薄明(박명)의 시간



봄비 내린다는 절기인 雨水(우수)에 채 미치지 못했는데 봄비가 내린다. 따뜻한 겨울을 났으니 좋은 일이다. 해도 제법 길어졌다, 저녁 6시가 한참 지났음에도 하늘이 그다지 어둡지 않다. 서울의 일몰이 6시 8분이니 그렇다. 


해 진 후 30분 정도의 시간,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까지의 그 사이 시간, 薄明(박명)이라고 부르는 이 시간을 많이 좋아한다. 사물이 여전히 다 눈에 들어오고 여기저기에서 가로등이 밝혀지기 시작하는 때, 요즘엔 서쪽 하늘에 금성이 어느 순간 툭-하고 튀어나온다. 아직까지 금성이 나오는 최초의 순간을 포착해본 적은 없어서 볼 때마다 또 놓쳤네! 하면서 아쉬워한다. 



N포 세대의 일본 청춘들


간밤에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란 제목의 일본 영화를 보았다. 모르는 영화였지만 그냥 보게 되었다. 삶에 대해 어떤 희망을 갖는 것 자체를 오히려 경계하며 살아가는 도쿄의 처녀와 그와 비슷한 처지의 총각의 얘기였다. 간단히 말해 모든 것을 포기한 일본의 젊은 세대들의 스토리였다. 


2017년의 영화였는데 일본은 우리를 늘 몇 년 앞서가니 저 모습은 몇 년 뒤 우리 젊은이들의 모습이겠구나 싶어 더 공감이 갔고 가슴이 아팠다. 영화는 물론 영화, 하지만 너무 현실 같아서 보다가 중단했고 그러다가 결국 끝까지 다 봤다. 


일본 사람들은 근무할 때 특히 고객 앞에선 늘 상냥한 미소로서 맞이한다. 억지 미소인데 일본 사람들은 그런 것이 몸에 배어있다. 일본인에게 있어 미소는 근무나 서비스의 기본 항목인 까닭이다. 


우리와 일본 사람의 차이라면 어쩌면 이게 전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가식의 미소라도 지어야만 한다고 여기는 일본 사람, 그런 가식 따윈 굳이 필요치 않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우리, 이것 하나만으로도 우리와 일본 문화의 차이를 거의 모두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이따금씩 한다. 



일본, 마스크의 문화



나 호호당은 일본의 문화를 ‘마스크의 문화’라고 여긴다. 타인을 대할 때만이 아니라 어지간히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자신의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 특히 불편한 심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은 상대방에게 부담이 되고 실례가 된다는 생각을 가진 일본인이라 여긴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많이 다르다. 가까운 사이인 경우 거침이 없다. 내가 너 아니면 누구에게 이런 힘든 얘기를 털어 놓겠니 하면서 속내를 주저하지 않고 얘기한다. 상대의 하소연을 들어준다는 것은 어느 정도까진 그 해결에도 동참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니 부담을 느낄 때도 많다. 


그 바람에 야, 그만 좀 해라 하고 말하면 그야말로 섭섭하고 서운한 표정 가득 짓는 우리들이다. 마치 배신이라도 당했다는 듯이. 


그렇기에 일본 사람들의 대인관계는 마치 연하게 우려낸 묽은 녹차 맛 같다는 생각이고 우리들의 대인관계는 진한 곰탕 국물 맛 같다는 생각이다. 이에 우리 사람들은 사실 차를 즐겨하는 편이 아니다. 밍밍한 까닭이다. 그보다는 강렬한 향을 가진 커피, 특히 나이든 세대들은 단연 커피믹스를 즐긴다. 


갑질이란 말, 권력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가 그 아래 사람에게 마구 행세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갑질 또한 우리가 일본보다 더욱 노골적인 것 역시 속내를 좀처럼 감추지 않는 우리들의 성향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일본, 愛憎(애증)의 대상이어서



나 호호당 역시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있다. 선친께선 일제 말기 학도병으로 징집되는 바람에 遺緖(유서)를 쓰고 일본에 끌려가서 여러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는 얘기를 어려서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나름 은근한 친밀감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는 최근의 흐름으로 볼 때 조금은 부담이 된다. 그렇기에 왜 그런 친밀감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라도 생각을 밝힐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친밀감을 갖는 이유



일본에 대해 애정을 갖는 근본적인 이유는 일본 사람이라고 하는 그들 대부분이 먼 옛날 이 땅에서 바다를 건너가 정착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대략 기원 전 1000년부터 기원 후 5백년 정도에 걸쳐 끊임없이 이 땅에서 이주해간 사람들이기에 우리와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가까운 血緣(혈연)의 관계란 점에서 일본에 대해 애정을 갖는다. 



교토를 개척한 이들 역시 건너간 사람들



특히 일본 역사에서 야요이 시대라고 부르는 시기, 한반도로부터 큐슈를 지나 일본으로 들어간 야요이인들은 한반도에서 유래한 수도경작(水稻耕作)을 통해 기원전 3세기 경부터 기원후 3세기 중반까지 일본 열도 각지에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들과 우리 사이에 사실 별 차이가 없다는 얘기이다. 


일본의 역사 古都(고도)인 교토를 먼 옛날 처음 개간했던 사람들은 당시로선 혁신적인 기술인 제방을 쌓아 농토를 넓혔다고 한다. 이들은 일본에선 賀茂(가무)씨족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어 발음으론 ‘가모’라고 한다. 


