 주변이 깨끗해지면 정신도 덩달아 맑고 깨끗해진다. 평범하지만 한 해를 알차게 만들어갈 수 있는 秘訣(비결)이다.

 

변화강박증에 빠진 우리 대한민국

 

 

처음 글에서 우리 대한민국은 과거의 우리 전통과 단절된 나라란 사실에 대해 얘기했다. 다음 글에선 우리 사회가 전통과 단절된 결과 겪게 되는 갈등이 너무나도 크다는 점에 대해서, 다시 말하면 전통이 왜 필요한가에 대해 애기했다.

 

이제 이번 주제를 마무리하는 글을 시작해보자.

 

우리 대한민국과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 면에선 변화에 중독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 사회는 뭐든 늘 새롭게 더 좋게 바꾸고 변화시켜 가야 한다는 강박증 같은 것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를 잡은 게 아닌가 싶다는 얘기이다.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하는 말이 연일 들려오는 사회, 정치인들 그리고 사회운동가들, 여타 학식과 비전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선거 때마다 그리고 평소에도 책과 저술을 통해 부단히 토해내는 말들이다.

 

1945년 해방 이후 그리고 6.25 전쟁 이후, 1987년 민주화 이후 등등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스스로를 바꾸어왔다. 물론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고 많은 방면에서 좋아졌고 나아졌다. 사실이다.

 

오늘의 글로벌 삼성이 존재하고 있는 것 역시 고 이건희 회장이 1997년 책을 통해 마누라와 자식 빼곤 다 바꾸자고 혁신을 주문한 끝에 만들어진 것 분명 인정한다. 선거 때마다 무지막지한 혁신과 개혁을 하내겠다는 대선 주자들의 약속도 물론 대부분이 빈말이었으나 그럼에도 우리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 역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언젠가 이정현이란 여가수가 부른 ‘바꿔’란 제목의 노래가 생각난다. 검색해보니 1999년이었다. 꽤나 히트를 친 노래였다. “바꿔 바꿔 바꿔 모든걸 다 바꿔” 하고 절규하듯 노래하던 기억이 난다.

 

 

변화란 힘든 것인데 그걸 언제까지 해야 하나? 

 

 

그런데 말이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든다, 과거 수십 년 동안 그렇게나 많이 바꾸고 뒤집고 엎어버리고 변화하고 변신해왔는데 아직도 ‘빛의 속도’로 바꾸어야 할 것들이 그렇게나 많이 남아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는 얘기이다.

 

나날이 껍질을 벗지 않으면 정말이지 평범하게 밥 먹고 살기도 어려운 우리 현실이고 실정인가 싶다.

 

바꾼다는 것은 기존의 틀이나 루틴이 현실에 잘 적용되지 않을 때 하는 행동이다. 바꾼다는 것은 새롭게 길을 찾아가고 새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 그건 그야말로 고생길이다.

 

그런 까닭에 이제 나 호호당의 귀에 뭔가 바꾸자는 얘기는 계속해서 고생을 해보자는 얘기로까지 들린다.

 

과거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가였던 트로츠키의 주장 중에 유명한 것으로서 “영구혁명론”이란 것이 있다. 영어 제목으론 ‘Permanent revolution’이다. 젊은 시절엔 그게 뭔지 잘 몰라도 말 자체만으로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진정한 무엇이 이루어질 때까지 끊임없이 혁명을 지속해가야 한다는 그 패기에 크하! 하고 감탄을 했다.

 

어린 시절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만 이룩하면 정말이지 잘 살게 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의 문제점과 불만에 대해 최장집 교수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란 제목의 책을 발간했을 때 나 호호당은 지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 끝이 없구나! 엔드리스(endless)이구나! 했다.

 

 

툭 하면 바꾸자고 하니 몸살이 날 지경인데 

 

 

민주화가 이루어진 1987년 이후로도 정권이 바뀌면 으레 한 번쯤은 개헌설이 흘러나온다. 헌법이란 국가 운영의 기본 틀인데 그걸 정권 교체기마다 나온다는 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5년마다 근본을 바꾸어야 할 정도로 우리에겐 문제가 많은 걸까?