그들은 교토 북쪽에 터를 잡고 살면서 조상들의 사당을 세웠는데 그를 ‘가모신사’라 한다. 교토의 가장 오래된 神社(신사)인 것으로 전해진다. 


가모 씨족, 또는 가모씨에서 가모란 말의 유래는 흥미롭게도 그들이 모시던 신앙인 三足烏(삼족오)에서 왔다는 점이다. 삼족오는 태양 속의 까마귀이자 태양의 전령이고 또 까마귀는 우리 옛말에도 ‘가마귀’라고 했다. 


가마귀에서 끝말인 귀는 기로서 새에 대한 총칭이다. 기러기, 비둘기 등등 새를 지칭하는 말이기에 가마귀는 가마기인 것이고 검은 새를 말한다. 중국에선 玄鳥(현조) 즉 검은 제비이고 우리는 까치이며 일본에선 까마귀로서 실은 다 같은 말이다.

 

삼족오는 중국 북부에서 만주, 한반도, 아울러 일본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있던 고대 신앙으로서 이른바 東夷(동이)족의 것이다. 특히 고구려 시절엔 최고 권력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賀茂(가무)씨, 일본 역사의 중핵이자 古都(고도)인 교토를 처음 개척한 사람들 역시 이 땅에서 건너간 사람들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일본의 저 수많은 神社(신사)란 것은 결국 이 땅에서 건너간 선조들을 기리는 사당이라 봐도 절대 틀리지 않는다.


 

백제의 멸망과 동시에 생겨난 일본



日本(일본)이란 국호가 처음 등장한 것은 기록에서 보면 중국 역사서엔 670년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702년이라 한다. 


어떤 연유로 해서 그 무렵에 와서 갑자기 日本(일본)이란 나라 이름이 생겼을까? 그 까닭에 대해 나 호호당은 그게 우연이 아님을 알고 있다. 


백제가 멸망한 것은 660년이었기 때문이다. 母國(모국) 백제가 없어지자 엄청난 충격을 받은 일본 쪽은 급기야 백제와 떨어져 자립 혹은 독립하기로 마음을 먹고 만든 국호가 일본이었던 것이다. 모국 백제가 사라졌으니 이 땅 즉 일본 열도에서 백제를 이어서 독립하자는 저들의 결정이 국호 日本(일본)이란 명칭에 담겨있는 것이다. 


백제의 멸망이 즉각적으로 일본이란 나라를 생겨나게 한 셈이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



일본이란 국호를 짓고 독립한 것만이 아니라 아예 역사도 새로 쓰기로 마음을 먹고 편찬한 것이 바로 日本書紀(일본서기)였다. 당시 일본의 왕인 덴무가 명을 내렸고 이에 680년경에 시작해서 720년에 완성한 것이 일본서기인 것이고 그 바람에 엄청난 창작본이 되고 말았다. 역사 세탁을 한 것이다.

 

반면에 우리의 고대 역사서인 三國史記(삼국사기)는 고려 시대에 편찬되었는 바, 그 당시 마침 서경( 지금의 평양)천도론을 주장했던 묘청의 난을 진압한 김부식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는 대단히 거칠고 간단하게 다루어졌다. 신라 중심의 역사관이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우리 고대사의 진면목은 창작본인 일본서기와 신라 중심의 삼국사기에 의해 영영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삼국사기의 잘못도 적지 않다. 일례로서 중국 역사서인 宋書(송서)나 여타 역사서에 보면 “其後高驪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라고 적혀 있다. 번역하면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했고 백제가 요서를 차지하여 다스렸으니 진평군 진평현이라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 역사서인 通典(통전)엔 진평군의 위치에 대해 “今柳城北平之間”이라 되어 있다. 기록에서 柳城(유성)은 지금 중국 요령성의 차오양 시이고 北平(북평)은 지금의 베이징 부근을 말한다. 문자 그대로 고대 중국의 遼西(요서)는 한 때 백제의 강역이었다는 얘기이다. 


이에 대해 나름 많은 의견과 주장들이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백제가 한때나마 요서 지역을 차지하고 다스렸다는 점에 대해 중국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엔 그런 내용이 없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고구려는 아쉽게도 발해가 망하면서 우리 역사 흐름에서 사라져갔고 삼국을 통일한 이른바 통일신라가 지금 우리 한민족의 원형이라 하겠지만 백제 또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백제의 후예로서의 일본



이제 나 호호당이 왜 일본에 대해 일제치하에서 우리가 핍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름 애정을 갖는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저들이 백제의 후예란 점 때문이라 하겠다. 


물론 바다 건너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다 보니 차이점이 적지 않은 우리와 일본이다. 하지만 전 지구상에서 살펴보면 가장 닮은 점이 많은 나라가 또 우리와 일본이란 점이다. 차별하고 구분하자면 한도 끝도 없이 미세하게 구분하고 차별해낼 수 있다, 하지만 큰 눈에서 보면 일본 아니 일본사람들만큼 우리와 유사한 사람들 또한 없다. 


먼 미래를 생각할 때 우리 대한민국이 번영 발전함에 있어 친한 이웃을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니 그런 점에서 북녘의 우리 반쪽은 물론이고 일본과도 친하게 지내야만 한다고 본다. 물론 당장은 어려워 보이겠지만 실은 먼 미래의 일도 아니라 본다. 


그래야만 바로 서해 건너의 땅 넓고 인구 엄청 많은 중국에 대해 나름 견제도 해가면서 또 그를 통해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나 호호당은 늘 하고 있다.