 

헌법이란 그 정신부터가 최상의 이성과 지성을 담았기에 한 번 제정되면 기본적으로 변화되지 않기를 바란다. 헌법의 정신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란 얘기이다. 그런데 우리는 헌법 개정 즉 개헌을 툭 하면 일반 법률 조항 바꾸듯이 바꾸려고 한다.

 

문재인 현 정부가 시작할 때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얘기를 했다. 아연실색했다. 아직도 우리나라가 나라다운 나라가 아니었던가? 크고 작은 문제야 어느 나라나 있는 법인데 우리 대한민국은 그래도 글로벌리 전 세계적으로 반열에 드는 나라가 아니던가?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나라는 그야말로 ‘꿈의 나라’여야 한다는 말인가, 아직도 우리나라가 나라다운 요소가 그렇게나 많이 부족한가 싶었기 때문이다.

 

과거 한 때 텔레비전 방송에서 MC가 ‘어떤 남성을 이상형으로 생각하시나요?’ 하고 여성 연예인에게 질문하면 ‘저는 남자다운 남자를 이상형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하는 대답을 하곤 했다.

 

하지만 남자다운 남자가 어떤 남자를 말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듯이, 나라다운 나라 역시 어떤 나라인지 알 길이 없다.

 

그렇다고 이 말이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자는 얘기도 아니다. 그래봐야 멋 좀 부려본 정치 레토릭에 불과하니 말이다. 다만 우리 모두에게 깃든 변화강박증 혹은 중독 현상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오리지널인 영국은 아예 헌법, 즉 명문화된 헌법이 없다. 성문헌법이 없어도 될 정도로 잘 확립된 정치적 사회적 전통이 견실 확고하게 자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미국, 글로벌 최강국이자 우리의 모델인 미국의 경우 헌법은 원래의 초기헌법 조항이 7개, 즉 7개조가 있고 추가로 수정된 조항 27개조가 전부이다. 27개의 수정 조항 역시 건국 초기에 수정된 것이 대부분이고 합중국이 쪼개질 뻔 했던 남북 전쟁을 거치면서 일부 수정이 이루어졌다. 그 이후론 몇 개 되지도 않는다.

 

이웃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헌법이 만들어졌을 때 영원히 마모되지 않는 최고의 법적 틀이란 의미에서 不磨(불마)의 헌법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2차 대전 패망 이후 수정이 있었을 뿐이다. 소위 평화헌법이 그것이다.

 

헌법과 관련해서 이런 얘기를 한다고 해서 영국이나 미국, 일본이 우리보다 더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바꿔서 좋다면 당연히 바꿔야 할 것이다.

 

 

전통의 단절이 바람직한 면도 있었지만 

 

 

어떤 면에선 우리가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이처럼 급격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를 찾아보면 전통이 없어진 바람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그럴 수 있었던 점이 있다. 우리야말로 6.25 전쟁을 통해 철저하게 파괴된 상태, 본의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과거 1950-1980년대까지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그야말로 모질고 억척이고 독한 악바리였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 정도까지 발전하고 성장할 수 없었지 않을까 싶기에 그렇다.

 

하지만 언제까지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고 뒤집고 엎고 바꾸면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 革新(혁신), 수레에 씌운 가죽을 바꾼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 생각엔 이제 바꿀 가죽이 남긴 남은 걸까 싶다, 우리 모두 한 번뿐인 인생인데 2-3년 쓰면 버리는 스마트폰처럼 계속해서 바꿔가기엔 너무나도 지치고 힘들다는 말을 지금 나 호호당은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지나치게 각성된 우리 대한민국

 

 

어린 시절부터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들은 얘기들을 상기해본다.

 

과거엔 만주 땅까지 호령하던 고구려는 외세를 끌어들인 비겁한 신라에게 망했다는 얘기, 고려 시대엔 문신들이 무인들을 하인 부리듯 부리다가 떼죽음 당했다는 얘기. 몽골에 대해 끝까지 항쟁하는 삼별초를 고려 조정까지 합세해서 없애버렸다는 얘기.

 

조선시대는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탐관오리들이 다 해먹은 나라였다, 충신이 바른말 하면 잘리거나 귀양 갔다는 얘기, 이순신 장군의 억울한 얘기, 선조란 임금은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애진작에 도성 한양을 비우고 튀었다는 얘기, 학정에 들고 일어난 민초들의 동학운동은 외세의 힘을 빌려 진압 당했다는 얘기, 나라밖의 새로운 문물이 발전하고 있음에도 문을 닫고 우물 안 개구리 하다가 폭삭 망했다는 얘기, 해방과 건국 이후에도 친일파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는 바람에 여전히 어렵다는 얘기 등등 부끄러운 역사로 가득하다.

 

물론 각성을 촉구하고 앞으론 잘 되자고 한 선생님들의 가르침이었지만 동시에 우리 스스로에 대한 自虐(자학)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우리 모두 지나치게 각성된 것 같기도 하다.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을 가질 법도 하다. 전통은 일단 사그리(?) 버리고 볼 그 무엇으로 치부해야만 개념이 있는 현대 한국 시민 자격이 있을 것도 같다.

 

 

변화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시점에 이른 것은 아닐까? 

 

 

하지만 언제까지? 바꾸고 엎어야 하는 걸까. 그렇게 바꿔왔건만 양극화는 왜 더 심해지는 걸까. 변화 자체에 대해 이젠 새로운 각도에서 생각을 더 해봐야 하는 때가 된 것은 아닐까.

 

이제 어느 정도 틀이 잡혔으니 상호 타협해가면서 조금씩 수정하고 양보해가는 것이 경상도 방언으로 ‘확 다 바까삐리’ 하는 것보다도 실은 더 나은 방식이 되는 건 아닐까. 조금씩 수정하고 양보하고 다듬어 가다보면 그게 전통이 될 것이고 이후에 자리를 잡으면 훨씬 더 편안한 대한민국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3회에 걸쳐 적지 않은 얘기들을 했지만 머릿속에는 미처 꺼내지 못한 말과 생각들이 더 많다. 그래서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던 주제였고 역시 꺼내다 보니 이 정도 분량의 글로선 어림도 없음을 알 게 된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마무리해야겠다. 다만 너무 줄이다 보니 원래의 의도가 과연 조금이라도 전달이 될까 싶은 염려도 많다. 아무튼 오늘 글로서 마무리한 것에 대해 스스로 안도할 뿐이다. 긴 한 숨, 휴-.

 

다시 원래 하던 ‘운명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야지 싶다.

 

쉽지도 않고 머리도 무거운 글 읽어주신 독자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 드린다.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또 새벽이다. 바깥은 무지막지한 한파가 몰아쳐 오고 있다. 제발 마지막 동장군의 행차이시길...

 

우리는 정말로 전통과 단절되었는가? 

 

 

앞의 글에서 우리 민족은 예전의 전통을 상실했고 단절했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이 여전히 전통이라고 인식하고 여기고 있는 것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는 의문도 들 것이다.

 

여전히 유교적인 효와 충의 관념도 남아있는 것은 무엇이며 절을 찾는 수백만 신도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싶을 것이다.

당연한 질문이다. 그래서 답을 해야 하겠다, 그건 전통이 아니라 전통의 잔재라고 말이다.

 

먼저 유교부터 살펴보면 예전 시절에 유교는 그야말로 나라의 가르침, 즉 國敎(국교)였으니 오늘에 비유하자면 우리가 국가이념으로 삼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와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유교는 사라지고 그저 묵은 동양철학의 일부로서 일부 대학의 인문학부에서 남아있다. 일종의 문화유적, 심하게 말하면 문화적 殘在(잔재)라 하겠다.

 

따라서 유교적 가치인 효라든가 충에 관한 관념은 아직 남아있긴 하지만 그것이 가지는 강도와 정도는 예전과는 비할 바가 없다. 그저 遺風(유풍)에 불과하다.

 

불교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불교는 이미 조선시대를 통해 일종의 하위문화 정도로 격하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엔 심한 통제를 받았다. 현재 우리 불교의 주류인 조계종만 해도 그 명칭이 생겨난 것은 고려 시대이지만 그로부터 과거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것이 아니다. 1962년에 박정희 정권이 모든 절을 통폐합하고 나서 ‘대한불교조계종’이라고 새롭게 붙였다. (그 뒤에 대처승의 심한 반발과 법정 투정을 통해 태고종이나 천태종 등도 인정을 받았다.)

 

불교의 경우 종교이자 국가통치이념인 유교가 사라지면서 오히려 새롭게 중흥했다고도 볼 수 있다.

 

 

아시아를 통틀어 기독교가 뿌리를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유일한 나라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한 가지만 지적하면 바로 알 수 있다. 수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거대한 아시아 지역의 무수히 많은 나라들 중에 기독교(로마가톨릭과 개신교)가 확실하게 뿌리를 내린 나라는 우리 대한민국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필리핀의 경우 기존의 토속 신앙 위에 로마가톨릭이 덧씌워졌을 뿐이다. 일본에서 교회는 이국적 취향의 결혼식 장소로나 이용될 뿐이고 사회주의 이념의 중국은 기독교가 거의 없다, 다만 도교적인 관념은 여전히 성행하고 있는 중국이다.

 

왜 우리 대한민국만 기독교가 오늘날처럼 확고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을까? 하는 점에 대해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종교에 관해선 그다지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들이는 심성을 가졌기 때문이란 생각도 들겠지만 그건 절대 그렇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전통의 종교가 지녔던 가치와 권위가 사실상 사라져버렸고 여기에 6.25 전쟁을 거친 뒤 우리가 세계 최강국이자 선진국인 미국을 모델로 하는 발전해가는 과정, 즉 美國化(미국화)되는 과정에서 미국의 종교가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슬람이 주류인 서남아시아 지역에 기독교가 들어갈 수 있었던가? 어림도 없는 얘기이다. 동남아시아 지역에 인도 사상과 혼합된 이슬람이 들어가서 불교와 섞이긴 했으나 새로운 종교가 우리처럼 단시간 내에 들어와 자리를 확실하게 잡은 나라는 전 세계에 우리나라 밖에 없다.

 

이것만으로도 우리가 이전의 전통과 엄청난 단절을 겪었음을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모든 면에서 미국을 모델로 미국화되고 있는 우리

 

 

우리 대한민국이야말로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미국화(Americanization)되고 있는 나라라고 해도 전혀 무리가 없다.

 

젊은이들이 우스갯말로 미국을 ‘천조국’이라 부르고 反美(반미)운동권하던 이들이 기득권이 되면서 자녀들을 대거 미국 유학을 시키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미국의 일개 주로 편입되지 않는 이상 완전히 미국화되진 않을 것이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하지만 무수히 많은 방면에서 미국적 요소들이 가득 듬뿍 들어차가고 있을 뿐이다. 마치 수학의 微分(미분)처럼 미국 쪽으로 무한히 수렴한다고 할까!

 

섹스는 인간의 기본적이고도 엄청나게 강한 욕구, 즉 본능의 하나로서 모든 문화와 전통의 뿌리에 자리한다. 그런데 2000년대 초반 미국 드라마 “섹스 앤 시티”가 방영된 이래 우리의 성윤리는 사실상 미국과 별 차이가 없어졌다.

 

예전에 ‘혼전 성관계’란 말은 입에 올리기만 해도 가십거리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남녀가 혼전에 섹스를 하면 이른바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섹스와 결혼은 별 관련이 없게 되었다. 성 모럴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뀐 셈이다.

 

 

평범한 일상으로 받아들이긴 하지만 

 

 

우리 모두 하루하루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나날이 엄청난 변화 속에서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긍정적인 변화라면 좋은 게 아닌가 싶겠지만 사실 변화는 그 자체로서 우리 모두에게 스트레스를 준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 변화 스트레스에 대해 이젠 만성이 되었고 그러다보니 일상이 평범하게 느껴지는 것이라 본다.

 

하지만 일상으로 느낀다 해서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만성이 되었을 뿐인데 이는 우리의 멘탈이 그렇다는 것이고 우리 몸은 정직하게 그 고통과 갈등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다.

 

이번에 전통과 단절된 우리 대한민국에 대해 이렇게 얘기를 꺼내게 된 배경 역시 바로 이 대목이다.

 

우리 대한민국 사회가 과거에 비해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고 소비도 과거와는 비할 바 없이 윤택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구성원이 힘들어하고 갈등의 총량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까닭이라고 나 호호당은 보고 있다.

 

자고 나면 변화해있고 또 변화에 따라가고 적응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사회가 바로 우리 대한민국인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 사회가 겪는 갈등의 근원적인 이유는 

 

 

빈부의 격차와 양극화 문제, 어려운 취업, 좋은 일자리의 절대 부족, 무지막지한 가계부채와 부동산 가격 상승, 정치적으론 극심한 진영 갈등과 투쟁 등등 당면한 문제점들이 태산과도 같이 산적해 있지만 사실 우리 모두가 그런 어려움과 갈등으로 인해 힘들어하기 보다는 그 바탕에 깔린 전통의 부재와 단절이 있기 때문이라 본다.

 

그런데 말이다, 전통의 부재와 전통의 단절로 인해 우리가 심한 갈등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이 어쩌면 독자들로선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나 호호당 또한 이 대목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가 그리 만만하지 않아서 오래 전부터 이 주제에 대해 말하길 망설였다.

 

 

전통이란 결국 세월 속에서 잘 다듬어진 루틴(routine)이기에 

 

 

앞의 글에서 전통의 의미에 대해 사전적 의미를 얘기한 바 있지만 다시 한 번 전통이란 무엇인가를 얘기해보자.

 

전통이란 것이 생기려면 그 이전에 모범적이고 준거가 되는 틀이나 式(식)이 있어야 한다.

 

틀이나 식은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는다. 가령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여러 가지 다양한 시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가장 적합하다 싶은 방법이 제시될 것이고 그게 나중에 틀이 되고 式(식)이 된다. 즉 어떤 문제에 대해 대처하는 기준이자 표준적인 방법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한 번 틀이나 식이 정해졌다고 해서 그게 영구적으로 반복되고 답습되지 않는다. 새로운 상황이 생겨나면 다시 그에 걸맞게 수정이 가해질 것이다.

 

이와 같이 처음에 어렵사리 정해진 틀이나 식이라 해도 그것은 끊임없이 수정되고 새로운 요소가 가미되면서 세월의 경과와 함께 더욱 세련되어진다. 결국 그런 식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이어지다 보면 그게 훗날에 가서 전통적인 틀 또는 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니 그를 줄여서 전통이라 부르는 것이다.

 

오늘날 어떤 국가나 사회가 질서 있게 유지되려면 법이 있어야 한다. 이른바 법치국가인 것이다. 그런데 법이란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이전 오랜 세월 동안에 생겨난 전통적인 처리방법과 절차 등에 대해 그 국가나 사회가 명문화된 룰(rule)로 만든 것이다.

 

우리가 문화라 부르는 것도 실은 기본적으로 전통문화란 사실이다. 새로운 풍속이나 유행이 생겨나면 그를 문화라 부르진 않는다. 어느 정도 시간과 세월이 흘러서 그게 나름 정착이 되면 新(신)문화라 부르고 그게 나중에 더 오래 되면 수식어 없이 그냥 문화라 한다. 이에 더 오래 되면 전통문화가 된다. (전통문화가 반드시 자생적으로 사회 내부에서 생겨나야 한다는 법은 없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새롭게 해법을 모색하다 보니 힘들기만 한 우리 대한민국

 

 

지금까지 전통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을 했는데 그렇게 한 까닭은 전통이 없다면 다시 말해서 전통이 없거나 단절된 사회일 경우 생겨나는 모든 새로운 문제와 상황에 대해 준거가 되는 틀이나 식이 없다는 얘기가 되고, 그 결과 늘 새롭게 해결 방법을 모색하고 찾아가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변화가 생길 때마다 문제가 주어질 때마다 나름의 루틴(routine)이나 방법론이 없다면 그 사회는 그를 해결하기 위해 늘 엄청난 갈등과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스트레스가 많아지고 또 누적될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고 대한민국 사회이다. 전통이 없다는 말, 전통과 단절되었다는 말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검증되고 다듬어지고 확립된 좋은 루틴이 없다는 뜻이기에 그 결과 전 구성원이 더 많은 고통과 갈등을 겪고 있다는 말이 된다. 바로 우리가 그렇다.

 

다음 글에서 최종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